[96] 디 임팩트 4권 21화
이미 고대 도시 유적 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집들이 세워져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도시 북쪽에 있는 다크캐슬로 향했다. 그나마 저 성이 고대인의 성으로서 변함없이 세월을 버텨 왔다면, 저 내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딘과 리드만이 말한 폭주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고대 도시의 유적 안에 남아 있다면, 의외로 그 가능성은 저 성이 높을 수 있다.
언젠가 한번은 들어가 살펴볼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는 팔뚝과 손만 남은 조각상을 바닥에 다시 내려놓고 일부만이 남아 있는 집의 벽으로 걸어갔다.
‘홍영 씨는 어떤 집을 좋아할까?’
작은 빌라에서 거실 하나를 두고 함께 살고 있지만, 때때로 거실 없이 한방에 사는 꿈을 꾸기도 한다.
“진짜 집을 지을 때가 올 거야. 이곳이 아니라, 홍영 씨가 있는 곳에서.”
도현은 무너진 벽을 손으로 소리 나게 탁탁 두드리며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다들 잘 있겠지?”
이계에 온 지 불과 며칠 안 지났지만, 도현은 벌써부터 그들이 그리웠다.
커피숍에서 맞은편 상가 건물을 감시하던 서지철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꽝 내리쳤다.
몇몇 손님들이 창가에 있는 그를 힐끔거렸지만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제어하기 힘들었다.
‘이 망할 자식이 정말! 또 없어졌네!’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니던 홍영이 어느 순간부터 또 혼자 다녔다.
상가 건물 입구를 아무리 감시해도 도현은 보이지 않았다. 매일같이 도장에서 사는 녀석이 안 보인다는 것은 안 좋은 징조, 불안한 징조였다. 그는 앞서 이런 경험을 몇 차례 겪었다.
‘미친 자식. 도대체 나타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라져!’
엉덩이를 얻어맞은 치욕을 갚기 위해 밤낮으로 잠도 줄이며 혼자서 외롭게 도장 주위를 맴돌았다.
코끼리도 잠재울 강력한 마취 총도 준비했고, 기회를 봐서 실행만 하면 되는데, 또 없어졌다.
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부르르 떨던 서지철은 전화를 받았다.
“네.”
-형님, 접니다. 태식이요.
서지철이 커피숍 안을 슬쩍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너 언제 나왔냐.”
-두 달 좀 넘었습니다. 그동안 잘 계셨죠?
“나야 뭐 그렇지.”
-형수님은요.
“이혼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딸은?
“애 엄마가 키우고 있어.”
서지철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다가 지나가는 종업원이 째려보자 슬며시 담배를 입에서 뺐다.
“너는 어때?”
-나오니 힘드네요. 성실히 살려 해도 자꾸 태클 거는 새끼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조용히 살려고 하면 사람이 쪼다로 보이나 봐요.
“손 씻기로 하고 자수한 거잖아. 잘 참아 봐.”
-형님, 저 다시 일 시작하려고요.
“뭐야?”
버럭 화를 내던 서지철은 주위 눈치를 보며 언성을 낮췄다.
“그럴 거면 왜 손 씻는다고 하고, 그 미친 짓거리를 한 거야? 너 똘아이냐?
-아이, 형님은. 말씀을 해도 참.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도 사흘밤낮을 고민하다 결정했어요.
“왜 전화했어?”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할까 해서 전화드렸죠.
“나 영업 중이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시간 나면 이 번호로 전화 주십시오.
“그래.”
전화를 끊던 서지철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그를 불렀다.
“야, 호태식이.”
-네.
“너 일 다시 시작한다고?”
-네.
“그럼 나랑 같이 일 하나 해 볼래?”
-형님하고요? 하하하, 형님 원래 혼자 다니시잖아요.
“나 깨졌다.”
-예? 형님이요? 아니, 누구에게요?
“검술 도장 하는 놈에게.”
-이야, 굉장한 놈인가 보네요. 형님이 스스로 깨졌다고 할 정도면요.
“하아, 그렇게 됐다.”
서지철은 변장용으로 낀 뿔테 안경을 벗으며 피곤한 듯 손으로 눈을 지그시 눌렀다.
“할 거냐?”
-아니요.
“야이, 개…….”
-농담입니다, 농담. 형님이 부탁하는데, 제가 거절할 수 없지요. 어디로 가면 됩니까?
“조심해서 다녀오시고 내일 보도록 하죠.”
몬스터 사냥꾼을 만나러 가는 루드에게 도현이 말했다. 루드는 이번에도 이틀 일정이었다.
“당신은 어디 가는 거요?”
루드의 물음에 도현은 북쪽을 가리켰다.
“몬스터 잡으러 갑니다.”
“농담하지 마시오.”
어젯밤에 루드는 도현에게 어디서 한 번에 그런 큰 목돈을 구했냐고 은근히 물었다. 도현은 몬스터를 잡았다고 했고, 그는 믿지 않았다.
도현은 활도 독병도 없었고, 보이는 무기는 허리에 찬 검 한 자루와 단검이 전부였다.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그곳에서 사냥할 수 있는 차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혼자서 말이다.
“누구 호주머니라도 턴 거요? 다 이해할 테니 말해 보시오.”
“하하하, 아니라니까요. 아무튼 저는 갑니다.”
도현이 웃으며 뒤돌아서자 그의 등에 걸린 커다란 가죽 가방이 루드를 약 올리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상하네. 거참, 거짓말을 이렇게 잘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도현이 검술 솜씨가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하고 있다. 어제 그가 보여 준 한 수 때문에. 그래도 혼자서 돈이 되는 몬스터를 사냥했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가 어려웠다.
루드는 왈스의 집으로 향했고, 그는 그곳에서 새로 합류한 몬스터 사냥꾼과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반갑소. 블리잭이오.”
“루드요.”
“오늘은 그 짐꾼과 함께 오지 않았군.”
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 그 사람은 다른 일을 하겠답니다.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왈스는 침착하게 별말 없이 따라와 주던 도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그는 어제 우연히 만나 술을 한잔한 블리잭의 어깨를 두드리며 먼저 집밖으로 향했고, 일행 중 맨 뒤에서 따라가던 블리잭은 왈스의 2층 집을 가볍게 둘러봤다.
“집 좋군.”
도현은 주변의 동태를 살피면서 부지런히 칼을 움직였다. 어제보다는 가죽에 붙은 우스트랄의 살점이 잘 떨어져 나갔다.
쓰스스슥. 싹싹.
가죽에 구멍이 났지만 어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날씨가 왜 이렇게 추워지지?”
둘둘 말린 우스트랄 등가죽을 가방 안에 넣으며 도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침에 맑았던 하늘은 회색빛 구름에 가려져 우중충했고, 찬 바람이 세차게 불어 그의 갑옷 사이로 들어왔다.
루드는 겨울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했는데 이상했다. 분위기가 곧 눈이 오려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막 몬스터의 가슴에 검을 꽂을 때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도현이 죽인 몬스터의 붉은 피에 떨어져 녹아 사라졌지만 잠시 뒤에는, 몬스터의 피를 흰색으로 뒤덮을 정도로 쏟아졌다.
폭설이다.
서울에서도 가끔 보던 폭설의 두 배는 됨 직한 눈 세례에 도현의 어깨와 머리는 금세 눈으로 뒤덮였다.
“조짐이 심상치 않아. 계속 내릴 것 같아.”
도현은 가방을 등에 메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오래 사냥을 할 처지가 못 됐다. 폭설에 갇히기 전에 몬스터를 잡고 빠져나가야 한다.
눈을 박차며 달라가던 그의 눈에 여러 마리의 몬스터에 쫓기는 사람들이 포착됐다.
무크람 세 마리에 우스트랄 두 마리까지.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몬스터 사냥꾼들을 쫓는 장면은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어쩌다 저렇게 된 거지?’
도현은 달리는 방향을 바꿔 몬스터 뒤를 쫓았다. 몬스터가 사냥꾼들을 쫓고 도현이 몬스터의 뒤를 쫓는 형국이었다.
휘이이잉!
강풍에 눈이 섞이자 눈보라가 됐다.
‘간결하고, 빠르게.’
스르릉.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뽑아 든 도현은 달리는 속도를 배가해 몬스터들 사이를 지그재그로 통과하며 쾌검을 수없이 날렸다.
검의 기세에 눈들이 빨려 들어가는 장관을 연출하며 무크람 세 마리가 거의 동시에 좌우로 픽픽 쓰러지며 눈밭에 피를 쏟아 냈다.
그리고 그는 우스트랄을 유인해 숲 저편으로 데리고 갔다.
“뭐, 뭐지?”
도망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속도를 늦추며 뒤를 확인했다.
쫓아오던 몬스터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한자리에 다시 모인 그들은 리더인 왈스를 쳐다봤다.
“이상하지 않소? 한번 가 볼까?”
“아니, 오늘 사냥은 이것으로 끝내지. 갑자기 눈도 오고. 이러다 숲에 갇혀서 다 죽을 수가 있어.”
“젠장, 빈손으로 가는군. 헛걸음했어.”
“더 큰 문제는 겨울이 너무 빨리 왔다는 거야. 그동안 사냥은 어렵잖아.”
사냥꾼들과 몬스터 해체자 루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겨울에는 눈이 자주 내리고 양도 많다. 춥기도 추워서 이틀간 숲이나 산에 머물며 사냥을 온전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겨울 몬스터 사냥은 피한다.
“가지.”
왈스가 앞장서서 다크캐슬로 향하자 사람들이 쌓인 눈을 헤치며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힘내시오. 좋은 날이 있겠지.”
블리잭이 뒤로 다가와 루드의 어깨를 툭 치며 밝게 말했다.
“한잔하시겠소?”
술통을 꺼낸 블리잭이 루드에게 내밀었다.
“아니, 어떻게 술을?”
루드가 조용히 말을 하며 앞서 가는 왈스를 쳐다봤다. 사냥 중에는 술이 금지되어 있었다.
“왠지 오늘 이럴 것 같아서 추위를 녹이려고 가져왔지.”
웃으며 말한 블리잭은 루드의 손에 술통을 쥐여 줬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답답하게 살지 맙시다. 안 그렇소?”
사내답게 말하는 그의 행동에 피식 웃은 루드는 왈스가 보기 전에 재빨리 술을 입에 넣었다.
목구멍부터 가슴까지 후끈 달아올랐다.
“좋군.”
“당연히 좋지. 술인데, 하하하.”
블리잭은 낮게 웃으며 술병 마개를 닫았다.
장갑 없이 맨손으로 우스트랄의 등가죽을 벗기던 도현은 금세 손이 얼어 갔다. 눈만 오는 게 아니라 기온까지 급강하해서 시간이 갈수록 추위가 맹위를 떨쳤다.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 가며 그는 왈스 일행을 쫓던 우스트랄 두 마리의 등가죽을 모두 벗겨 내는 데 성공했다.
강풍에 체감온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일교차가 심했던 사막의 밤보다 훨씬 심한 추위였고, 벗겨 낸 등가죽을 망토 삼아 몸을 감싸고 싶을 정도였다.
“무서운 날씨다. 한순간에 이렇게 겨울이 오다니.”
추위로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변한 도현은 이만 다크캐슬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숲을 벗어나기 위해 달렸다.
어느새 무릎까지 쌓인 눈이 그를 방해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후우, 후우.”
고정된 자세로 등가죽을 벗기며 내려갔던 체온이 조금씩 올라갔고 창백했던 피부가 약간이나마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캬아아아.
달리는 그의 옆에서 무크람이 튀어나왔다.
번쩍.
도현이 반사적으로 휘두른 일 검에 목이 깊게 갈라진 무크람이 몸을 활짝 벌리며 눈밭에 쓰러졌다.
몬스터의 기운이 그의 타투로 흡수됐고, 그 기운은 몸을 돌다가 단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평상시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내공과 합해지지 않고 기운이 다시 타투를 통해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뭐지!’
깜짝 놀란 도현이 급히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내가 잘못 느낀 건가?”
타투를 통해 흡수됐던 몬스터의 기운이 고스란히 다시 배출되자 도현은 추위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이 됐다.
“확인해 보자.”
그는 거의 빠져나왔던 숲 안으로 다시 들어가 강한 눈빛으로 몬스터를 찾아나섰다.
얼마 안 돼, 눈보라를 맞으며 어슬렁거리던 몬스터 한 마리가 도현의 검에 옆으로 쓰러졌다.
도현은 즉시 눈 속에서 가부좌를 틀며 타투를 통해 흡수된 몬스터의 기운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면밀하게 살펴봤다.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있던 도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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