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97화 (97/575)

[97] 디 임팩트 4권 22화

착각이 아니었다.

몬스터의 기운이 단전에 머물지 못하고 그대로 타투를 통해 빠져나가 버렸다.

눈을 번쩍 뜬 도현은 벌떡 일어나 몬스터를 찾아 다시 한 번 확인을 해 봤다.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시 확인을 했다. 그리고 또 확인을 했다. 몬스터를 계속 잡으며 시간은 흘러갔고, 눈은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멈추지 않는 눈에 얼굴까지 잠길 정도였다.

“빌어먹을!”

답답함과 울분이 담긴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크게 한마디 외친 도현은 이를 악물고 숲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산도 이미 같은 높이의 눈이 쌓여 있었고, 그는 헤엄치듯 눈을 헤치며 산을 넘어갔다.

그 와중에 몬스터를 만나 또 잡았고, 그는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릇이 찬 거야. 그러니 더 받아들이지 못하고 밖으로 내보내지.’

그의 몸이 내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에 이른 것 같았다.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왼팔의 타투는 황금색으로 변화가 없었다.

이건 타투와는 상관없는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그릇을 더 키우는 거야. 하지만 그릇을 어떻게 더 키우지?’

생각에 잠겨 산을 내려가던 도현은 발을 헛디뎌 아래로 빠르게 굴렀다.

푸욱.

눈 속에 파묻힌 도현은 그 속에서 하늘을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좋아, 한번 해 보자고! 내가 여기에서 포기할 것 같아! 반드시 이 고비를 넘을 테다!”

혈투

아침에 보았던 도시의 풍경이 아니다. 도시 전체가 눈으로 하얗게 변했다.

‘그래도 저쪽보다는 여기가 훨씬 났군. 비교할 수 없을 정도야.’

눈이 쌓인 정도가 달랐다. 사람들이 오가는 데 지장이 없는 발목 정도의 깊이다.

도현은 눈을 밟으며 노스리어 상점가로 향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툼해져 있었고, 목도리가 결합된 망토를 두른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내공이 더 이상 늘지 않게 됐다는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한 도현은 깊이 생각하는 눈빛으로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다가 몬스터 재료를 매입하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보다는 많이 좋아진 등가죽의 품질로 인해 도현은 장당 금화 열네 개를 받고 등가죽 세 장을 팔았다.

금화 수십 개가 생겼지만, 넓은 집터에 집을 제대로 지으려면 아직 돈이 많이 부족했다.

‘그릇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그는 복잡한 심정으로 루드의 집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이디언은 2층 테라스에서 거대한 성을 바라봤다. 낮부터 내린 눈으로 도시 색깔이 바뀌었지만, 저 성은 워낙 검은색 일색이라 흰 눈에도 본래의 빛깔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자가 여기에 있을까?’

그녀는 확신하지 못했고, 윌벤슨이 좋을 결과를 가지고 오길 기대했다.

“이디언 님, 주인님이 찾으십니다.”

작은 키에 배가 불룩 나오고 팔이 짧아서 어딘지 우습게 보이는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들창코에 얼굴이 둥근 그는 치아까지 삐뚤빼뚤해서 입을 벌리고 서 있으면 생각이 없는 바보처럼 보였다.

“어디죠?”

“이 집이 아닙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이디언은 아랫배가 심하게 나온 들창코 사내를 따라 어느 한적한 곳에 위치한 단층집으로 들어갔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텅 빈 집이었다.

“겨울이 너무 빨리 왔어.”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윌벤슨이 몸을 돌려 이디언을 응시했다.

“자네는 추위에 강하지? 태어난 곳이 추운 곳이라서.”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걸어오면서 따뜻한 옷을 사고 싶었으니까요.”

말을 할 때마다 그녀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눈이 오며 추위도 몰아쳤다.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군. 비버.”

이디언을 데리고 온 사내가 딴짓을 하다가 얼른 윌벤슨을 쳐다봤다.

“상점에 가서 이디언이 입을 만한 겨울옷을 사 와.”

“예, 주인님.”

허겁지겁 문을 열고 뛰어가다 눈길에 넘어진 비버가 다시 일어나 달려갔다.

“여기로 오지 말고 집에 가져다 놔! 알겠나!”

“예, 주인님!”

멀어지는 비버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뒤돌아선 윌벤슨은 이디언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자네가 찾던 그 사내 말일세. 사람들을 통해 알아보니 다크캐슬에 온 게 맞더군.”

이디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도 혹시 파악됐습니까?”

그녀가 한 걸음 다가오며 물었다.

“물론이지.”

빙그레 웃으며 윌벤슨은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한 장의 지도를 꺼내 공중으로 던졌다.

작게 보였던 지도가 끝없이 허공에서 펼쳐지며 먼지 가득한 집안 전체를 다 채웠다.

지팡이를 든 윌벤슨은 따뜻한 털신을 신고 바닥에 거대하게 펼쳐진 지도 위를 걸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바로 이곳이네.”

쿠웅!

그의 지팡이 끝이 루드의 집 부근으로 정확히 떨어졌다.

“이 곳을 조사해 보면 그자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디언은 차가운 눈빛으로 지팡이 끝이 가리키는 곳을 노려봤다.

“감사합니다, 윌벤슨. 도움 주신 것 잊지 않겠습니다.”

윌벤슨에게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시한 그녀는 도현을 잡기 위해 집 밖으로 급하게 나가려 했다.

“이디언, 잠깐 기다리게.”

“하실 말씀이라도.”

이디언이 문손잡이에 손을 얹고 윌벤슨을 응시했다.

“자신이 있나? 이번에 그자를 만나면 죽일 자신이?”

“없다면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자네 자존심을 자극하려고 하는 게 아니네. 만에 하나라도 다칠 자네가 걱정이 돼서 그러지.”

허리를 숙여 집 안 바닥을 덮고 있는 거대한 지도 끝을 휙 잡아당기자 지도가 다시 작게 접혀서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윌벤슨은 지도를 품에 넣으며 이디언을 쳐다봤다.

“난 우려가 되네. 과연 자네가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자네가 쫓는 자를 죽일 수 있을지.”

이디언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할 수 있습니다.”

“어제 자네 얘기를 듣고 생각해 보았네. 베일 가문의 케일 경이라면 검술 솜씨가 탁월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자네. 마나를 다루는 검사고. 자네가 베일 가문에서 일을 하며 가까이서 본 자니, 굳이 내가 입 아프게 더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검증된 인물이지. 그런데 자네가 쫓는 사내는 그런 강자와 맞서 싸우며 자네까지 곤경에 빠트렸어.”

윌벤슨은 말을 멈추고 긴 흰 수염을 쓸어내렸다.

“이디언, 자네가 낙타로 인해 제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하면, 그는 어떠했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그자는 과연 모든 능력을 다 사용했을까?”

이디언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이보게, 이디언, 우리는 마법사야. 지식을 탐구하고 지혜를 넓히고,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없는 위대한 힘을 사용하는 존재들이지. 그 얼마나 드문 존재들인가? 하지만 우리도 약점이 있지.”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이디언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마법이 실패하거나 한계에 다다르면 우리는 한없이 약한 존재들이 되네. 그래서 마법사는 절대 혼자서 모든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게야. 특히 이번 일과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야.”

윌벤슨은 집 안을 거닐며 말을 이었다.

“케일 경을 상대할 정도면 자네가 쫓는 그자는 분명 마나를 사용하는 검사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 그 점을 고려해야 돼. 실수를 하면 그자의 검이 자네의 어깨가 아니라 이번에는 자네의 목을 노리고 날아올 거라는 말이지.”

이디언이 굳은 얼굴로 창가로 다가가는 윌벤슨을 바라봤다.

“마법사는 옆에서 보조해 주는 사람이 있을 경우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이지 않나? 믿을 만한 사람을 한 명 소개시켜 주겠네.”

“…….”

이디언이 침묵했다.

“확실한 방법을 선택하게, 이디언.”

약간의 시간이 흘렀고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가에 서 있는 윌벤슨을 봤다.

“제게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그자를 제거하는 일을 도와주지. 대신, 지난번에 내가 제안을 했던 일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해 주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과연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디언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자 윌벤슨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자네가 합류하면 성공할 확률이 아주 높아지지. 그럼 승낙한 걸로 알고 그를 부르겠네.”

“누굴?”

“조금 전 말한 사람 말일세. 자네를 도와 그자를 처치할 자.”

윌벤슨이 창가에서 밖을 향해 손짓을 하자 잠시 후 집 문이 열리며 적발의 거한이 쓱 들어왔다.

그의 등에는 거대한 방패 두 개가 매여 있었다.

“인사하게, 오래전부터 그 일과 관련해 나와 힘을 합하고 있는 사람이네.”

이디언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적발 거한 칼라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디언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소, 칼라치요.”

“형, 힘들어!”

밑에서 사다리를 잡고 있던 토밀이 추위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놓으면 죽을 줄 알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붕을 손보던 에드가 말했다.

“손 놔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잡고 있어. 혹시 모르잖아.”

에드는 지붕 위에 쌓여 있는 눈들을 손으로 쓱쓱 밀어 버린 뒤, 밑에서 가지고 올라온 나무판자를 갈라진 지붕 틈에 올려놨다.

그리고 망치질을 시작했다.

“갑자기 웬 눈이야.”

에드는 이른 겨울이 찾아오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벌어진 틈으로 눈이 들어오지 못하게 나무를 잘 덧대고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엄마보고 와서 사다리 잡으라고 하면 안 돼!”

“눈길에 넘어져서 엄마 다리 삐끗한 거 몰라? 너 정말 못됐다!”

에드가 콧물을 훌쩍이며 동생을 야단쳤다.

“나도 아까 넘어졌는데!”

“아오, 저게 정말. 너 가만히 있어!”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동생의 행동에 화가 폭발한 에드가 서둘러 지붕 수리를 마친 뒤 사다리를 내려왔다.

하지만 토밀은 이미 집 안으로 도망쳤고, 사다리를 잡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도현이었다.

“지붕을 수리한 거냐?”

“네. 긴 겨울을 보내려면 지붕을 손봐야 돼요.”

에드가 소매로 콧물을 닦으며 씨익 웃었다.

“아직 다 안 끝났지?”

“아니에요. 조금 전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눈치 빠른 에드가 도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이상해 보여?”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른 사람이 알아볼 정도로 그의 마음이 표시 나는 건 좋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더 발전하기 위한 당연한 과정일 수도 있는 거야. 태선군도 이런 과정을 거치며 정상에 오른 고수일지도 모르고.’

“어? 다시 얼굴색이 밝아졌네요?”

에드가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 배우고 싶다고 했지?”

“네!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에드의 눈이 반짝였다.

“검 가지고 내 집으로 와.”

“저쪽 집터요?”

“그래.”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땅이 얼고 눈이 발목까지 쌓인 넓은 집터 정중앙에 선 그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단조롭게 보이는 검 동작을 정성스럽게 한 동작 한 동작 이어 갔다. 멈췄던 눈이 다시 내렸고 그의 검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정확히 반으로 자르며 끊임없이 이어졌다.

직선으로 곡선으로 어느 순간에는 원을 그리며 검은 아름답게 눈과 어우러졌고, 도현은 잠시 뒤 조용히 검을 거두고 심호흡을 했다.

‘몬스터를 통한 내공 상승도 중요하지만, 결국 내가 평생 걸어왔고, 아버지도 걸어왔던 그 긴 시간들은 바로 이 검이야. 그걸 잊지 않아야 돼.’

내공에 너무 치우치려 한 자신의 요즘 마음가짐을 되돌아보며 도현은 차분히 가라앉은 시선으로 옆을 바라봤다.

“보니까 어때.”

도현이 검을 멈출 때까지 눈을 맞으며 조용히 기다리던 에드가 딸꾹질을 하며 대답했다.

“머, 멋있어요. 그게 검술인가요?”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