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디 임팩트 5권 2화
조직의 2인자인 콧수염 사내가 혀를 차며 칼라치를 쳐다봤다.
“얼른 손을 보시고, 뒤를 쫓으시죠.”
“잠깐.”
이디언이 한발 나섰다.
“멀리서 보니 그자와 꽤 오래 얘기를 주고받은 것 같던데…… 무슨 얘기였지?”
“흥! 죽이겠다면서? 내가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할 이유가 없지.”
덩치 큰 사내는 머리 위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라치의 방패를 올려다보며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들 이 개자식들아! 도망치는 그자는 내가 죽이려 했는데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킨다고 날 살려 줬다. 그런데 너희들은 같은 편인 나를 화풀이한다고 죽이려고 해? 더러운 새끼들.”
“할 말 다 했나?”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칼라치가 방패로 내려찍으려 했다.
“아직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요.”
이디언이 제지하자 칼라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일은 우리 내부의 일이오. 당신 말대로 하다 이 눈을 잃었어도 당신 탓을 하지 않았지만, 만약에 내 조직 일에 끼어든다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참지 않을 거요.”
칼라치와 잠시 눈싸움을 벌이던 그녀는 한발 물러났다.
“미안해요. 뜻대로 하세요.”
생각해 보니 여기서 칼라치가 물러나면 뒤에서 지켜보는 부하들 앞에 체면이 서질 않을 상황이었다.
‘중요한 얘기는 없었겠지.’
퍼석!
방패 날에 몸이 반쯤 잘린 덩치 큰 사내는 비명도 못 지르고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우리는 끝까지 쫓아서 그놈을 죽인다! 가자!”
“예!”
100여 명이 넘는 사내들이 칼라치의 뒤를 따라 도현이 간 방향으로 뛰어갔다.
몸을 옆으로 비틀며 바싹 마른 사내의 칼을 간발의 차로 피한 도현은 사내의 겨드랑이에 피로 물든 단검을 쑤셔 넣었다.
푸욱.
바싹 마른 사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도현은 이를 악문 채 번개같이 단검을 빼내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사내의 몸을 밀어 버렸다.
몇 개의 화살이 이미 숨을 거둔 사내의 몸 곳곳에 박혔다. 숨 돌릴 여유도 없이 도현은 바닥을 빠르게 굴러 연이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냈다.
푸욱!
활을 버리고 무기를 빼내던 적의 복부에 단검을 꽂은 도현은 적이 미처 뽑지 못했던 검을 대신 뽑아 좌우에 서 있는 활 든 사내들의 목을 재빨리 그어 버렸다.
걸쭉한 핏물이 흰 김을 만들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철썩.
핏물 중 일부를 뒤집어쓴 도현은 전투 중 참았던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사내들이 가로막았던 공간을 쳐다봤다.
그를 괴롭혔던 미로 같은 골목이 드디어 끝이 나고 넓은 길이 보였다.
골목을 빠져나온 도현은 마차 서너 대가 동시에 다닐 만큼 널찍한 길을 빠르게 살폈다.
거리는 텅 비었고, 바람에 섞인 기이한 소리는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겨울의 시작에 놀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는 것은 골목이든 넓은 대로든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낮게 숨을 몰아쉴 때마다 흰 김을 쏟아 내던 도현은 뒤를 힐끔 쳐다봤다.
그가 빠져나온 골목을 따라 칼라치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야.’
피 묻은 검을 손에 으스러져라 움켜쥔 도현은 차가운 시선으로 칼라치와 이디언,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사내들을 노려봤다. 그러곤 이내 낮게 코웃음을 치며 대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 도시가 네 것이 아닌 이상, 칼라치 당신도 날 추격하는 데 한계가 있을 거야. 이디언 당신도.’
칼라치의 부하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거대한 도시를 전부 제 안방처럼 휘젓고 돌아다니지는 못한다.
칼라치 같은 두목들이 수십여 명이었다. 그런 자들이 자리 잡고 있는 도시 구역으로 몸을 피한다면, 감히 칼라치도 지금처럼 날뛰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나 가장 사이가 안 좋은 구역장이 있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도현은 예상했다.
‘리셔웨이라고 했지…….’
그가 있는 구역으로 향하는 게 현재 상황에서 가장 유리한 방법이지만, 폐허가 된 원형 경기장의 위치도 모르고, 어설프게 찾다 그나마 남은 체력을 모두 소진할지도 모른다.
‘일단 부상을 치료하며 잠시라도 숨을 돌릴 장소가 필요해. 내공도 회복하고.’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도현이 집으로 숨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집주인을 부득이하게 위협하며 한숨 돌릴 찰나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녀석들이 집에 불을 지르는 악독함까지 보이는 통에 그 이후로는 함부로 집으로 숨어 들어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칼라치의 구역이 아닌 장소로 숨어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디가 좋을까?’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의식해 좌우로 몸을 바삐 움직이며 대로를 달리던 도현의 눈에 멀리 거대한 성이 들어왔다.
‘다크캐슬.’
달빛 아래 보이는 위풍당당한 장대한 성의 모습에 도현의 눈빛이 강해졌다.
‘경비가 삼엄한 곳이야. 지금 이 상태로는 그 높은 성벽을 은밀히 넘어가는 것도 벅차고.’
수천 명은 거주할 것 같은 넓은 성이었다.
그곳에서 하루 이틀 숨어 지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잘못하면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적당한 지역을 선택해서 진입하자.’
도현은 서서히 무거워지는 두 다리를 느끼며 빠르게 옆으로 몸을 굴렸다.
칼라치가 정신을 집중해 집어 던진 창이 폭풍 같은 기세로 도현이 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나쳤다.
몸을 구르며 벌떡 일어선 도현은 칼라치의 구역을 상당히 벗어났다는 판단이 들자 지체하지 않고 대로 오른편에 밀집된 건물들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마차 한 대가 다닐 만한 길들이 사방으로 뚫린 그곳은 도현의 예상대로 칼라치의 구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현은 얼마 후, 황급히 그 지역을 벗어나야만 했다.
“잡아라!”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 진을 치고 있는 많은 사내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 그를 무차별 공격했기 때문이다.
도현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여기도 칼라치의 입김이 통하는 곳인가?’
칼라치 조직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무리들을 등 뒤에 달고 바람처럼 달리던 도현은 전에 그가 검을 샀던 대장간을 지나쳐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그 지역으로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창검으로 무장한 수십여 명의 사내들이 2열로 길 전체를 막은 채 간간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횃불로 비춰 보다가 쫓기는 도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함성을 지르며 달려온 것이었다.
도현은 점점 악화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마치 도시 전체가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착각이 들 만큼 그를 잡으려는 적들이 늘어만 같다.
“도망가는 꼴을 보니 많이 놀랐나 보군!”
도현과 거리가 많이 가까워진 칼라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 같은 소인배가 이렇게 큰 영향력을 끼칠 것 같지는 않고, 이디언인가?”
“뭐라고!”
분노한 칼라치가 앞서 가는 도현의 등을 노려봤다.
“쉽게 죽이지 않는다! 고통이 뭔지! 눈을 잃은 아픔이 뭔지! 네놈도 알게 해 주겠다!”
“나를 죽이려 한 건 당신이야.”
“곧 내 손에 네놈 목숨이 들어올 것이다. 기대하마. 그때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지.”
잔인한 미소를 짓는 칼라치를 향해 도현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너무 무겁다.’
남다른 의지를 가진 그도 바닥난 체력과 몸에서 빠져나온 많은 피들로 인해 서서히 힘이 부쳤다.
‘결국 게이트를 써야 하나?’
갈수록 적은 늘어나고 휴식을 취할 장소는 없다. 칼라치 편에 서지 않는 구역들을 찾아내기에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계의 첫 겨울은 정말 혹독하군.’
도현은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 밤하늘을 깊은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돌아오면 이 눈에 많은 피들이 쏟아질 거야.’
그가 사는 현실 세계로 가 몸을 추스른 뒤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한 도현은 뒤를 돌아다봤다.
칼라치, 이디언, 그리고 새로 합류한 거물급으로 보이는 몇몇 범상치 않은 사내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사막에서의 일이 여기까지 이어져 그를 난관에 빠트렸지만,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어차피 누구나 입장이라는 게 있다.
‘당신들은 당신들을 위해서, 나는 나를 위해서.’
큰길에서 벗어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 도현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황금색 타투에 손을 댔다.
우우웅.
선명한 붉은 광채에 휩싸인 타원형의 게이트가 구명줄처럼 도현의 전면에 생성됐다.
‘이런 몰골로 돌아가면 다들 놀라겠지?’
용주와 홍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을 하며 도현은 굳은 얼굴로 게이트 안으로 막 뛰어들려 했다.
그 순간, 골목 안쪽에서 번뜩이는 빛이 날아와 도현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앙!
엄청난 압력에 도현은 뒤로 10여 미터 이상을 주르르륵 밀려났다.
‘누가?’
깜짝 놀란 도현은 앞을 급히 살폈다. 키 작은 배불뚝이 사내가 달빛 속에 히죽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아프지? 흐흐흐, 여기로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보 같은 녀석이 제대로 왔어.”
도현은 양손을 앞으로 내민 채 덜떨어진 웃음을 흘리고 있는 비버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그 문제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게이트에 들어가야 해!’
가슴이 부서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참고 몸을 날리려던 도현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런! 늦었어!’
그와 게이트 사이에 연결된 골목길로 칼라치 일행들이 들이 닥쳐서 그들을 넘지 않고는 게이트로 향할 수가 없게 됐다.
‘빌어먹을.’
도현은 물밀듯이 덤벼 오는 칼라치의 부하들을 보며 힘껏 소리쳤다.
“넌 누구냐!”
“난 비버다! 이 망할 놈아!”
설마 대답하리라고는 예상치 않고 분한 마음에 소리쳤던 도현은 바람결에 들려오는 녀석의 대답에 이를 갈았다.
‘큰일이다. 저자 때문에 아껴 놨던 패가 쓸모없어졌어.’
왼쪽 팔뚝에 새겨진 타투가 다시 황금색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게이트를 열 수 없다.
도현은 도망치며 게이트가 생성된 골목 쪽을 힐끔거렸다. 어떻게 이들을 따돌리고 다시 게이트가 생성된 방향으로 갈수 없을지 머리를 굴려 봤지만, 골목길은 외길로 오직 한 방향으로만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다 끝났다.”
도현을 거의 다 따라잡은 칼라치가 방패를 좁은 골목길에서 마구 휘둘렀다.
콰콰쾅! 콰앙!
칼라치가 휘두른 방패에 벽이 박살 났고, 돌 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이제 포기해!”
쾅!
집어 던진 직사각형 거대 방패가 도현의 어깨를 스치며 벽에 박혔다.
살점이 뜯겨 나간 도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게이트는 아쉽지만 단념하자. 이미 늦었어. 지금부터는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는 데에 집중해야 돼!’
마음 한편에 의지하고 있던 게이트가 쓸모없어지자, 그의 긴장감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사태를 바라보는 시점도 더욱 절박해졌다.
‘발만 삐끗해도 광분하는 칼라치의 방패에 몸이 짓이겨질 거야.’
좁은 골목길에서 그를 향해 미친 듯이 휘두르는 방패엔 살기가 가득했다.
“쥐새끼처럼 피하지 말고 아까처럼 덤벼 봐!”
그를 자극하는 말에도 도현은 대꾸하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뛰었다.
말할 힘이라도 아껴서 이 위험한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진땀을 흘리며 좁은 외길 골목을 벗어난 도현은 을씨년스러운 빈 집터들을 지나 계속 달렸다.
‘강?’
위태롭게 도주하던 도현의 앞에 도시 삼면을 해자처럼 휘돌아 흘러가는 강이 보였다.
폭이 30미터도 넘고 수심이 깊은 강이다. 잠시 갈등을 하던 도현은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강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미 달릴 힘도 바닥났고, 그렇다고 돌아서서 수백으로 불어난 적들과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그것은 용기보다는 아둔한 짓이었다.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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