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디 임팩트 5권 4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굵은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지는 고요한 강물 위로 사람 머리가 불쑥 솟구쳤다.
“하아, 하아.”
감각이 사라져 가는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인 도현이 간신히 두 다리가 강바닥에 닿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첨벙첨벙.
서둘러 강에서 몸을 빼낸 도현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언덕 위로 올라가 뒤를 돌아다봤다.
이제 막 반대편 강가에 도착한 칼라치와 수십여 명의 사내들이 환한 달빛 속에 그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올 테면 와 봐.”
낮게 중얼거린 도현은 얼어 가는 몸을 녹이기 위해 힘 하나 없는 몸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움직여 눈밭을 헤치며 전진했다.
“어, 어떻게 할까요?”
사내들이 몸을 덜덜 떨며 칼라치를 쳐다봤다.
“…….”
어깨를 펴고 강 앞에서 고민을 하던 칼라치는 추위에 떠는 수하들 모습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태로 강을 다시 한 번 건너게 된다면 부하들이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도현은 달빛에 반사되는 눈을 헤치며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다.
쫓아도 그를 따라잡기는 틀린 것이다.
“젠장!”
분통을 터트린 그는 시퍼렇게 언 입술로 말했다.
“복장을 갖추고, 도시 북쪽 관문을 통해 녀석을 추적한다!”
숲에서
무릎까지 오는 눈을 헤치며 걷고 또 걷던 도현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나무에 등을 기댔다.
나무를 보자 잘라 내 불을 붙여 그 뜨거운 열기를 온몸으로 느껴 보고 싶었다. 그만큼 추웠다.
불을 붙일 도구도 없는 그였지만, 불을 쬔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는지 손바닥으로 나무를 한동안 어루만지다가 다시 북쪽 내륙으로 이동을 계속했다.
힘이 없다 해서 휴식을 오래 취하면 떨어지는 체온을 막을 수가 없다. 그리고 아직 저들의 추적이 완전히 멈췄다고 예단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칼바람에 살을 에는 강추위가 더욱 심하게 몰아쳐 왔다. 아니, 어쩌면 지친 그의 몸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굴은 파랗게 얼었고, 손의 감각도 무뎌지고, 자꾸 졸음이 밀려왔다.
다크캐슬과 멀어질 만큼 멀어졌다는 생각에 이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자면 죽는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혀를 깨물어 피를 낸 도현은 앞에 보이는 숲으로 향했다.
허리까지 오는 눈밭을 간신히 헤치며 한 발 한 발 걷던 그는 무너지듯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쉴 때마다 극심한 한기가 입을 거쳐 폐로 들어와 몸속을 얼려 버리는 것 같아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숨을 쉬기 싫을 정도로 계속되는 혹한의 고통은 강철 같은 의지를 갖춘 도현도 이겨 내기 버거운 적이었다.
“이렇게 죽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아. 하아, 하아. 일어나. 추위를 피할 곳이 있을 거야.”
비틀거리며 일어선 도현은 허리까지 오는 눈을 양손으로 헤치며 전진하다가 놀란 눈으로 우뚝 멈춰 섰다.
침팬지를 닮은 몬스터 무크람이 2미터가 넘는 몸을 둥글게 말고 눈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여기는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었어.’
추위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크르르르.
잠을 깬 무크람이 붉은 눈동자로 도현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코앞에서 마주친 도현과 무크람은 한동안 탐색전을 벌이듯이 노려만 보다가 어느 순간 동시에 움직였다.
캬아아아!
쇠뭉치 같은 주먹과 나무도 으깨어 버리는 강한 턱, 이빨을 소유한 무크람은 몸을 말고 웅크린 자세에서 용수철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도현의 얼굴이 무크람의 주먹에 박살이 날 순간, 뒤로 한 발 물러난 그가 녀석의 주먹을 그림같이 피하며 허리에서 꺼낸 단검을 위로 찔러 넣었다.
‘옆으로 흘렀어!’
목에 꽂혔어야 할 단검이 무크람의 목을 스쳤다. 마음과 달리 얼어 버린 손발이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은 결과였다.
퍼억!
무크람의 반격에 도현이 실 끊어진 연처럼 눈밭으로 날아갔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옆구리를 잡고 일어난 도현은 맹렬하게 달려오는 무크람을 노려보며 단검을 눈높이로 올렸다.
강을 건너다 허리에 꽂아 둔 적의 칼을 잃어버렸고, 지금 그에게는 단검이 유일한 무기였다.
“후우, 후우.”
짧은 숨을 두어 번 내쉰 도현은 무크람이 온몸을 던져 덮쳐 오는 순간, 옆으로 몸을 피하며 단검을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찔렀다.
쉬쉬쉬식!
바람을 가르며 움직인 단검은 무크람의 왼쪽 무릎에 집중 됐고, 흰 눈밭에 무크람의 피가 뿌려졌다.
쿠웅.
무릎 관절 부분이 기이하게 꺾이며 중심을 잃은 무크람이 주저앉자 도현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이번엔 정확히!’
눈을 빛낸 도현의 단검이 무크람의 목덜미 중앙에 깊숙이 꽂혔다.
크르르르.
붉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무크람이 걸쭉한 침을 흘리다 눈밭에 힘없이 쓰러졌다.
“역시.”
혹시나 기대를 했지만 몬스터의 기운이 타투를 통해 흡수됐다가 잠시 후 바로 다시 배출돼 버렸다.
없는 힘을 짜내 폭발적인 집중력과 스피드를 내며 단검을 휘둘렀던 도현은 피곤한 얼굴로 무크람의 사체 위에 주저앉았다.
“이 녀석 한 마리 잡는 데 남은 힘을 다 소진해 버렸어. 더 이상 앞으로 가는 건 위험해.”
조금 전 몸이 얼어서 순간 위기에 빠졌던 도현은 추위만큼 앞으로 맞닥트릴 몬스터와의 일전도 신경을 써야 했다.
단전의 소모된 내공은 경험상 여러 시간이 지나야 회복이 된다. 저들과 전투를 벌이며 내공을 다 소모한 게 상당한 시간이 됐으니, 조만간 내공이 서서히 회복이 될 것이다.
“내공이 얼마라도 회복될 동안 기다리며 버텨야겠어.”
그는 푸르스름하게 언 손으로 무크람의 목덜미에 꽂혀 있는 단검을 뽑아낸 후, 사체를 옆으로 비스듬히 눕혔다.
덩치가 크고 무거운 녀석이라서 사체를 움직이는 데도 힘이 들었다.
“음…….”
이미 수없이 몬스터를 죽인 도현이지만, 앞으로 벌일 행동만큼은 인간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추위를 이겨 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한 짓이라도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도현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비스듬히 눕힌 무크람의 목부터 하복부까지 길게 배를 갈라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며 역한 냄새와 함께 피와 내장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잠시 그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도현은 천천히 몸을 둥글게 말아 등을 몬스터의 체내로 밀어 넣었다.
‘따뜻하다. 빌어먹을.’
아직 식지 않은 몬스터의 장기들을 통해 약간의 온기를 전달받은 도현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에 말 못 할 비애를 느끼며 두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몬스터의 몸으로부터 더 이상 온기를 느낄 수 없게 된 도현은 얼어서 반 정도 딱딱해져 버린 몬스터의 내장을 손으로 밀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바람만이라도 막아 줄 뭔가가 필요해.”
단검을 손에 쥔 도현은 우스트랄의 등가죽을 벗겨 낸 경험을 바탕으로 무크람의 가죽을 벗겨 냈다.
무크람이 호랑이처럼 따뜻한 털이 있는 몬스터라면 좋았겠지만, 이 녀석은 질긴 가죽 하나만으로도 혹한의 추위를 버틸 수 있는 녀석이었다.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빠르게 상체 가죽을 벗겨 낸 도현은 망토처럼 그 가죽을 걸치고 어깨 위로 나온 양끝을 목 앞에서 매듭을 지었다.
반코트처럼 허벅지 어름까지 내려오는 가죽 망토였지만, 옆과 뒤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 주자 그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바닥났던 내공이 그사이에 아주 작게나마 회복됐다. 도현은 아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단검을 들고 호검술로 몇 차례 반복해서 몸을 푼 다음 적들이 추적해 올 것을 대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흐음.”
가죽이 벗겨져 죽어 있는 무크람의 사체를 발로 뒤적거리던 차가운 인상의 매부리코 노인은 신발 끝에 묻은 이물질을 눈에 닦으며 뒤를 돌아다봤다.
“이 녀석 정말 대단한 놈인걸. 충분히 지쳐 있을 터인데, 무크람을 어렵지 않게 죽인 것 같아. 게다가 생존 능력이 뛰어난 녀석이야.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몬스터의 배를 가르고 체온을 높였어. 가죽을 벗겨서 바람막이로 사용할 줄도 알고.”
윌벤슨의 연락을 받고 칼라치를 돕기 위해 합류한 매부리코 노인은 칼라치도 무시 못 할 강자 중 하나로, 조직의 구역장 중 한 명이었다.
“뭐야, 그럼. 아직도 녀석이 팔팔하다는 건가?”
뚱뚱한 구역장이 인상을 썼다.
“얼어서 죽은 녀석의 시체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건 포기해야겠군.”
턱수염을 짧게 기른 또 다른 구역장이 뚱뚱한 구역장의 말을 받으며 칼라치를 쳐다봤다.
매부리코 노인과 턱수염을 기른 중년인, 그리고 탐욕스러운 눈빛을 항상 흘리는 뚱뚱한 사내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칼라치는 별말 없이 수하들과 함께 도현이 만들어 놓은 눈길을 따라 이동했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도와주는 성의도 본체만체하네.”
뚱뚱한 구역장이 화를 내자 매부리코 노인이 조용히 타일렀다.
“그는 오늘 많은 부하들이 죽었고, 눈까지 잃었어.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잘됐군. 이참에 녀석을 죽이고 그 구역을 내가 차지하면 되겠어. 나와 동참할 사람?”
“가세.”
매부리코 노인의 말에 턱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뚱뚱한 사내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 뒤로 두툼한 겨울옷을 입은 100여 명이 넘는 사내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몬스터를 경계하며 뒤를 따랐다.
“저것들이 정말.”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진 뚱뚱한 구역장은 이대로 다크캐슬로 돌아갈까 했지만 윌벤슨의 얼굴을 생각하면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젠장, 올겨울은 시작부터 더럽게 춥군.”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산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도현은 눈을 한 움큼 집어 입안에 넣어 갈증을 해소했다.
“흔적을 지우지 못하니, 쉽게 쫓아오는군.”
푸르스름하게 밝아 오는 새벽하늘 아래로 횃불을 든 수백여 명이 그가 있는 산 중턱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대규모 인원의 등장에 오히려 몇몇 몬스터가 피하는 모습을 위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만큼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다.
‘좀 더 힘을 내야겠어.’
다시 한 번 눈을 집어 먹은 도현은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산 정상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사실 그의 몸 상태로 눈이 많이 쌓인 높은 산을 밑에서 오르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좌우로 길게 뻗은 높은 산을 넘지 않고는 당장 추적을 피해 내륙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단전호흡법에 이런 효과가 있다니.’
도현은 허리 높이까지 쌓인 엄청난 양의 눈을 손을 이용해 뚫으며 입과 코로는 지리산 도인에게 배운 단전호흡법을 쉴 새 없이 반복했다.
더디게 회복되던 단전의 내공들이 전보다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가 이 현상을 발견한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수백 명의 추적자들을 의식하며 정신없이 산을 타는 와중에 숨이 턱까지 막혔고, 그 순간 근 20여년 가까이 수련해 왔던 단전호흡법을 무의식중에 발휘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신으로 느리지만 맑은 기운들이 스며들며 그의 빈 단전을 채워 간 것이다.
그 상쾌한 기분에 도현은 너무 놀라 뒤로 주르륵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벌떡 일어난 그는 오래된 습관처럼 굳어진 정좌를 한 자세로 단전호흡에 집중했다. 내공이 빠르게 회복될수록, 그가 위기를 극복하고 생존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조금 전 그가 경험했던 놀라운 현상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조금 전처럼 눈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며 단전호흡을 해 봤다.
‘된다! 단전의 기운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
내공심법으로 보기 어려운 단전호흡법이라 치부한 지리산 도인의 호흡법은 놀랍게도 좌공이 아닌 동공이었던 것이다.
몸을 움직이며 들숨과 날숨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20여년 가까이 밥 먹는 것처럼 수련해 온 도현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 눈을 헤치며 경사진 산을 오르면서도 그 호흡법을 놓치지 않고 유지시킬 수 있었다.
그게 얼마 전 일이었고, 평상시보다 단전의 내공이 눈에 띄게 회복되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 상황을 넘기면 차분히 단전호흡법에 대해 숙고해 봐야겠어. 그동안 내가 생각해 왔던 그런 단순한 호흡법이 아닌 게 분명해.’
몸은 여전히 힘들고 체력은 바닥을 기었지만, 아버지가 술을 사 주고 구해 온 지리산 도인의 단전호흡법이 이렇게 빛을 발하자 왠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붉어졌다.
‘아버지.’
“저 녀석 도대체 지칠 줄을 모르는군. 어디까지 도망치는 거야?”
산을 타며 위를 쳐다본 뚱뚱한 구역장이 볼멘소리를 늘어놨다.
정상인인 자신도 혹한의 추위 속에서 눈을 헤치고 산을 올라가는 게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이건 싸움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난, 기본 체력의 문제였고 의지의 문제였다.
그런데 쫓기는 젊은 사내는 수백 명의 칼라치 조직에 맞서 홀로 싸운 데다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의 구역장들이 구축한 포위망을 경험했다.
게다가 강을 두 번이나 건너며 매서운 추위 속에서 얼어 죽을 한계치까지 다다랐을 것이다.
한데도 녀석은 쫓는 자신들을 비웃듯 느린 속도지만 꾸준히 도망치고 있었다. 그것도 험한 눈 덮인 산을.
“괴물 같은 자식.”
아무리 마나를 사용하는 검사라 해도 한정된 마나의 힘만으로는 이렇게까지 버틸 수 없다.
녀석은 움직이면서 체력을 회복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저놈 정체에 대해 아시오?”
말수가 적은 매부리코 노인 보타로에게 뚱뚱한 구역장이 물었다.
“개인적으로 알 리가 있나. 윌벤슨이 칼라치를 도우라고 해서 돕는 거지.”
“저거 정상이 아니야. 다크캐슬에서 그렇게 피를 흘리고 도망친 녀석이라면 동상에라도 걸리고 벌써 비실거렸어야 하는데 말이지.”
“독특한 사내긴 하지. 적이 아니라면 한번 만나서 술을 한잔 해 보고 싶어.”
보타로의 나직한 말에 뚱뚱한 구역장 헬구스가 은밀한 시선을 보냈다.
“아니, 그러니까 이참에 저 칼라치를 싹 정리하자니까 그러네. 우리가 왜 저렇게 범상치 않은 놈하고 칼을 맞대야 하냐고.”
“흠.”
“당신은 영주였고, 나는 왕실에서 쫓겨난 서자요. 저 비천한 출신 놈인 칼라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니는 게 좀 그렇지 않소? 어이쿠!”
말을 하다가 눈밭에 넘어진 뚱뚱한 헬구스가 허우적거리자 보타로가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워 줬다.
“체신 좀 지키게. 부하들이 쳐다보고 있어.”
“걱정 마시오. 녀석들도 다 뚱뚱하니까, 흐흐흐.”
길게 이어진 추적 행렬 중 헬구스의 부하들은 한눈에 들어왔다.
모두 체구가 좌우로 퍼져 있었다. 두툼한 겨울옷 때문에 더욱 뚱뚱하게 보이는 사내들은 움직임이 둔해 보였지만 그러나 죽어서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는 독한 면도 갖춘 자들이었다.
“왜 그렇게 칼라치를 싫어하나?”
“원래 사람은 안 맞는 자들이 있는 거요.”
“그는 윌벤슨과 가장 가까운 자야. 그게 어떤 뜻인지 알고 있겠지?”
“당신은 정말 저기 도망치는 녀석보다 백배는 더 강한 스므차 성주의 성을 우리가 빼앗는 게 가능하다고 보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윌벤슨의 계획은 자살행위야.”
“아예 소리치고 다니지 그러시나? 주변의 부하들이 다 듣게 말이야.”
턱수염을 기른 쿼목이 슬쩍 끼어들며 그들만이 아는 중요한 계획을 함부로 떠들어 대는 헬구스를 비꼬았다.
“험, 작게 말하면 되지. 아무튼 윌벤슨의 계획은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하다는 게 내 생각이야.”
“의심만 하고 방해는 하지 말게. 난 그 탐스러운 성을 짓밟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다른 많은 구역장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고.”
쿼목의 차가운 시선에 헬구스가 장갑 낀 손으로 코를 훑으며 앞을 쳐다봤다.
“누가 뭐라고 그랬나? 얼어 죽지도 않고 용케 도망가는 저 녀석에게 짜증이 좀 난 것뿐이라고.”
산 정상 부근은 나무가 사라진 암석 지대였는데, 그곳을 통과하는 도현이 작은 모습으로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러다 저놈이 완전히 몸을 회복해 우리에게 달려들면 어떡하지? 칼라치 눈까지 멀게 한 강자인데 말이야.”
“이 추위에 과연 얼마나 저자가 효과적으로 싸움을 벌일 수 있을 것 같나? 더구나 그는 눈을 헤치며 도망가느라 체력을 만회할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헬구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늘어진 턱살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아니면 어떤가? 저자가 몸이 정상이라 해도 난 두렵지 않아. 덤벼 오면 검으로 팔다리를 가볍게 잘라 주겠어.”
쿼목의 호언장담에 헬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겠네. 혹시 자네가 잘못되면 자네 구역은 내가 접수하지.”
“이 작자가 정말!”
간밤의 긴 혈투를 따라다니느라 지친 이디언이 산을 타다 휘청거렸다.
“사람을 붙여 줄 테니, 그만 돌아가시는 건 어떻소?”
선두에서 걷던 칼라치가 옆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눈앞에 보이는데 그럴 수는 없어요.”
“가깝게 보여도 그 거리를 좁히는 게 쉽지는 않을 거요.”
산을 넘어가려는 도현의 움직임이 아침 햇살 아래 환하게 보이고 있었다.
“내가 몰고 온 싸움이에요. 끝나기 전에 돌아간다는 건 당신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군요.”
“이 싸움은 이제 내 것이요.”
칼라치의 힘 있는 말에 이디언은 잠시 그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도중에 몇 차례 만난 무크람보다 덩치가 큰 붉은 머리카락의 거한이었다.
교활한 면도 약간은 보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내다움이 넘치는 남자였다.
잠시 말없이 눈길을 걷던 이디언은 결국 체력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느리게 말했다.
“돌아가겠어요.”
“잘 생각했소. 이 싸움은 저놈이 언제 지치느냐에 따라 결정될 거요. 아마도 하루로는 부족하겠지.”
“이곳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몬스터들이 많아진다고 들었어요. 수백 명이라 해도 혹한 속에서 몬스터들을 방비하며 추적을 유지할 수 있겠어요?”
“몬스터 전용 독액도 있고 하니 그건 당신이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요. 돌아가서 편히 쉬시오. 다시 보는 날, 녀석의 목을 가지고 갈 테니.”
이디언은 뒤를 돌아다봤다. 칼라치의 부하들이 있었고, 그 뒤편으로 세 개의 구역장들이 각각의 부하들을 이끌고 따라오고 있었다.
자신이 없더라도 이 정도 무력이면 도현이 정상의 몸이라 해도 감히 감당할 수준은 못 되어 보였다.
“날 돕다가 잃은 그 한쪽 눈, 나중에 보답을 하겠어요. 그럼.”
그녀가 아래로 향하자 칼라치는 20여 명의 수하들을 딸려 보낸 후, 힘차게 외쳤다.
“더 빨리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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