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105화 (105/575)

[105] 디 임팩트 5권 5화

“여우 털이 이렇게 따뜻할 줄이야.”

도현은 산 정상 부근에서 눈 속에 갇힌 여우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바로 녀석을 잡아 털을 벗긴 다음 목도리처럼 둘렀는데, 무척 따뜻했다.

그렇다고 혹한의 추위를 완전히 이겨 낼 수준은 아니었지만, 없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나씩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군.”

무크람의 가죽 망토에 여우 목도리를 한 도현은 얼마 뒤 산 정상에 도달했다.

산등성이를 타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도 될 상황이었지만, 그는 힘이 들더라도 산 정상에 올랐다.

지형을 살피지 않고는 추후 저들의 추적을 어떤 식으로 따돌려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수백 미터 높이의 산 정상에 오른 도현은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은 칼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주변을 빙 둘러봤다.

전날 내린 눈을 모두 녹여 버릴 듯이 환하게 뜬 아침 해가 세상천지를 밝히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멀리 다크캐슬이 보였고, 동쪽으로는 루드와 가 봤던 우스트랄 숲이 낮은 산 뒤편으로 길게 이어진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여기서 그곳까지 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먼 거리였다.

서쪽으로는 다크캐슬을 휘돌아 북쪽으로 흐르던 강이 여러 지류를 퍼트리며 그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도현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향할 내륙 북쪽을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야가 도달하는 먼 곳까지 세세하게 살폈다.

그래 봐야 눈 덮인 땅들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숲과 낮은 구릉지, 그리고 지금 서 있는 산들과 비슷한 수준의 많은 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 건 확인할 수가 있었다.

“루드가 준 몬스터 지도를 갖고 있었어야 했어.”

가죽 가방 안에 넣어 둔 게 뒤늦게 후회됐다. 가방은 에드의 집에 있었다.

“그게 있었다면 대충 저 앞쪽의 몬스터들의 분포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뒤를 따라오는 추적자들에게 몬스터라는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내륙 깊은 곳으로 갈수록 몬스터의 수가 급증한다고 들었다.

수백 명의 대규모 인원들이 움직이는 이상, 몬스터들의 관심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할 수 없지. 계속 깊은 곳으로 가 보는 수밖에.”

단순히 칼라치, 이디언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산 정상 근처까지 다다른 저들의 면면을 둘러보면 상당한 세력이 결속되어 움직이는 느낌이 강했다.

다크캐슬에서 추적을 받을 때부터 그랬다.

‘싸워야 한다면, 끝까지 받아 주겠어.’

냉정한 눈빛으로 불과 수십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경사진 산 정상 부근까지 쫓아온 저들을 노려보던 도현은 천천히 몸을 돌려 산 반대편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갈 때도 그는 지리산 도인이 아버지에게 전수해 준 단전호흡법을 계속 유지했다.

산을 넘어 들판에 펼쳐진 눈길을 걷던 도현은 동공의 놀라운 효능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터트렸다.

내공 회복이야 빠르게 된다손 치더라도 몸은 쌓인 피로와 부상으로 인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몇 시간째 동공을 멈추지 않고 유지하자 어느 순간부터 내공 회복이 빨라지는 것과는 별개로 눈이 밝아지고 팔다리에 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어.’

시간이 더 지나자 화살에 스치며 입었던 여러 부상과 자상들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며 흰 눈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러더니 추위와 함께 그를 괴롭혔던 부상의 통증들이 씻은 듯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상처가 나은 건 아니었지만, 당장의 고통이 없고 움직임에 거치적거리지만 않아도 그의 전투력은 크게 오르는 것이다.

눈에 정광이 어린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으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봤다.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처럼 그를 추적하는 저들에게 이제 누가 사냥감인지 제대로 알려 줄 때가 온 것 같았다.

도현은 들판이 끝나고 산 정상에서 본 거대한 숲이 나오자 묵묵히 그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도현이 들어간 거대한 숲을 앞에 두고 칼라치를 포함한 네 명의 구역장들이 한데 모였다.

이 거대한 숲은 팔이 네 개 달린 파쵸마가 출몰하는 곳으로, 몬스터 사냥꾼들은 얼씬도 안 하는 위험 지대였다.

물론, 돈이 되는 몬스터가 아닌 이유도 있었지만, 집단으로 움직이는 몇 안 되는 몬스터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한 마리씩 독화살로 몬스터의 힘을 빼놓고 잡는 몬스터 사냥꾼들에게 집단으로 움직이는 녀석들은 지옥의 사자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그들이 출몰하는 숲이나 산은 자연스레 몬스터 사냥꾼들이 기피하는 장소가 됐다.

“내 부하들 중에 몬스터 사냥을 하다가 들어온 녀석이 있는데, 이곳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져 왔다는군.”

헬구스가 술을 한 모금하며 넌지시 말했다.

“위험한 숲이긴 하지.”

매부리코의 노인 보타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의 숲을 좌우로 길게 둘러봤다.

그는 도현이 이 숲을 우회해 저 멀리 보이는 구릉지 너머 산속으로 피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대로 파쵸마의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혹시 일부러 우리들을 이쪽으로 유인한 게 아닐까? 몬스터에게 피해를 입으라고?”

턱수염을 기른 쿼목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현이 지나간 눈길을 보았다.

“그럴 리 없소.”

안대를 한 칼라치가 손을 저었다.

“그는 다크캐슬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되는 녀석이오. 따라서 이곳 지리도 잘 모를 수밖에.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이 숲에 들어간 것에 불과하오.”

“아니라면?”

헬구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우리가 위험할 정도면 몸이 정상이 아닐 그 녀석은 어떻게 되겠소? 그 자신이 위험한데,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 그런 무리수를 두겠소?”

쿼목과 보타로가 칼라치의 말에 공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싸움에 능통한 자들만 모인 추적대다. 간밤의 긴 추적과 추위에 시달리며 쉬지 않고 온 피로도가 적지 않게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인원이면 파쵸마가 떼거리로 덤벼들어도 충분히 헤치고 나갈 수 있다.

몬스터 사냥용 단궁을 소지한 인원만 해도 100여 명이 넘었으니, 어떻게 보면 괜한 걱정일 수도 있다.

그때 헬구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찌 됐든, 파쵸마 숲에 들어가서 녀석을 쫓다 보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우리 애들도 몬스터에게 적지 않게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그건 맞잖아.”

“어느 정도 희생은 각오하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요?”

칼라치의 하나밖에 없는 눈이 번뜩였다.

“뭐야 지금. 당신 조직이 숲으로 도망친 놈에게 박살 났다고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건가? 내 부하들을 살찌우기 위해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헬구스의 손이 허리로 갔다.

“여차하면 윌벤슨이고 뭐고 확 다 엎어 버리는 수가 있어.”

“어허, 헬구스, 말이 너무 지나쳐.”

이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보타로가 나섰다.

“칼라치, 당신도 너무 감정에 치우치는 것 같소. 간밤에 한 우리의 수고를 잊지 마시오.”

칼라치는 잠시 말없이 세 명의 구역장을 쳐다보다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실례했소. 어젯밤에 당한 일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냉정을 잃은 것 같소. 사과를 받아 주시오.”

“흥!”

반쯤 뽑았던 검을 칼집에 다시 넣은 헬구스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전날 내린 폭설을 용케 버티고 있던 나뭇가지들이 세찬 바람이 불자 가지 위에 쌓인 눈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부러지고 말았다.

우드드둑 쩌어억.

도현은 고막을 자극하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에 위를 힐끔 올려다봤다.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들이라 그런지 몸에 달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하나같이 작은 나무만 했고, 그것들이 부러져 눈과 함께 떨어지는 모양새가 마치 폭탄이 떨어지는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후드드드드. 쿠웅.

밑에 있다 제대로 맞았다면 큰 부상을 입을 수준이었다.

부러진 나뭇가지와 위에서 쏟아진 눈을 빙 돌아가던 도현은 전면에 뭔가가 어른거리자 눈 속에 몸을 파묻고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도마뱀과 닮은 얼굴을 한 녀석들이 직립보행을 하며 그가 있는 방향으로 일곱 마리나 떼 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신장은 무크람보다 약간 작았지만, 팔이 네 개나 달린 녀석들이었다.

앞에 팔은 약간 짧았고 날개처럼 등 뒤에 매달린 두 개의 팔은 인간의 팔보다 두 배 정도는 길쭉해서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등에 달린 긴 팔 끝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들이 마치 가위질을 하듯 쉴 새 없이 소리 나게 부딪치고 있었다.

‘저 모습, 루드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그래, 파쵸마였어!’

몬스터 지도를 그려 준 루드가 다크캐슬 주변에 출몰하는 몬스터에 대해 설명해 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파쵸마에 대해 언급을 했었다.

-날렵하고 항상 무리 지어서 움직이는 녀석들이오. 녀석들의 등에 달린 긴 팔은 팔이 아니라 흉기요. 그냥 창처럼 위에서 마구 쑤시지. 혼자 떨어져 있어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인데, 여러 마리씩 붙어 다녀서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녀석들이라오. 뭐, 만날 일을 없을 거요. 저기 북쪽 깊은 곳으로만 가지 않으면 말이오.

‘이 숲이 파쵸마가 출몰하는 숲이었나 보군.’

도현은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인 단검을 소리 없이 꺼내 들고 점점 그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파쵸마를 조용히 노려봤다.

‘다른 곳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몸에 활력이 넘쳤고, 내공도 많이 회복된 상태라 저들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들과 싸울 형편이 못 됐다. 뒤를 따라오는 자들과의 싸움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파쵸마들은 창처럼 사용하는 등의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더 가까이 접근해 왔다.

‘할 수 없지.’

도현이 먼저 박차고 기습을 가하려던 순간, 파쵸마 머리 위에서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연거푸 부러지며 밑으로 뚝 떨어졌다.

나뭇가지와 떨어지는 눈덩이들을 슬쩍 피한 파쵸마들은 그 영향인지 몰라도 도현의 코앞에서 극적으로 방향을 바꿔 서쪽 숲으로 천천히 이동을 했다.

그들이 멀리 가자 도현이 눈 속에서 조용히 몸을 세웠다.

파쵸마의 공격에 대비하며 숲에 들어간 칼라치와 세 구역장들은 어느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도현의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음.”

칼라치가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숲 입구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눈길은 분명 도현이 만든 작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길이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헬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숲 속은 사방이 허리 높이로 쌓인 흰 눈밭이었다. 사람이 지나가면 흔적이 안 남을 수가 없는 상황인데, 놀랍게도 그들의 앞에서 끝났다.

“날개라도 달렸나?”

근처는 깨끗했다. 누군가 지나쳐 간 흔적이 전혀 없었다. 흔적은 바로 그들의 눈앞에서 정확히 끝난 것이다.

찬 바람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그들은 한동안 깊은 침묵 속에 빠졌다.

“이 일대를 수색해 봐야겠소.”

혹시나 해서 나무 위를 둘러보던 칼라치의 말에 세 명의 구역장들이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몰려 있는 부하들에게 막 지시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수백 명이나 되다 보니 어느 정도 길게 대열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 중간쯤에 해당하는 눈밭에서 불쑥 도현이 튀어나왔다.

‘치고 빠진다.’

몸을 낮추고 눈밭을 빠르게 서너 바퀴 구른 도현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벼를 베듯 저들의 다리를 향해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창졸간에 벌어진 기습에 서너 명의 사내들이 주저앉았고, 도현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주저앉은 한 사내의 손에서 장검을 빼앗았다.

단검이 아닌 장검을 손에 들자 도현의 눈빛이 한층 강해졌다.

휘리릭.

그의 손안의 장검이 시원하게 검광을 발산하자, 달려드는 사내들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애써서 힘을 쓰며 죽일 이유가 없지. 추위와 부상이 다크캐슬로 돌아가고 싶게 만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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