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디 임팩트 5권 6화
도시에서는 치명적인 살수를 발휘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적절한 부상만 입혀도 혹한 속에서 그들이 선택할 답안지는 한정되어 있었다.
팔다리에 부상을 입히는 전략은 그의 힘을 아낄뿐더러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동료들을 책임져야 할 부담까지 심어 준다.
“으아악!”
종아리에 긴 자상을 입은 사내의 손목을 발등으로 걷어차 검 한 자루를 더 얻은 도현은 보지도 않고 뒤에서 철퇴를 휘두르는 사내의 옆구리에 검을 쑤셔 넣었다.
“커헉!”
“너희들이 살길은 돌아가는 것뿐이다!”
기백에 찬 도현의 포효가 숲 속을 가득 메웠다. 도저히 힘이 다한 도망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현란한 검술과 빠른 몸놀림으로 서너 명을 더 쓰러트린 도현은 적들이 정신을 차리며 조직적으로 대응하려 할 때, 발끝에 내공을 모아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퍼억.
털모자를 쓴 사내의 머리를 디딤돌 삼아 도현은 허공을 붕붕 날아 포위망을 뚫었다. 그러곤 그가 은신해 있다 나온 눈밭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칼라치가 방패로 그의 몸을 후려쳤다.
터엉!
“또 봅시다, 칼라치.”
물구나무서기 자세로 칼라치의 방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내려친 도현이 반동을 이용해 허공으로 더욱 높게 떠올랐다.
칼라치는 자신의 머리 위를 넘어가는 도현의 차가운 눈빛에 흠칫했다.
죽어 가던 자가 다시 새 생명을 얻은 듯 눈빛에 힘이 가득했던 것이다.
“이놈!”
턱수염을 기른 쿼목이 도현이 착지하려는 곳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가더니 한순간에 서너 번의 칼질을 했다.
마나가 실린 검은 공기를 울리며 도현의 얼굴 피부를 따갑게 했다.
범상치 않은 검술 솜씨에 도현은 살짝 놀라며 검에 내공을 실어 섬전과 같은 빠르기로 강하게 휘둘렀다.
차아앙!
고막을 괴롭히는 강렬한 충돌음과 함께 바닥의 눈들이 회오리치며 둘 사이를 뒤덮었다.
‘케일 경 못지않은 힘이 검에 실려 있어.’
도현은 우웅거리는 검을 진정시키며 빠르게 뒤로 몸을 빼다가 이번에는 매부리코의 노인 보타로가 창을 겨누며 달려오자 호탕하게 외쳤다.
“언제 날을 잡으면 한 명씩 상대해 주겠다!”
“거기 서!”
도현과 제일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헬구스가 뒤늦게 체면치레라도 하려는 듯이 검을 들고 도현에게 몸을 날렸다.
‘가만히 있으면 욕을 먹겠지?’
뚱뚱한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쾌속한 몸놀림에 이어 벼락 같은 일 검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그었다.
그의 검은 주방에서 사용하는 식칼처럼 날이 널찍해서 우습게 보였지만, 마나가 실려 있어서 방패도 가볍게 쪼개 버리는 힘이 담겨 있었다.
내심 도현이 그냥 가 주기를 바라고 덤벼든 것인데, 도현이 뜻밖에도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밑에서 위로 부드럽게 검을 올려 쳤다.
천둥 치는 소리가 나며 위에서 검을 내려치던 헬구스의 몸이 위로 튕겨져 올랐다.
‘아, 시발.’
쩌어엉!
팔뚝을 타고 전해져 오는 묵직한 통증에 표정이 굳어진 헬구스가 허공에서 몸을 몇 번 비틀며 눈밭에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착지를 했다.
그사이 도현은 나무들이 무성한 숲으로 놀랍도록 빠른 몸놀림으로 뛰어들었고, 그 뒤를 수십여 발의 화살들이 빗발치듯 날아갔다.
피피피핑!
수많은 화살들이 도현을 맞히기 위해 날아갔지만, 숲의 나무들로 인해 한 발도 명중시킬 수가 없었다.
“쫓아라!”
수백여 명이 눈밭을 헤치며 도현 한 명을 잡기 위해 파도처럼 밀려들어 갔다.
쫓고 쫓기는 숲 속의 추적이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또다시 도현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어디로 사라졌지?”
당혹스러워하는 그들 머리 위로 도현이 뚝 떨어져 내렸다. 신법을 발휘해 높은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있던 그가 기습을 가한 것이다.
“크아악!”
후미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리자 선두에서 추적을 지휘하던 구역장들의 표정이 다급하게 바뀌었다.
그들이 후미에 도착하자 도현이 씨익 웃어 보이며 다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화살을 쏴도 교묘히 나무를 이용한 도현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이거 녀석의 수법에 말려드는 것 같지 않소?”
보타로가 도현을 쫓으며 옆에서 달리는 칼라치에게 말했다.
“압니다. 하지만 지금 잡지 않으면 이 숲에서 영영 그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안대를 한 칼라치가 스산한 목소리로 대꾸를 했다. 부하들 목숨을 어느 정도 잃어도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저게 어디 봐서 지치고 부상당한 몸이야! 우리보다 더 쌩쌩하잖아! 빌어먹을!”
뚱뚱한 몸으로 힘들게 뛰는 헬구스가 불안한 눈빛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후미에서 기습을 받은 사람들의 태반이 그의 부하였다. 뚱뚱한 녀석들이라 자연히 뒤로 처졌는데, 하필 그 이유로 도현의 기습의 제물이 돼 버린 것이다.
언뜻 보니 죽은 자는 몇 안 되고, 대부분 팔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정도에 불과했지만, 구역을 지키며 힘을 발휘하려면 그런 부상도 아까운 부하들이었다.
‘하아, 하아. 개자식. 왜 하필 내 부하야! 다른 놈들도 많은데.’
그가 속으로 도현을 욕할 때 돌연 앞서 도망치던 도현이 싹 사라졌다.
“모두 기습에 대비하라!”
구역장들의 외침에 넓게 퍼져 있던 수백여 명의 부하들이 조금씩 밀집하며 긴장된 얼굴로 사방을 주시했다.
이미 두 차례 기습으로 그들의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선 상태였다.
“이번엔 진짜 도망간 것 같은데?”
시간이 제법 흘러도 조용하자 헬구스가 참았던 오줌을 누기 위해 사람들과 약간 떨어진 나무 뒤로 돌아갔다.
칼라치와 다른 구역장들은 도현의 흔적이 끊긴 곳을 중심으로 주변 나무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동작으로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녀석이었으니, 놀라운 도약 능력으로 충분히 먼 거리의 나무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돌아가면 윌벤슨에게 단단히 보상을 받아야겠어. 제기랄, 이게 무슨 고생이야. 내 일도 아닌데.”
장갑을 착용한 손으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던 그의 목에 칼날이 스윽 다가와 붙었다.
“……뭐, 뭐냐?”
“물건 넣고 바지 올려.”
“아, 아직 다 안 눴어.”
도현은 헬구스의 하체를 내려다봤다.
“서둘러. 사람들이 오면 널 죽이고 간다.”
오줌을 얼른 마무리한 헬구스는 바지를 올리며 눈알을 옆으로 굴렸다.
“왜 이러는 거야?”
“쉿! 조용히 하고 앞으로 가.”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나? 난 왕의 피를 이은…….”
“네가 왕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죽고 싶지 않다면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그 손가락은 얌전히 원위치 시키고.”
도현의 칼날이 목에 상처를 내자 헬구스는 허리에 가져다 대던 손가락을 슬며시 밑으로 내렸다.
“알았으니까, 진정하라고 친구.”
“뒤의 사람들이 우리가 움직이는 걸 눈치채면 난 너를 죽이고 갈 거야.”
얼음처럼 차가운 도현의 눈빛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한다면 진짜 그렇게 할 사내로 보였다.
별수 없이 헬구스는 도현과 함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숲 안쪽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도현은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우두머리급인 이 뚱뚱한 중년인이 사라졌다는 걸 곧 저들이 알아챌 테고, 그들이 지나쳐 온 흔적도 금방 발견할 것이다.
“멈춰.”
헬구스의 검을 빼서 눈 속에 집어 던진 도현은 그를 눈 속에 앉히고 위에서 내려다봤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늠름한 사내군. 어때 내 밑에 들어오면, 어이쿠!”
도현의 발에 걷어차인 헬구스가 눈 속을 뒹굴었다.
“헛소리하면서 시간을 끌면 두 다리만 잘라 주겠어.”
도현의 서늘한 경고에 헬구스가 웃음기를 거두며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냐?”
“당신, 구역장인가?”
“그래.”
“이름은?”
“……헬구스.”
“다른 구역장들은?”
“턱수염난 인간이 쿼목이라는 녀석이고, 매부리코 노인이 보타로다. 그리고 칼라치가 있지.”
헬구스는 순순히 대답을 했다. 그 정도 대답을 안 해서 자신이 피해를 당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잠시 헬구스를 내려다보다가 검을 바닥에 꽂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왜 이렇게 죽자 살자 날 쫓아오는 건지 그 이유를 대 봐.”
“…….”
“다시 한 번 묻는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나를 왜 위험을 무릅쓰고 쫓는 거지?”
한동안 침묵하던 헬구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말을 해 주면 날 살려 주겠나?”
“약속한다.”
도현의 묵직한 대답에 헬구스는 잠시 고민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말해 주지. 어차피 다크캐슬까지 흘러 들어와서 의리를 따지는 것도 우습지.”
아예 편안하게 눈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도현을 응시했다.
“간단해. 윌벤슨이 칼라치를 도와서 널 처치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야. 나중에 보상을 해 준다고 하더군.”
“윌벤슨이 누구지?”
“다크캐슬에서 영향력이 큰 늙은 마법사. 무시하기가 곤란했어.”
‘마법사라…….’
도현은 이디언을 생각하며 물었다.
“이디언이라고 아나?”
“오, 육감적인 그 여마법사 말이군. 알다마다. 칼라치와 붙어 다니다가 중간에 돌아갔지.”
“아니, 그녀가 누군지 아냐고 물었어.”
“이번에 처음 보는 여자야. 하지만 네게 아주 원한이 커 보였어.”
도현은 헬구스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디언이 윌벤슨이라는 자를 통해 내 소재를 파악한 거군. 칼라치는 윌벤슨이 보낸 것이고.’
다크캐슬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는 마법사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더불어 여러 구역장들이 그를 추적한 것도.
“다크캐슬에 모든 구역장들은 윌벤슨의 영향력 아래 있나?”
“내가 아는 건 한 열 명 정도 되는데, 나머지는 모르겠어. 워낙 음흉한 구석이 있는 노인네라서 말이야.”
“윌벤슨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되지?”
“호오, 그를 죽이려고? 잘 생각했네. 가서 목을 잘라 버려. 하지만 그리 쉽지 않을걸. 무서운 마법사거든.”
“날 걱정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하긴 내가 누굴 걱정하겠어. 윌벤슨은 도시 동북쪽 깨끗한 집들이 몰려 있는 곳에 거처가 있지. 노스리어와 멀지 않은 2층 집인데, 정원이 있고 담이 높지. 새들도 자주 왔다 갔다 하는 집이니까 둘러보다 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거야. 자, 이제 나는 그만 가도 되겠나?”
스윽.
도현이 대답 대신 바닥에 꽂아 둔 검을 뽑아 들었다.
“약속을…… 어기려고?”
헬구스가 도현의 두 눈을 노려봤다.
“살려 준다고 했지 멀쩡히 보낸다고는 하지 않았어.”
“이런 더러운 자식. 뛰어난 검술과 마나를 다루는 능력을 보면 어디서 제대로 교육받고 자란 놈 같은데, 그렇게 말장난으로 날 농락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이쪽에 흔적이 있다!”
시끄러운 소리에 도현이 힐끔 뒤를 돌아다봤다. 헬구스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수색을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 보내면 사람들이 당신을 의심하지 않을까?”
“뭐라고?”
헬구스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판단은 당신이 해. 난 이대로 그냥 사라져 줄 수도 있어. 아니면 가볍게 당신 몸에 상처를 하나쯤 남겨 줄 수도 있고.”
“음…….”
헬구스는 도현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했다. 동료 구역장들이 오면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귀찮은 일은 피하는 게 좋다. 그의 자존심도 있고.
“아프지 않게 베라.”
“바라는 게 많군.”
헬구스의 얼굴을 주먹으로 몇 번 후려친 도현은 뒤로 휘청거리는 그의 팔을 빠르게 베어 버렸다.
뼈 위를 지나가는 금속의 섬뜩한 느낌과 그 뒤에 이어지는 화끈한 고통에 헬구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도현이 사라진 직후 칼라치를 위시한 쿼목과 보타로가 앞장서서 부하들을 대동하고 달려왔다.
“저, 저기로 빨리 가 보시오. 녀석이 저기로 도망갔어.”
헬구스가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팔을 감싸며 도현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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