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디 임팩트 5권 7화
“이 자식!”
칼라치가 주먹으로 나무를 후려쳤다.
수백 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숨바꼭질을 하는 도현을 잡으려다가 벌써 다섯 번이나 기습을 받았다.
일단 눈앞에서 사라지면 그 이후로는 기습이 따랐고, 그러다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 그들을 힘 빠지도록 유인하다가 다시 또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녀석의 함정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 없는 현실이 화가 났다.
“죽여 버리겠다!”
쿠웅!
방패로 애꿎은 나무 하나를 박살 내는 그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헬구스가 냉소를 흘렸다.
“아직도 그 녀석을 쫓을 거요? 보라고, 벌써 몇 명이 당했는지.”
쿼목과 보타로가 심각한 얼굴로 뒤를 돌아다봤다.
피해가 쌓이니 눈덩이처럼 커졌다. 죽은 사람은 몇 없었지만, 100여 명 가까운 인원이 중상을 입고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치료를 위해서는 빨리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아니면 모두 죽고 말 것이다.
“정말 대단한 체력을 가진 자야. 밤새워 쫓기고 어떻게 그렇게 힘이 넘칠 수가 있는 거지?”
보타로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체력뿐만 아니라 검술 솜씨도 놀라울 정도였소.”
검술 솜씨 하나만큼은 뛰어나다 자평하던 콧대 높은 쿼목도 도현이 기습을 하며 펼친 검술을 목격한 후 많이 놀란 상태였다.
“칼라치의 눈이 저리 될 정도면 진작 알아봤어야지. 제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머리가 어지럽군.”
부상을 입은 팔을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내던 헬구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무튼 빨리 결정을 내립시다. 이렇게 그 녀석 칭찬을 하며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오. 중상을 입은 사람도 많고, 남은 인원도 지쳐서 전투 의지가 바닥이오.”
“음, 이 정도 상황이면 윌벤슨도 이해해 주겠지?”
보타로의 말에 쿼목이 동조를 했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 결정난 거요!”
헬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봐, 칼라치!”
한바탕 나무에 분풀이를 한 적발 거한 칼라치가 방패를 들고 걸어왔다.
“자네도 상황을 봐서 알겠지만 숲에서는 녀석을 잡을 수가 없어. 돌아가지.”
“이대로 포기하면 녀석은 분명히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거요. 그때 홀로 저 녀석을 감당할 수 있겠소?”
“우리는 그와 아무런 은원이 없지. 안 그런가?”
뚱뚱한 헬구스가 헛기침을 하며 보타로와 쿼목을 둘러봤다.
“흠.”
두 구역장이 헬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칼라치가 방패를 얼어 버린 땅에 박아 넣으며 소리쳤다.
“그놈이 그런 사정을 봐줄 것 같소! 내 부하들이 얼마나 많이 그놈에게 죽었는지 아시오! 그놈은 차갑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고, 피를 보는 데 주저하지 않소. 그런 놈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합류했던 당신들을 모른 척할 것 같소? 반드시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 복수의 칼을 들이댈 거요.”
“그땐 윌벤슨이 나서야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헬구스의 지적에 칼라치의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를 갈등 속에 몰아넣으려 저렇게 부하들을 죽이지 않고 일부러 부상만 입힌 거요! 우리들이 뭉치면 그자는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으니까!”
“돌아가지.”
말없이 듣고만 있던 보타로가 말했다.
“보타로, 정말 이러실 겁니까? 당신만은 날…….”
“그만하게.”
보타로가 냉정한 시선으로 칼라치를 쳐다봤다.
“안타깝지만 너무 상황이 안 좋아. 이대로 가다간 우리 넷만 빼놓고 저 많은 부하들을 다 죽일 수도 있겠어. 애초에 난 힘 빠진 사자를 잡기 위해 온 것이지, 저렇게 날개 달린 사자를 잡기 위해 온 것이 아니야. 난 내 부하들을 살려야겠어. 이해해 주게.”
“눈을 잃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자네도 자네 부하들 걱정을 좀 해야 하지 않겠나?”
쿼목까지 이리 말하자 칼라치는 더는 말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땅에 박힌 방패를 손으로 내리누르며 화를 억누르던 칼라치의 귀로 부하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놈이 나타났다!”
모두의 시선이 숲 안쪽으로 쏠렸다.
도현이 눈을 헤치며 빠르게 그들의 정면으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팔이 네 개 달린 파쵸마 수십여 마리를 끌고 오는 중이었다.
부상자 100여 명을 보호하며 싸워야 할 형편에 네 구역장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저런 놈을 상대하자고?”
헬구스가 칼라치를 힐난하며 뒤를 보고 소리쳤다.
“다크캐슬로 돌아간다! 부상자들을 빨리빨리 부축해!”
뚱뚱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서둘러 고함을 친 헬구스는 달려오는 도현을 보며 기가 막혔다. 설마 몬스터들을 이용할 줄이야.
‘적으로 두면 큰일 날 놈이군.’
세 구역장들이 각자 부하들을 이끌고 빠르게 후퇴를 했지만, 칼라치만은 마지막까지 도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칼라치 님, 오늘만 날은 아닙니다.”
콧수염 사내가 오랜만에 말을 했다. 그는 분노한 칼라치의 심정을 알기에 그동안 말을 아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기엔 너무도 상황이 위급했다.
아군이 다 빠지고 있는데 남은 인원으로 생기를 되찾은 도현과 몰려오는 파쵸마 떼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칼라치 님!”
우드득.
이를 간 칼라치가 안대에 손을 한 번 올린 뒤 차갑게 외쳤다.
“활을 쏘며 후퇴한다!”
도현은 끝까지 남아 있다 부하들과 함께 일정한 대형을 유지하며 뒤로 물러나는 칼라치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이렇게 쉽게 보내 주면 날 우습게 보고 또 기회를 보려고 하겠지?’
차가운 눈으로 검을 쥔 도현은 칼라치의 부하들이 쏜 화살을 이리저리 피하며 조금씩 적들에게 가까워졌고, 어느 순간 사색이 된 적들의 바로 앞에서 부드럽게 방향을 바꿔 옆으로 몸을 빼 버렸다.
무서운 실력자인 도현이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그들의 앞에서 멀어지자 안도하는 그때, 도현에게 잔뜩 자극을 받은 수십여 마리의 파쵸마들이 활을 쏘며 후퇴하던 칼라치의 부하들을 성난 해일처럼 그대로 쓸어버렸다.
캬아아아! 크캬캬캬!
“크아악!”
“살려 줘! 으아아악!”
무크람보다 전투력이 월등한 파쵸마들은 등 뒤의 긴 팔에 달린 창날 같은 손톱을 이용해 대항하는 칼라치 부하들의 온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보여 줬다.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몇몇은 몬스터 독화살에 맞아 힘이 약해진 파쵸마들과 달라붙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지만, 워낙 몬스터의 숫자가 많아 차례차례 몬스터의 긴 팔에 몸이 잘리고 분해돼 버렸다.
허공에 치솟는 부하들의 붉은 피와 내장들을 보며 칼라치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긴 팔을 내뻗는 파쵸마를 발견하고는 왼쪽 방패로 재빨리 막고, 오른쪽 방패로 녀석의 팔을 잘라 버렸다.
“죽어라, 이 괴물!”
파쵸마 몸을 가운데 두고 엄청난 힘이 실린 두 개의 방패가 하나로 합쳐졌다.
파지직!
파쵸마의 살덩어리와 핏물이 질퍽하게 주위로 퍼졌다.
“칼라치!”
귀에 익숙한 목소리에 칼라치가 위를 올려다봤다.
도현이 검을 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있었다.
칼라치는 방패로 머리를 보호했다.
콰아앙!
도현의 검에 실린 힘을 감당하지 못한 칼라치가 방패를 든 채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내가 경고했을 텐데, 나를 다시 쫓아오면 죽여 버리겠다고.”
이글거리는 도현의 눈빛을 노려보던 칼라치가 쿨럭거리며 주위를 쓸어봤다. 그 많던 부하들 상당수가 파쵸마에게 당해 처참하게 죽어 가고 있었고, 남은 자들도 얼마 못 갈 것 같았다.
눈이 없는 평지였다면 그나마 부하들이 제 기량을 발휘했을 테지만, 추위와 많은 눈, 그리고 추적을 위해 체력을 혹사시킨 것이 지금의 암담한 상황까지 이르게 했다.
“내가 힘들게 이룩한 조직이 무너지고 있군. 내 구역이 사라져 가고 있어.”
“나 때문이라는 건가?”
“그럼 누구 때문이겠나? 내가 힘들게 이룩한 모든 것들이 너로 인해 무너지고 있어! 내 조직이 무너지고 있다고!”
칼라치는 투지를 불사르며 두 개의 방패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래, 맞아. 그럴 수 있겠지.”
도현이 검을 늘어트린 채 칼라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날 죽이려고 날뛰는 자들까지 내가 그 사정을 일일이 들어줄 형편은 아니야. 나도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내가 말했지? 살기 위해 싸울 것이고, 살기 위해! 죽일 수도 있다고!”
도현의 검이 빛살처럼 늘어나며 방패 밖으로 드러난 칼라치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갔다.
대비를 하고 있다고 해도 막거나 피하기 어려울 정도의 쾌검이었지만, 칼라치는 가까스로 강철 방패로 도현의 검을 튕겨 내며 반격까지 시도했다.
후우웅! 후우우웅!
‘힘이 굉장한 자야.’
도현은 칼라치의 방패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몸놀림으로 슬쩍슬쩍 피하며 그의 허점을 냉철한 시선으로 파악했다.
‘철저히 방어 위주로 가는군.’
다크캐슬에서 도현의 뛰어난 검술 솜씨에 한번 혼이 난 칼라치는 공격에 모든 걸 걸지 않았다. 약간의 빈틈만 보이면 도현이 그 빈틈을 헤집고 들어와 그를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공격을 하되, 왼쪽 방패는 철저히 자신의 상반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강해도 날 죽이려면 네놈도 가진 힘을 다 소모해야 할 것이다. 시간도 제법 걸리겠지. 그때 쯤이면, 파쵸마들이 널 가만두지 않을걸.”
“당신, 살기를 포기한 건가?”
“아니, 이것이 내가 살기 위한 전략이다. 넌 선택을 해야 될 거야. 나냐, 아니면 네 목숨이냐!”
도현은 피식 웃었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내가 지금 직접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나?”
“뭐?”
“당신을 죽이는 건 파쵸마야. 나야말로 당신을 직접 죽일 생각이 없거든. 그저 이렇게 당신의 두 발만 묶어 놓으려고. 30마리가 한꺼번에 당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해 봐. 끔찍하지 않나?”
“헛소리! 너도 위험하게 돼!”
“오늘 충분히 목격했을 텐데? 난 당신보다 빠르고, 나무를 타는 재주도 상당하거든.”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칼라치의 사내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솔직히 일대일로 도현과 맞붙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지난번에 패하기도 했고.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사내로서, 조금 더 높은 곳까지 이르지 못한 게 너무도 원통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죽는 건 내가 정한다!’
도현의 말에 심적 부담이 생긴 그는 생각을 바꿔 재빨리 뒤로 몸을 빼서 도망을 치려 했다.
“어딜!”
도현이 신법을 발휘해 유령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번개 같은 빠르기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내공이 잔뜩 주입된 도현의 검에 적발 거한 칼라치가 방패와 함께 뒤로 날아갔다.
쿠웅.
바닥을 뒹군 칼라치는 주변에서 시체를 뜯어 먹던 파쵸마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일어나며 방패로 녀석의 공격을 막아 낸 후, 앞차기로 파쵸마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저만치 날아가는 파쵸마를 뒤로하고 칼라치는 다시 도현을 피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도현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위협적인 검 세례를 퍼부었다.
차차창!
검과 방패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칼라치, 당신을 살려 주면 다시 내게 검을 들이대겠지?”
“말이라고 하나!”
“그럼 어쩔 수 없겠군. 정말 어쩔 수 없겠어.”
도현의 차가워진 눈빛에 칼라치도 지지 않고 노려보며 그를 뚫고 숲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좀처럼 도현의 손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마나의 힘을 빌려 발휘하는 강철 방패술도 이제 서서히 힘이 다해 가고 있어서 그의 마음은 초조했다.
이미 주변의 부하들은 다 전멸하고 그 시체를 뜯어먹는 파쵸마들만 가득했다. 시체를 먹느라 근처에서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는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지만, 마음이 바뀌면 얼마든지 달려들 수도 있다.
거기에다 몬스터 독화살에 맞아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파쵸마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며 정신을 차리려 하고 있었다.
“이디언은 날 여전히 적대시하고 있나?”
“가서 물어봐.”
“왜 날 가만두지 못하나! 왜!”
도현이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칼라치의 옆구리에 주먹을 날리며 외쳤다.
“크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