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109화 (109/575)

[109] 디 임팩트 5권 9화

다크캐슬에서 죽음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죽음을 알아주고 장례를 치러 줄 사람이 있다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몬스터 사냥꾼의 리더로서 사람들을 이끌어 온 왈스의 죽음은 그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10여 명가량 되는 사냥꾼들에게 큰 충격과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 다니면 다른 사냥꾼 무리보다는 덜 위험했고, 사냥 실적도 조금 더 나았기 때문이다.

“와 줘서 고맙소.”

블리잭이 슬픈 얼굴로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료들에게 죽은 왈스의 시신을 보여 줬다.

그는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어쩌다 죽은 거요?”

“며칠 전부터 가슴이 좀 아프다고 했는데…… 정확한 건 나도 모르겠소. 침대에서 죽어 있었으니. 하지만 저리 편안한 얼굴인 걸 보면 죽을 때 고통은 없었던 것 같소.”

왈스의 2층 집에서 겨우내 함께 살았던 블리잭이 슬픈 어조로 말했다.

“흠, 몬스터에게 잡혀 먹히는 것보다는 편한 죽음이지. 그나저나 이 집은 그럼 누가?”

“평소 왈스는 입버릇처럼 날 동생이라 칭했소. 그의 뜻을 이어받는 게 내 도리라 생각하오.”

10여 명의 사냥꾼들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나타난 블리잭은 왈스와 친하게 지냈고, 그의 집에서 함께 살기까지 했다. 블리잭이 왈스의 집을 차지한다는 것에 대해 딴죽을 걸 수도, 그럴 권리도 없었다.

“이상한데. 어제 날 만났을 때는 굉장히 건강해 보였는데?”

루드가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에 블리잭의 눈썹이 꿈틀댔다.

“하긴, 남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블리잭, 힘내시오.”

50이 넘은 루드는 블리잭과 나이 차이가 좀 났지만 친구처럼 지내왔다.

겨울 사냥이 없는 지난 두 달간 틈틈이 만나 술도 마시곤 했다.

“고맙소. 내일 화장할 때도 도와주시오.”

10여 명가량 되는 사냥꾼들과 루드가 물러가자 블리잭은 침상 위의 왈스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술잔을 들었다.

“잘 가시오, 왈스.”

“왈스가 죽었으니, 저쪽 사냥꾼들은 갈라지는 건가?”

다크캐슬에는 많은 몬스터 사냥꾼들이 있다. 그중에서 숙련된 리더와 같이 다니지 않으면 이 일도 오래 못 한다.

“겨울이 끝나면 찾아봐야겠어.”

왈스의 죽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저녁 무렵 돌아온 루드는 집 안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흡족한 미소로 응시했다.

사라진 도현에게서 전수받은 검술을 아들이 능숙하게 발휘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자신이 없더라도 가족을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설치지 마라. 그러다 또 집안 기둥 상한다.”

속마음과 달리 투박하게 툭 쏘는 말을 뱉어 낸 그의 시선이 아내에게 향했다.

“당신은 왜 그렇게 긴장을 하고 있어?”

“긴장은요. 내가 얼마나 편안한 상태인데요.”

대답을 하며 그녀는 눈동자로 주방이 있는 쪽을 힐끔거렸다.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거실에서 검을 수련하는 아들을 지나쳐 왼쪽으로 몸을 튼 루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방 식탁 의자에 앉아서 아들의 검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정돈되지 않는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으로 인해 잠시 동안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는 곧 사내가 도현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 당신은!”

“안녕하셨습니까?”

도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오자 루드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왜 아내가 평소와 달리 뻣뻣한 표정으로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인간 도살자.’

남들은 도현을 그렇게 불렀다. 다크캐슬에 도망 온 범죄자들조차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학살이라며 진저리를 치는 무서운 인물.

골목마다 시체를 만들어 놓았고, 다음 날 그의 손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들을 모아 불에 태웠는데, 한 사람 손에 당했다고 믿기지 않는 엄청난 수였다는 것까지.

모든 이야기는 그를 다크캐슬에서 피해야 할 가장 무서운 인물 중 한 명으로 만들어 놨다.

“안 잡아먹습니다.”

이미 루드의 부인인 앤으로부터 비슷한 반응을 경험했던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루드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나보고 인간 도살자라고요? 그만큼 절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을 순 없잖습니까?”

에드를 통해 그에 관해 떠도는 이야기를 접한 도현이었다.

“그,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근데, 내게 서운해서 분풀이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 설마?”

도현이 살아 있기를 바라며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였지만, 악명을 얻은 도현이 막상 떡하니 집 안에 들어와 있자 절로 소름이 돋고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서운할 게 뭐 있습니까? 칼라치 앞에서 절 두둔하거나 함께하려고 하기에는 저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잖습니까? 서로 안 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요.”

“당신이 나보다는 나은 인물이라는 건 알지.”

검을 거두고 다가온 아들을 힐끔거린 그는 길게 한숨을 쉬며 도현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소. 내겐 가족이 전부요. 이 녀석과 토밀, 그리고 아내 앤. 당신이 괜찮은 인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내 등 뒤의 가족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소. 혼자였다면, 아마도 고민을 길게 했을 거요.”

다소 매몰찰 정도로 도현과 선을 긋고 집으로 들어갔던 일에 대해 루드는 마음 한편에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이해합니다. 저라도 가족이 있다면 먼저 그들을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사실 냉정히 따지면 저를 위해 칼라치와 싸우려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제게 짐만 됐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 하지만 나도 싸우지 않아서 그렇지, 제대로 싸우면 몇 놈 정도는 아직도 상대할 수가 있소.”

“여보, 지금 자존심 찾을 때예요!”

긴장된 얼굴로 도현의 눈치를 보며 서 있던 앤이 한 소리 했다.

“아니, 그렇다는 거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한 루드는 도현을 쳐다봤다.

“살아 있는 것도 기쁘고, 만나서 반갑기도 한데, 여기는 어쩐 일이오?”

도현은 얼굴이 부은 토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있는지 궁금해서 한번 찾아왔습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에드야, 아까 내가 지적한 부분은 주의에서 수련해라. 알겠지?”

“네, 스승님!”

에드는 망설이다가 눈을 딱 감고 스승이라는 말을 꺼냈다. 도현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는 감격한 얼굴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자신을 인정했다는 표시였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열심히 해서 스승님처럼 무서운 이름을 얻겠습니다.”

“이 녀석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정신 안 차려!”

아버지의 벼락같은 호통에 에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왔는데, 벌써 가는 건 내가 허락 못 하겠소. 저녁 먹고 술도 한잔 합시다.”

“아저씨, 새 구역장 좀 혼내 주세요.”

뜬금없는 토밀의 말에 루드의 부인이 정성껏 끓인 고기 수프를 떠먹던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야 하지?”

“새 구역장이 보호비를 더 내래요.”

“이 녀석이 그냥! 신경 쓸 것 없소. 어서 드시오.”

도현에게 손짓을 한 루드는 잠시 뒤 도현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며 넌지시 물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칼라치뿐만 아니라 여러 구역장들이 합세해서 당신을 공격했다가 북쪽에서 크게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이오?”

도현은 시큼한 맛이 강렬한 술을 한 모금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술이라서 그런지 질 낮은 술인데도 불구하고 손이 자꾸 갔다.

한동안 술을 음미하던 그는 식탁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대답을 더는 늦출 수가 없었다.

“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도현의 대답을 듣는 순간, 루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였어. 소문이 사실이었어. 칼라치와 여러 구역장들이 낭패한 모습으로 돌아온 게 모두 이 한 사람 때문이었던 거야. 세상에, 얼마나 강하기에 칼라치뿐만 아니라 여러 구역장들까지 한꺼번에 상대할 수가 있지?’

도시 남부에서 벌어진 수백 대 일의 전투도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소문으로 떠돌던 이야기까지 사실로 판명 나자 루드는 가슴이 세차게 고동쳤다.

“내 말투가 거슬린다면…….”

“아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불편합니다.”

“스승님, 칼라치와 구역장들이 스승님을 노렸다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위험합니까?”

“형, 말하는 게 멋있다.”

“그런 건 조용히 얘기해야지.”

동생의 옆구리를 툭 치며 낮게 말을 한 에드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현을 멋쩍은 표정으로 응시했다.

“흠, 글쎄. 난 적절한 내 의사표시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받아들일지 안 받아 들일지는 그들이 결정하겠지.”

말을 하는 도현의 눈에 차가운 한기가 잠시 번뜩였다 사라졌다.

지난 두 달간 도현은 추운 동굴에서 필요할 때만 불을 피우고 혹한의 추위 속에 자신의 검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극기를 통해 칼날처럼 예리해진 그의 정신과 의지는 완벽해져 있다고 생각했던 호검술에 대한 이해도를 다시금 높여 줬고, 그 결과 호검술의 파괴력과 정교함이 전반적으로 크게 상승했다.

사실, 검의 깊이가 한 단계 올라 호검술이 아닌 평범한 검술이라 해도 그의 손에서는 강력하게 변할 수준이었다.

그는 또 지리산 도인의 단전호흡법을 ‘호심공’이라 스스로 칭하며 연구도 했다.

추적을 피하는 와중에 깨달은 동공인 이 호흡법은 몸을 적절히 움직여 주며 호흡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를 통해 내공의 회복을 돕고, 체내에 활력이 솟게 하며, 상처의 통증을 잠재워 주고 나아가 자가 치료까지 이어 주는 굉장한 효과가 있었다.

이 세 가지 효과를 이미 실제로 경험했던 그는 마지막으로 내공을 키워 주는 축기의 효과가 얼마나 있는 것인지 알아내고 싶었지만, 두 달간의 극기를 통한 집중적인 수련 속에서도 내공이 늘지 않는 벽을 깨지 못해 아직 확인을 못 한 상태였다.

“맛있군요. 조금 더 부탁드릴까요?”

도현이 접시를 내밀자 앤이 고기 수프를 가득 담아서 도현 앞에 내려놨다.

“또 있으니 많이 드시우.”

“감사합니다.”

앤은 도현을 보고 가졌던 불안한 마음을 많이 해소했는지 전처럼 말이 편안해졌다.

“아저씨는 여기 왜 온 거예요? 그렇게 싸움 잘하면 본토에서 왕이 되면 되잖아요?”

토밀은 방패왕 칼라치를 이기고 수백 명에 맞서 싸운 도현이 대단해 보였는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토밀, 왕은 싸움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따르는 사람이 많아야지.”

점잖은 어투로 아버지가 말하자 토밀이 키득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서도 싸움 잘하는 사람이 대장인데요.”

다크캐슬에서 태어난 토밀에게 세상은 힘이 최고인 곳이었다.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수프나 먹어.”

에드가 쫑알거리는 동생의 입을 막았다.

“근데, 무슨 일로 칼라치와 싸움이 붙은 거요?”

루드가 술을 한 모금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달 전부터 궁금했던 일이었다.

“누군가는 당신을 암살자라고 하던데 말이오. 칼라치를 죽이기 위해 비밀리에 온.”

“내가 암살자였다면 칼라치는 죽었겠죠.”

도현의 간단한 대답에 루드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헛소리들이 난무해서 그냥 물어본 거요.”

“다크캐슬에 오기 전, 용병으로 일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맺은 악연이 여기까지 이어지더군요.”

궁금증이 모두 풀릴 만큼의 대답은 아니었지만 루드는 더 이상 그때 일을 캐묻지는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도현이 손으로 입을 한번 훔치며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다소 지저분한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과 산발된 머리, 거기에다가 옷까지 낡아서 수백 대 일의 싸움을 벌인 강자의 행색치고는 어딘지 초라해 보였다.

“돈이 없소?”

“네?”

술을 따라 마시던 도현이 루드를 쳐다봤다.

“아니, 정신없이 먹는 것도 그렇고, 겉모습이 짠해 보여서 말이오.”

“맞아, 거지 같아.”

“이게 버릇없이!”

에드가 동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하하하!”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그에게 루드가 마주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말이 심했다면 미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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