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디 임팩트 5권 10화
“아닙니다. 제가 봐도 냄새나는 옷에 몰골이 말이 아니군요.”
“원한다면 그때 내 아들에게 준 금화를 다시 줄 수도 있소.”
도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루드가 말하는 돈이 어떤 돈인지 생각난 것이다.
두 달 전, 칼라치가 그에게 집터와 보호비 조로 받았던 금화 45개를 돌려준 적이 있었다. 그 돈을 도현은 에드에게 줬었다.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었습니까?”
“워낙 큰돈이고…… 돈을 썼다가 나중에 당신이 돌아와 딴소리하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도현의 손에 죽은 수많은 시체들이 불에 타는 광경을 목격한 루드는 만일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제가 악명을 떨치긴 한 것 같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조심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서.”
“그날 칼라치와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시는 에드와 토밀을 볼 수 없을 것 같기도 했고요. 그래서 도움이 됐으면 해서 준 겁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고요.”
“스승님.”
“아저씨.”
에드와 토밀이 감동받은 얼굴로 도현을 응시했다.
“그러니 필요한 데 사용하십시오. 그러라고 드린 돈이니까요.”
“하지만 당신 행색을 보면…….”
또르르륵.
도현이 꺼낸 붉은 보석 한 개가 식탁 위를 굴러 중간에 탁 멈췄다. 은은한 촛불 빛에서도 루비의 모습은 아름다워서 일순간 사람들의 시선을 다 집중시켰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동안 도시 바깥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런 것이죠.”
루비는 낮에 도현이 노스리어에 들러 하피닉스라는 몬스터의 뿔을 팔고 얻은 것이다.
하피닉스는 다람쥐처럼 작은 몬스터로, 바람을 타고 약간 비행을 할 수 있다. 나무를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화살을 이용해 잡아야 하는데, 워낙 재빨라서 잡기가 어려운 몬스터였다.
하지만 일단 잡으면 큰돈이 된다.
그 머리에 달린 손바닥 길이의 원뿔형 뿔이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야광 성질이 있어서 아주 고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다 깊은 곳에서도 어둠을 쫓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노스리어 상점에서는 흠집이 없는 뿔을 개당 금화 100개에 매입한다.
그래도 파는 사람이 거의 없는 희귀한 몬스터 재료였다.
파쵸마 숲에서 우연히 발견한 녀석들의 뿔을 두 개 팔고 받은 게 바로 식탁 위의 보석이었다.
금화 200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몬스터 재료 상점 주인이 금화 대신 제공한 것이다.
“설마 이것도 날 주려고?”
루드가 홀린 듯한 시선으로 보석에 손을 뻗을 때 옆에 있던 앤이 국자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정신 안 차려요, 정말!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바닥에 쓰러진 루드를 내려다보던 앤은 부끄러웠는지 보석을 집어 얼른 도현에게 건네줬다.
“미안해요. 우리 아이에게 검술도 가르쳐 준 분인데, 돈도 주고. 못난 꼴 보였어요.”
벌목장에서 벌목을 하는 힘 좋은 앤에게 제대로 국자로 맞은 루드가 머리를 감싸며 일어섰다.
“이 사람이, 지금! 장난 한번 한 거 가지고 남편을 죽이려고 해? 아무렴 내가 진짜 그럴 마음으로 말했겠어? 칼라치도 못 당한 사람에게?”
“네에.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어요.”
“뭐야?”
“그만 가 보겠습니다.”
자신이 꺼낸 보석 때문에 티격태격 싸우는 부부의 모습에 도현은 머쓱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과 말싸움을 하던 루드는 그제야 도현을 의식하며 얼른 돌아봤다.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잠을 자고 가는 게 어떻소?”
“그래요, 스승님.”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일이 있어서 가 봐야겠습니다.”
“다시 또 올 거요?”
말을 하며 루드는 아들을 힐끔 쳐다봤다. 악명을 떨칠 만큼 실력이 뛰어난 도현이다. 그가 아들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 게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복이었다. 앞으로도 종종 들러서 검술을 가르쳐 줬으면 하는 게 그의 욕심이었지만 노골적으로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었다.
“기회가 되면요. 그럼 이만.”
도현이 돌아서려 하자 루드가 급히 말했다.
“고맙소 정말. 진심이오.”
“…….”
도현은 식탁 주위에 서 있는 에드와 토밀, 그리고 루드와 앤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들과 지낸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가족의 깊은 정이 흐르는 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다투는 부부의 모습도, 동생의 머리를 쥐어박는 에드의 행동도, 그가 보기에는 따뜻함이 흘러서 아주 보기 좋았다.
“안녕히 계십시오.”
도현이 문을 열고 나가자 뒤에 쫓아온 에드가 소리쳤다.
“스승님, 기다리겠습니다. 또 오십시오!”
겨울 찬 바람을 맞으며 어두운 거리를 걷던 도현이 막 문을 닫으려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검을 모루 위에 올려놓고 부러트렸던 늙은 거한이 기침을 하며 도현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외날 검을 찾습니다.”
“골라 보시오.”
도현은 길이가 적당하고 무게 중심이 잘 잡힌 검을 두 자루 골라 계산을 한 후, 왼쪽 벽면을 쳐다봤다.
가죽 갑옷이 여러 벌 걸려 있었다.
“전에는 없던 것들이군요.”
“찾는 사람들이 조금 있어서 준비했지. 노스리어에서 파는 고가의 방어구들보다야 질이 떨어지지만, 지금 당신이 입은 걸레 같은 갑옷보다야 백번 낫지.”
여전히 입이 거친 주인이었다.
“당신 말투에 화를 내는 손님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도현이 짙은 묵빛의 가죽 갑옷을 벽에서 떼어 내며 말했다.
“화를 내라지. 겁 없이 덤비면 그놈을 죽여서 저기 화로에 던져 버릴 테니까. 쿨럭, 쿨럭.”
손으로 입을 막으며 기침을 심하게 한 그는 가까이 온 도현에게 돈을 받은 후, 옆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갈아입고 나오시오.”
천으로 가려진 곳에서 구멍 나고 찢어진 가죽 갑옷을 벗은 도현은 달빛도 흡수할 것 같은 짙은 묵빛의 가죽 갑옷을 착용했다.
거기에 허리띠를 두르고 양쪽에 조금 전 구입한 두 자루 검을 한 자루씩 고정시켰다.
칼집에 매달린 작은 고리가 허리띠의 구멍에 딱 맞물려서 심한 움직임에도 검은 이상 없을 것 같았다.
차아악.
천을 옆으로 밀치며 도현이 나오자 화로에서 불을 쬐고 있던 늙은 거한이 도현의 신발을 지적했다.
“신발은 안 사나?”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가죽 장화까지 산 도현은 대장간을 나서기 전 조용히 물었다.
“헬구스라는 구역장을 아십니까?”
“정신 나간 것들. 정말 일을 저지를 생각인가?”
윌벤슨을 만나고 온 헬구스는 부하들이 지키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나긋나긋한 여자의 목소리에 헬구스가 피곤한 얼굴로 손짓을 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
“무슨 소리예요. 이리 와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얼굴에 살이 많은 뚱뚱한 중년 여자가 포동포동한 팔로 그를 껴안았다.
“히익!”
몸을 흠칫 떤 그는 후다닥 2층으로 도망갔지만 여자는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를 쫓아갔다.
쿠웅!
간발의 차로 서재 방문을 걸어 잠근 그는 문을 주먹으로 후려치는 여자의 힘에 식은땀을 흘리며 애원했다.
“제발, 그만하자. 우리 헤어지는 거야. 어?”
“날 살찌게 만든 게 누군데 그래요! 이제 와서 날 버리겠다고!”
“숨을 못 쉴 정도로 무거운데 그럼 어떻게 하라고!”
“책임져요! 원래 날씬했는데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돌아가. 당신은 본토에 가도 당신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잖아.”
“안 열어요?”
콰앙!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온 여자는 그 서슬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헬구스를 내려다보며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본토에 가도 나 혼자 안 가요. 함께 가는 거예요. 우리의 고향으로.”
“날 죽이려는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함께 가자고?”
“뭐가 겁나는 거죠? 우리 아버지가 당신을 지켜 준다고 하잖아요.”
“글쎄, 그건 당신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얘기고. 당신 아버지가 죽으면 난 위험해진다고.”
“한심한 인간! 죽는 게 그렇게 겁나요!”
실망한 여자가 헬구스를 노려보더니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럼 죽는 게 겁 안 나는 인간이 있나?”
투덜거리며 일어서던 헬구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2층 창가에 누군가 앉아서 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달빛을 등에 받으며 앉아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소리쳐도 됩니다. 대신, 싸움이 벌어지면 책임은 못 집니다.”
“겁을 상실했구나. 감히 내 앞에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넌 누구냐?”
“날 모르겠습니까?”
도현이 높은 창턱에서 뛰어내려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촛불의 영향권으로 들어오자 헬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서 본 듯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수염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 너는!”
침입자가 가까이 오면 단번에 목을 잘라 버릴 생각을 하던 헬구스의 눈이 급속도로 커졌다. 그리고 바로 방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도현의 말에 헬구스가 방문 옆 벽을 손바닥으로 치며 뒤로 재주를 넘어 도현의 앞에 떨어졌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뚱뚱한 몸으로 보일 수 없는 그 유연한 몸놀림에 도현이 작게 감탄을 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날 왜 찾아왔나?”
“몇 가지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내게?”
헬구스는 도현의 위아래를 살폈다. 검은 가죽 갑옷에 검을 두 자루나 차고 있었다.
“복장은 그게 아닌데? 단단히 싸움을 하려고 온 사람 같잖아.”
“내 뜻과 달리 당신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요. 아직도 당신은 날 적으로 생각합니까?”
도현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자 헬구스가 눈을 깜빡이며 크게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 나와 당신은 그때 숲에서 마음이 통한 걸로 아는데. 난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칼라치나 윌벤슨의 문제였지. 자 자, 그러지 말고 이쪽에 앉지.”
도현을 의자에 앉힌 헬구스는 유리병에 든 향기 좋은 술을 은색 잔에 따르며 도현을 힐끔거렸다.
“그런데 언제부터 창가에 앉아 있었나?”
“좀 됐습니다.”
“여자와의 일도 지켜봤겠군?”
도현은 고개를 말없이 끄덕였다.
“워낙 내가 마음이 넓어서 여자 앞에서는 약해.”
헬구스는 양손에 든 은색 잔을 도현 앞에 동시에 내밀었다.
“고르게.”
독이 들지 않은 안전한 술이라는 것을 강조한 행동이었다.
“아무거나 주십시오.”
“괜찮겠나?”
헬구스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독에 중독되더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죽일 힘이 있습니다.”
“날 너무 약하게 보는군.”
미간을 찌푸리며 술잔을 건넨 헬구스는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한 손으로 들고 와 도현과 마주 보는 위치에 놓고 앉았다.
뚱뚱한 체격 때문에 의자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소리를 냈다.
술을 한 모금 한 그는 푸른 눈으로 도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직도 그는 도현이 파쵸마들을 부하처럼 이끌고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던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강렬했고, 두려움을 모르는 자 같았다.
“지금도 가끔 오줌을 누다 보면 자네에게 당한 사실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뒤를 한번 살펴보게 되지.”
“그렇습니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바지를 완전히 내리고 주저앉아서 큰일을 보고 있었다면 어찌 됐겠나?”
우스갯소리를 한 그는 술잔을 빙글빙글 손안에서 돌렸다.
“그래, 내게 묻고 싶다는 게 뭔가?”
“분위기를 알고 싶습니다. 여전히 날 적대시하고 찾으면 죽이려는 분위기입니까?”
“그게 궁금해서 찾아온 것이로군. 걱정 말게. 전혀 아니니까.”
헬구스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곧바로 대답했다.
“그날 일은 그때 이후로 잊힌 일이 됐어. 부하들을 몽땅 잃은 칼라치만 손해 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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