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디 임팩트 5권 14화
“감사합니다, 대사제님. 한데, 또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뭐요 그게?”
“저를 따라 같이 수행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명인데, 그들도 같이 머물게 해 주십시오.”
“그들도 사제들이오?”
“아닙니다. 수행하는 저를 수발드는 자들입니다.”
“사제가 아닌 일반인들은 곤란한데.”
“부탁드립니다, 대사제님. 제가 있는 동안 대사제님의 이름이 성에서 더 높아지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난색을 표하던 대사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소? 너희들은 잠시 물러나 있거라.”
“네, 대사제님.”
젊은 사제들이 멀찍이 물러나자 대사제가 리드만의 귀에 속삭였다.
“이보시오, 리드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나 여기서 아주 잘 살고 있는데, 왜 초를 치려고 하는 거요?”
“휴고스, 신전에서 쫓겨난 사람이 여기서 머물고 있다니, 아까 당신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리드만도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쫓겨나다니! 누가? 난 내 발로 신전을 나와서 독립한 거라고!”
“알았소. 그만하십시다. 30년 전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리드만은 조금 전 신전 안에서 휴고스를 보고 깜짝 놀랐었다. 수련 마법사에서 사제로 방향을 틀고 신전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던 무렵에 휴고스를 만났는데, 그는 과히 사제로 적당한 인물은 아니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건가?”
퉁명스러운 대사제의 질문에 리드만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젊은 사제들을 보며 답했다.
“신의 계시가 있어서 왔다는 말 그대로요.”
“흥!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
“사실이오. 그러니 내 수발을 드는 두 명도 성안에 머물 수 있게 힘을 써 주시오.”
“싫다면?”
“싫다면 이 리드만이 수련 마법사 시절 때 어땠는지 다시금 기억하게 해 주겠소.”
차가운 리드만의 눈빛에 휴고스가 움찔했다.
오래전 리드만이 사제가 되기 위해 신전에 왔을 때 그의 과거를 두고 대사제가 깊이 고민했던 사건을 휴고스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그를 건들지 않는 게 좋다.
“나도 장담은 못 하네. 성안에 사람을 머물게 하는 건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니까.”
“부탁드립니다, 대사제님.”
리드만이 정중한 음성으로 돌아와 허리를 숙이자 휴고스가 한숨을 길게 쉬며 허리를 두드렸다.
“한번 궁리를 해 봅시다.”
노스리어 지역에 위치한 여관은 도시의 다른 여관처럼 숙박비를 속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처음부터 비싼 숙박비를 공개하고 받았다.
노스리어 여관 3층에 머물며 성으로 들어간 리드만에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던 도현은 창밖으로 보이는 노스리어 거리를 내려다봤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울도 지금쯤은 첫눈이 내렸겠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대충 계산해 보니 서울의 시간은 3주가 채 지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이계보다 서울의 시간이 서너 배 늦게 가기 때문이다.
‘홍영, 용주, 철호 형.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김 작가나 이 피디는 도장을 그만뒀을지 모르겠어.’
3층 창가에서 거리에 내리는 눈을 한가롭게 구경하던 도현은 감수성이 폭발했는지 이계에서 꼭꼭 억눌러 놨던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슬며시 꺼내 홍영과 주변 사람들을 그려 갔다.
“누구 보고 싶은 사람이 있나?”
도현의 방을 들어온 딘이 창가에 서 있는 도현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뒤돌아선 도현은 불필요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속이지 말게. 난 척 보면 알아.”
딘은 도현이 내려다보던 창가로 다가가 아래로 시선을 두었다. 날이 점점 지고 있었다.
“오늘도 리드만은 오지 않을 것 같군.”
며칠째 도현과 함께 여관방을 지킨 딘은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신전에서 기도에 푹 빠져 있는 것 아니야? 오면 혼내 줘야겠어.”
미간을 찌푸리며 딘은 창문턱을 손바닥으로 탁탁 여러 번 쳤다.
“자네 용병이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영주님.”
“폭주를 해결한 이후에는 무얼 할 텐가?”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검을 수련하려고 합니다.”
“검을 수련한다. 좋지. 자넨 강해지고 싶은 것이로군.”
창밖을 응시하던 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폭주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땐 무얼 할 텐가?”
“그때도 역시 검을 수련할 겁니다. 제겐 그 외의 것은 없으니까요.”
집념에 찬 그의 대답에 딘은 도현의 눈을 응시했다.
“이거 이 친구, 알고 보니 속에 꽉 찬 응어리가 있군.”
“죽여야 할 적수가 있습니다.”
“현재 자네 검으로도 못 이길 정도인가?”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도현은 태선군이 보여 줬던 절대 고수의 풍모를 떠올리며 말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다시 그를 만나 싸울 때는 자신이 죽든, 아니면 그가 죽든 해야 한다.
청선의 도움으로 얻은 기회는 딱 한 번.
태선군은 두 번은 그를 살려 주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해 보게. 자네는 의지가 강해 보이니, 결국엔 뜻을 이루게 될 거야.”
딘은 자세히 묻지 않고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영주님, 그래서 감히 청합니다. 영주님과 대련을 하고 싶습니다.”
“또 그 이야기인가?”
지난 며칠간 여관에 함께 머물며 도현은 딘과 검을 겨루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었다. 하지만 딘은 허락을 하지 않았다.
“영주는 아무 때나 검을 휘두르지 않아.”
“수련은 하실 거 아닙니까?”
“난 안 해.”
“…….”
“자네 돈 얼마나 남았나?”
“아직 충분히 있습니다.”
도현은 금화 200개 가치의 보석 하나와 금화 25개 정도가 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돈이 정확히 얼마나 있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럼 오늘 밤 우리 도박장에나 가 볼까?”
“도박장요?”
저녁을 먹고 들어간 도박장에서 밤늦게 나온 둘의 어깨는 힘이 없어 보였다.
“미안하네. 왜 나를 말리지 않았나?”
“전 영주님을 믿었습니다. 워낙 강하게 주장하셔서요.”
허탈한 도현의 목소리에 딘이 미안한지 헛기침을 한번 했다.
“도박이란 건 잃을수록 쾌감이 증가하는 법이라네. 자네도 배워 두면 좋을 거야.”
“충분히 배운 듯합니다.”
“얼마를 잃었지?”
“금화 100개가 좀 넘습니다.”
“후우, 거금이군.”
도현은 루비를 판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다.
‘그만하자고 딱 잘라 말했어야 했는데.’
물주 노릇을 하던 그는 딘이 영주 체면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낙담한 표정을 짓자,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루비를 팔아 다시 돈을 댔다.
폭주에 관한 정보도 알려 주고, 숲에서 화살에 죽어 가던 그를 치료해 준 영주였기에 도현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는 오래지 않아 줄어 버린 금화 주머니로 증명이 됐다.
그나마 혹시나 해서 루비를 판 돈의 반을 따로 남겨 두지 않았다면 빈털터리가 될 뻔했다.
“언제고 자네가 쓴 돈은 갚겠네.”
“꼭 그렇게 하시겠다면 감사히 기다리겠습니다.”
예상과 다른 도현의 대답에 딘이 움찔했다.
“커험!”
크게 헛기침을 한 딘이 여관으로 바삐 향하자 도현이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도박장에서 큰돈을 잃은 다음 날 리드만이 겨울 추위를 피할 수 있게 제작된 두툼한 사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무사하셨군요.”
여러 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은근히 걱정을 했던 도현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나?”
영주의 뚱한 반응에 리드만이 질 좋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사제복을 들춰 보이며 말했다.
“이 옷, 두 벌을 더 얻기 위해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영주님.”
“그 옷은 왜?”
“견습 사제가 되셔야겠습니다.”
“뭐라고? 견습 사제?”
“네, 입으시지요.”
가방에서 견습 사제의 옷 두 벌을 꺼낸 리드만이 도현과 영주에게 한 벌씩 나눠 줬다.
“안에 입은 갑옷은 벗고, 착용한 검도 빼게.”
리드만이 사제로서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지적하자 도현은 할 수 없이 얼마 전 새로 산 검은 가죽 갑옷과 검 두 자루를 모두 몸에서 떼어 놓고, 사제복을 위에 걸쳤다.
위아래 통으로 된 사제복은 따뜻했고, 등 뒤에 모자가 달려 있었다.
“난 안 입어!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야!”
딘이 탁자 위에 사제복을 휙 집어 던졌다.
“영주님, 저도 노력은 해 봤지만, 다른 신분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입으시지요.”
“이걸 입으면 난 자네의 부하가 되는 거잖아.”
“그런 척만 하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안에서는? 신전의 다른 자들에게도 굽실거릴 견습 사제 아닌가?”
“폭주를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영주님?”
리드만의 여유로운 대답에 딘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현,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자네와 내 실력 정도면 밤마다 몰래 숨어 들어가 조사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야?”
“한계가 있다고 이미 영주님도 인정하셨잖습니까? 품위와 체면은 잠시 접어 두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도현도 견습 사제라는 옷과 직분이 어색하게 다가왔지만 리드만이 이를 위해 얼마나 뛰어다녔을지 생각하면, 고마울 뿐이었다.
“리드만, 혹시 다른 방법이 있는데,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리드만이 영주의 시선을 회피하며 어색하게 대꾸했다.
“음.”
딘은 결국 견습 사제 옷을 입었고, 리드만은 안에서 그들이 취할 행동 같은 것을 몇 가지 알려 줬다.
특히 딘에게는 견습 사제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만 말해. 귀 아프니까.”
“딘, 말조심하게. 나는 자네가 모시는 수행 사제야.”
크게 꾸짖는 투로 리드만이 말하자 딘은 도현이 내려놓은 검을 뽑으며 외쳤다.
“죽고 싶나, 리드만!”
“잘못했습니다, 영주님. 하지만 앞으로 익숙해져야지요.”
“상황이 닥치면 내가 알아서 해! 지금은 아니잖아!”
“걱정되니까 드리는 말씀이지요.”
“리드만!”
“말조심하게, 딘!”
“뭐야!”
좁은 방 안에서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에서도 저러는 건 아니겠지?’
작게 걱정을 하던 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윽! 뭐지?’
별안간 찾아온 왼팔의 강한 통증에 도현은 사제복을 걷어 팔을 내려다봤다.
황금색 타투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타투가 사라지고 있어!’
생각지도 못한 현상에 깜짝 놀란 도현은 사라져 가는 타투와 아직도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딘과 리드만을 번갈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겨우 성에 들어갈 기회가 왔는데.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지면 폭주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빌어먹을!’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도현이 주먹으로 벽을 치자 벽이 움푹 들어가며 큰 소리가 났다.
콰앙!
말다툼을 벌이던 딘과 리드만이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싸움을 중단했다.
“리드만, 어서 가지.”
“네, 영주님.”
자신들 때문에 도현이 벽에 주먹질을 했다고 판단한 그들이 짐을 챙길 때 도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딘과 리드만이 쳐다보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해야 할 일을 마무리 못 하고 가야 한다는 분함과 이계에서 맺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일 수 있다는 애석함이 그의 감정을 마구 자극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싱겁기는. 어서 준비하게.”
딘과 리드만이 뒤돌아서는 순간, 도현은 거의 사라져 가는 황금색 타투에 손을 얹었다.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서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지이이잉.
공간이 열리며 힘없이 빛을 발산하는 불완전한 타원형이 나타났다.
‘다시 봤으면 좋겠습니다.’
도현은 등을 보인 딘과 리드만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 이계의 모든 것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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