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디 임팩트 5권 16화
“오해는요. 내가 일본 말은 못해도 눈치까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날 보는 시선도 그렇고, 도장을 둘러볼 때 깔보는 듯한 시선도 그렇고, 아주 불쾌합니다. 예의는 비행기 타고 오면서 바다에 던져 버린 겁니까?”
“용주 씨.”
홍영이 눈짓을 하며 고개를 살짝 가로젓자 용주가 더 심한 말은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자가 지금 날 보고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마사키가 난처한 표정의 야스오를 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누구신지 궁금해한 것뿐입니다.”
“말해 주었나?”
“굳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만 가시죠. 제가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마사키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생님.”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지. 여기까지 왔는데.”
마사키는 도장 내부를 가로질러 진열된 목검을 손에 쥐었다.
“내가 다녀간 흔적은 남겨 놓아야 하지 않겠어?”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당황한 야스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당신 말대로 백도현 관장이 실력이 있는 자라면, 내가 남긴 선물에 반응이 있겠지. 개인적으로 나를 찾아오거나, 아니면 당신들이 원하는 방송에 출연을 하거나.”
야스오를 가볍게 옆으로 밀어낸 마사키는 뚜벅뚜벅 걸어서 용주 앞에 섰다.
“난, 일본 전통 검술을 이은 스기하라 마사키다. 호검술 도장의 제자에게 한 수 배움을 청한다.”
일본어로 말하며 그가 가볍게 묵례를 했다.
“홍영 씨, 이 사람 지금 나하고 한판 하자는 분위기죠?”
“그런 것 같아요.”
“야스오, 어서 와서 통역하시오!”
마사키의 벼락같은 호통에 야스오가 슬금슬금 다가와 어렵게 입을 뗐다.
“사범님께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실 이분은 눈 가리고 사과를 벤 검객 스기하라 마사키 님입니다. 마사키 님이 대련을 요청하셨습니다.”
“어쩐지 한가락 하게 생겼더라니.”
용주가 쓴 입맛을 다시며 마사키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목검을 들고 자연스럽게 서 있는 모습이 수십 년간 검에 뼈를 묻고 산 사람 같았다.
“겁이 나면 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십니다.”
야스오는 통역을 하며 땀을 흘렸다. 이대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더 험악한 상황으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겁이 난대?”
용주도 목검을 챙겨 왔다.
“받아 주겠어, 당신의 그 오만한 대련 요청을.”
“용주 씨.”
홍영이 걱정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용주가 씨익 웃었다.
“도현이가 없을 때는 내가 도장의 얼굴이에요. 감히 호검술 도장에 찾아와서 요구하는데, 피할 수는 없잖아요.”
용주는 도장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홍영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쿵푸 도장의 대사부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녀는 무도인의 길을 보며 자라 왔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렵다고 해도 부딪쳐 싸워서 명예를 지켜야 한다.
잠시 후, 둘의 목검이 바람을 가르며 상대방을 향해 날아갔다.
‘빠르다!’
호검술 자체가 호랑이의 몸놀림을 연상해 만든 검법이었다. 바위를 박차며 산을 떨게 만드는 호랑이의 패도적인 기세와 낙엽을 밟으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는 은밀함과 경쾌함, 거기에 일격 필살의 번개 같은 빠름의 미학.
그러나 그 모든 걸 제대로 펼쳐 보기도 전에 마사키의 빛을 가르는 검이 눈부시게 뻗어 왔다.
‘초장에 당하면 쪽팔리잖아!’
허리를 유연하게 뒤로 꺾으며 상체와 따로 움직이는 듯한 놀라운 보법을 발휘한 용주는 절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일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촤아아아아!
목검이 머리 위를 스쳐 가는데 두피가 따가웠다. 머리에 구멍이 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차가운 검술이었다.
일 검에 용주를 날려 버리려 했던 마사키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피해?’
그는 목검을 뒤로 돌려 용주가 반격하는 여덟 번의 찌르기와 베기를 순식간에 막아 내며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아!
부채꼴로 퍼지는 목검들의 허상이 다시 빛살 같은 빠르기로 용주의 상체를 덮어 왔다.
이번엔 빠르기도 빨랐지만 변화가 섞인 검이었다.
‘할 수 있어!’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라고 보기 어려운 묵직한 소리가 도장 안에 날카롭게 퍼졌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용주가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빠른 검을 쳐 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큰 소리 하나.
따아악!
용주의 몸이 허공으로 살짝 치솟았다가 뒤로 빠르게 날아갔다.
쿠우웅!
“용주 씨!”
홍영은 머리 한쪽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용주에게 달려갔다.
“실력이 전혀 없는 건 아니군.”
마사키는 피식 웃으며 손에 든 목검을 집어 던졌다.
백남식 관장의 사진 옆에 나란히 걸려 있던 도현의 사진 액자가 박살이 나며 밑으로 떨어졌다.
“분하면 나를 찾아와. 언제든지 상대해 줄 테니까.”
마사키는 수첩에 자신이 사는 곳을 적어 홍영의 부축을 받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용주에게 내밀었다.
용주는 그 종이를 받아 입안에 넣었다.
“아직 안 끝났어.”
종이를 씹어 삼키는 용주의 모습에 마사키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차가워졌다.
“진검이었으면 넌 벌써 머리가 잘려 죽었다.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
“등신아, 네가 우리 관장님 사진을 망가트렸는데 내가 그대로 보내 줄 줄 알아! 덤벼, 이 새끼야!”
홍영이 만류했지만 용주는 기어이 목검을 들고 다시 마사키에게 덤벼들었다.
“커헉!”
명치에 박힌 목검을 내려다보며 용주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우에엑!”
구토를 하는 그를 내려다보던 마사키는 수첩에 다시 주소를 적어 이번엔 홍영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왜 이러는 거죠? 실력 있는 검객이라면 남의 도장에 와서 이렇게 모욕을 줘도 되는 건가요? 저 사진!”
홍영은 부서진 도현의 사진 액자를 가리키며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저 행동은 참지 못하겠어요!”
“경찰에 신고하고 싶으면 해. 난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럴 텐가?”
목검을 던져 버리고 양손에 수갑을 채우라는 식으로 앞으로 내민 마사키는 홍영이 노려보고만 있자 가볍게 웃으며 그녀 발밑에 주소가 적힌 종이를 툭 던졌다.
“수련 갔다던 당신들 관장. 이런 꼴을 보고도 날 찾아오지 않으면 벌레 같은 자식이야. 똑바로 전해.”
“뭘 똑바로 전하라는 거지?”
도현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쉬움 속에 이계에서 돌아온 그는 지하 도장에서 옷을 갈아입고 5층에 막 올라왔다가 어수선한 도장 안의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도현 씨!”
홍영이 밝은 얼굴로 소리쳤다.
“도현아.”
구토를 하며 괴로워하던 용주도 도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도현은 오만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사키를 지나쳐 용주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야?”
“미안하다. 저 자식에게 당했어.”
용주는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고, 홍영이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 전 상황을 설명했다.
“홍영 씨, 용주하고 병원에 좀 다녀와요.”
“괜찮겠어요?”
“걱정 말고 다녀와요.”
“아니, 도현 씨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 말이에요.”
홍영은 도현의 눈빛이 너무 차가워서 큰 사고를 칠까 봐 걱정이 된 것이다.
“내게 맡겨 둬요.”
“도현아, 나 이대로 분해서 병원에 못 간다. 머리 찢어진 거 나중에 꿰매도 돼. 저 새끼 가서 자근자근 밟아 버려. 아주 처음부터 작정하고 우리 도장에 온 느낌이었어. 내가 지면 안 됐는데, 빌어먹을!”
“시끄럽고, 가서 머리 치료 먼저 해.”
버티는 용주를 억지로 끌고 홍영이 밖으로 향했다.
“야! 이 마사키인지, 마빡인지 하는 새끼야! 넌 여기서 우리 관장님에게 당해도 끝이 아니야! 내가 나중에 찾아가서 이 빚을 따로 받아 낸다! 알았냐!”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용주를 홍영이 데리고 나가자 도현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11월 말 초겨울 찬 바람이 도장안의 열기를 차갑게 식혀 냈다.
“당신, 왜 그런 거야?”
창밖을 내려다보며 도현이 일본 말로 물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중국어와 일본어를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익혀 왔다. 무예 서적들 상당 부분이 그 나라의 언어로 되어 있어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였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 덕에 활자로 된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책은 자유롭게 읽을 수준이었고, 언어 구사 능력도 뛰어난 편에 속했다.
“내가 묻잖아.”
“건방진 놈. 말을 할 때는 상대방을 봐라!”
등을 보인 채 말하는 도현의 행동에 마사키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크게 외쳤다.
“당신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
“뭐라고?”
“알량한 검술 솜씨를 가졌다고 남의 도장에서 행패를 부려도 되는 건가?”
“대련이었다.”
“내 사진 액자를 부술 정도면 그건 단순한 대련이 아니잖아. 대련을 빙자한 도발이지. 당신은 어른 없는 집에 와서 아이를 혼내 줬다고 우쭐해하는 인간 같아.”
“돌아서서 말해. 창밖으로 집어 던지기 전에.”
마사키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실망이야. 일본에도 기감이 뛰어난 검도 고수가 있어서 호기심이 조금 생기긴 했었는데, 당신 같은 사람이라니. 그래도 검에 대한 열의는 깊었나 보군. 용주 실력이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야.”
“날 너희 같은 이류 도장에 속한 사범 녀석과 비교하지 마라.”
마사키가 도현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다가와 도현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선생님, 안 됩니다!”
뒤에서 가슴을 졸이며 조마조마 지켜보던 야스오가 외쳤다.
“넌 빠져 있어!”
눈빛으로 야스오를 잠재운 마사키는 도현의 목을 더욱 옥죄었다.
“백도현 관장, 산으로 수련 갔다고 하던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 왔는지 모르겠군. 역시 수련은 핑계였던 건가? 쓰레기 같은 것들.”
“쓰레기?”
도현은 목의 급소를 누르는 마사키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는 손바닥으로 그의 안면을 빠르게 후려쳤다.
짜아악!
경쾌한 소리가 나며 마사키가 뒤로 휘청거렸다.
그의 얼굴 한가운데에 도현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생겼다.
“이보시오, 스기하라 마사키 선생. 말은 조심해서 해야지.”
“이이. 네놈을!”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마사키가 몸을 휙 돌리더니 진열대에서 목검 두 자루를 챙겨 와 그중 하나를 도현에게 던졌다.
“승부다!”
“승부?”
“내 발밑에서 꿈틀대는 지렁이처럼 만들어 주마.”
검을 든 마사키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도현의 매서운 손맛을 본 뒤라서 그런지 몰라도, 도현을 경시하던 눈빛은 사라지고 빠르게 검에 집중하고 있었다.
성격은 어떨지 모르지만 확실히 지나온 세월을 검에 녹일 만큼 검을 깊이 수련해 온 자임은 틀림없어 보였다.
한눈에 마사키의 경지를 꿰뚫어 본 도현은 마사키가 던져 준 목검을 들고 조용히 그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하앗!”
절제된 검식을 보여 주며 마사키의 검이 빛살처럼 도현의 몸을 감쌌다.
용주가 당할 때보다 훨씬 빠른 검이었고, 깊이가 느껴지는 검이었다.
그 공격을 도현은 뒷짐을 진 채 한 손으로만 일일이 다 쳐 냈다.
‘이럴 수가!’
도현의 옆을 지나며 순간적으로 펼쳐 낸 열한 번의 베기 공격이 도현의 여유로운 방어에 모조리 뒤로 튕겨지자, 마사키의 눈이 커졌다.
그는 몸을 번개처럼 회전하며 밑에서 위로 검을 크게 올려 쳤다.
쇄에에엥.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위맹한 그의 공세를 도현은 교묘한 발놀림만으로 회피함은 물론, 반격까지 가했다.
퍼어억!
도현의 검에 옆구리를 맞은 마사키가 비실거리며 휘청거렸다.
옆구리의 통증을 참으며 마사키가 재차 공격하는 순간, 도현의 목검이 그의 허점을 비집고 들어가 종아리를 때렸다.
“크윽!”
격한 신음 소리를 내며 마사키가 불에 덴 듯 화끈한 종아리 때문에 절뚝였다.
“겨우 이 정도 솜씨로 호검술 도장을 발아래 두려고 했나?”
따아악!
마사키는 하늘이 노래지는 환상을 보며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정말 어이가 없군.”
도현은 팔짱을 끼며 꿈틀거리는 마사키를 위에서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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