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디 임팩트 5권 17화
곁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유일한 참관인인 야스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떨었다.
‘상대가 안 돼. 얼음 검객 마사키가 아이처럼 당하고 있어.’
그는 솔직히 도현의 실력을 어느 정도는 의심하고 있었다. 실력에 비해 워낙 젊기도 하고, 유명세를 떨칠 수 있는 방송 기회를 자꾸만 피하는 게 그로서는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아마 비슷한 이유로 스기하라 마사키도 도현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명확해졌다.
‘그는 진짜 고수였어.’
야스오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는 마사키를 딱한 시선으로 봤다.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 같은데, 마음의 상처가 크겠군.’
마사키는 자신이 패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멍하니 눈앞의 도현을 올려다봤다.
“아직도 이곳이 쓰레기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보이나? 이류 도장으로 보여?”
“공평치 않아.”
“뭐가 말이지?”
“내 검은, 목검 따위로는 제 위력이 나오지 않아!”
“그래?”
“진검 승부다! 여기도 도장이니 진검이 있겠지?”
“있기는 하지만, 당신 손에 맞을지는 모르겠어.”
“상관없다.”
벌떡 일어난 마사키는 차가운 눈빛으로 도현을 응시했다.
“나와 진검으로 겨룰 마음이 있나?”
“음.”
도현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마사키가 피식 웃음을 비쳤다.
“네 검술 솜씨가 의외로 뛰어나서 나도 감동했다. 하지만 생과사가 찰나에 갈리는 진검의 세계는 그런 가벼운 검술 솜씨가 통하지 않아.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자는 가진 실력의 반의반도 발휘하기 힘들지.”
마사키는 머리에 난 혹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 갔다.
“난 젊었을 적, 실제로 진검으로 여러 사람을 베어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검이 냉혹해.”
“나도 악명을 떨칠 만큼 사람을 베어 본 적이 있어.”
“푸하하하!”
마사키는 도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진검으로 나와 승부를 겨루겠다는 말이지? 죽을 수도 있어. 아니면 불구가 되든가. 그래도 좋나?”
“내가 죽으면 당신은 차가운 감방 신세를 지게 될 텐데.”
“그래도 난 상관없다.”
“저기 선생님, 이쯤에서 그만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백 관장님도 그렇고요. 진짜 칼로 싸우면 문제가 너무 커지지 않겠습니까?”
야스오는 이들의 피 튀기는 싸움에 연루돼 방송국에서 잘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넌 빠져. 난 반드시 이자를 이기고 말테니까. 검 가지고 와!”
“기고만장이군.”
“뭐야?”
“진검 승부를 그렇게 하고 싶은가 본데. 좋아, 따라와. 진짜 검이 뭔지 보여 주지.”
냉혹한 도현의 눈빛에 마사키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뭐야 이 자식, 사람 수백은 베어 본 눈빛인데?’
지하 도장으로 마사키를 데리고 온 도현은 관장실에 들어가서 날이 파랗게 선 진검 두 자루를 가지고 나왔다.
“소원대로 해 줬으니, 실력을 발휘해 봐.”
차아앙.
도현이 검을 뽑으며 감정 없이 말했다.
“오냐! 한번 끝까지 해 보자!”
진검을 뽑은 마사키는 도장 중앙에 서 있는 도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긴 탐색전이 지루해질 무렵, 마사키가 차가운 기합 소리를 뱉어 내며 도현의 허리를 노리고 들어갔다.
“검 끝이 떨리고 있군.”
도현이 냉정히 말하며 마사키의 검을 가볍게 튕겨 냈다.
“그리고 몸이 굳어 있어.”
채채챙!
“이, 이놈!”
마사키는 가까스로 얼굴로 향하는 도현의 검을 막아 내며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완벽히 막아 낸 게 아니었다.
사아아악.
그의 옷깃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실수를 했군. 원래 목을 노렸는데.”
도현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채에엥! 챙챙!
마사키는 도현의 검을 막기 바빴다. 반격을 하려 해도 도저히 빈틈이 없었고, 갈수록 도현의 검에 실린 힘이 강해져서 손아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그, 그만하십시오, 백 관장님!”
지하 도장에 같이 온 야스오가 당장이라도 목이 떨어질 것 같은 마사키의 위기를 보며 도현에게 부탁했다.
“조용히 하세요. 진검을 뽑게 했으니, 그 말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 당신이 내 검을 받을 건가?”
도현이 힐끔 쳐다보자 야스오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눈빛이 어찌나 찬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기하라 마사키, 당신의 팔다리를 하나씩 자른 다음, 마지막으로 목을 잘라 주겠어. 호검술 도장을 우습게 보는 널 이 칼로 죽여 버리겠다고!”
마사키는 거대한 백호 한 마리가 자신을 덮치는 환영을 보았다.
투명한 발톱과 이빨을 가진 백호의 성난 눈을 마주한 순간, 그는 전의를 상실하고 심장이 급격히 뛰었다.
처음으로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앵!
마사키의 검을 옆으로 날려 버린 도현이 냉정한 얼굴로 마사키의 온몸을 난자했다.
“으아아악! 안 돼!”
그 끔찍한 모습에 야스오가 고개를 돌렸고, 마사키는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잠시 후, 지하 도장이 잠잠해졌다.
‘죽었나?’
야스오는 슬며시 싸우던 곳을 확인했다.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 마사키는 혼이 나간 얼굴로 도장 벽에 기대 앉아 있었고, 도현이 그의 목에 검을 대고 서 있었다.
주변엔 도현이 정교한 검술로 잘라 낸 마사키의 옷자락들이 사방에 흩어져서 나뒹굴었다.
상처를 입히지 않고 어떻게 저리 했는지 야스오가 보기엔 불가사의했다.
“스기하라 마사키, 아직도 더 승부할 게 남아 있나?”
“…….”
“대답해!”
“없다.”
“패배를 인정하나?”
“인정한다.”
차가운 눈빛으로 마사키를 한동안 응시하던 도현은 진검을 거두고 근처에 있는 목검을 집어 들었다.
“좋아. 인정했으면 이제 당신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근처 병원에서 머리를 꿰매고 온 용주는 지하 도장으로 달려갔다가 문이 잠겨 있자 다시 5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도현아, 도현아!”
깨진 사진 액자를 정리하고 있던 도현이 뒤를 돌아봤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용주가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치료는 잘하고 왔냐?”
“어? 어. 근데 이 자식 어디 갔냐?”
“스기하라 마사키? 갔지.”
도현은 휴지통에 액자 조각들을 넣으며 대꾸했다.
“젠장, 좀 더 빨리 올걸. 그 자식 어떻게 했어?”
“따끔하게 혼내 줬어.”
“따끔한 정도로는 안 되는데.”
불만 가득한 용주의 표정에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기어서 도장 건물을 나갔으니까. 당분간 속에 든 멍 때문에 꽤 힘이 들 거야.”
“그랬어? 그럼 다행이고. 생각할수록 어찌나 분하던지.”
용주가 도장 바닥에 두 다리를 펴고 앉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홍영 씨는?”
“곧 올 거야. 내가 좀 빨리 뛰어왔거든. 아, 머리야.”
약간의 뇌진탕 증세가 있는 용주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붕대 감은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 새끼 머리도 피나게 했지?”
“피는 안 났어도 훨씬 더 고통스러울 거다.”
“도현아, 앞으로 내게 잠은 없다. 최단 시간 안에 지금보다 열 배는 강해져서 그 마빡이 자식 사냥하러 간다.”
“지금도 열심히 수련하고 있잖아. 급하게 생각하지 마.”
“안 돼. 너 이계에 가 있을 동안 저런 자식 또 오면 이번엔 내가 이겨야지.”
용주의 대답에 도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왼팔을 봤다. 타투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용주야, 당분간 나 이계에 못 갈 것 같다.”
“뭐?”
용주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도현의 왼팔을 쳐다봤다.
“젠장, 벌써 타투가 사라졌어?”
“아쉽지만 그렇게 됐다.”
“게이트 몇 번 열지도 않았잖아?”
“생각해 봤는데, 게이트를 열지 않아도 이계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그 자체만으로도 타투의 에너지가 사라지는 것 같아. 이번에 상당히 오래 가 있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용주가 말끝을 흐릴 때, 홍영이 약간 화난 얼굴로 등장했다.
“용주 씨, 병원에서 그렇게 뛰어가면 어떡해요? 머리 아픈 사람이. 좀 맞아야겠어요.”
“미안해요, 홍영 씨.”
용주가 두 손으로 싹싹 빌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도현 옆에 앉았다.
“일본 검객은 잘 해결했어요?”
“적당히요.”
“방송 문제 때문에 온 것 같은데,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정말 놀랐어요. 어떻게 그렇게 딱 맞춰 온 거예요?”
홍영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도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임이 오니까 홍영 씨 얼굴에 미소가 살아나네. 도현이도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용주의 농담에 도현과 홍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실은 타투가 사라지려고 하기에, 넘어왔어요.”
“네에?”
놀란 홍영이 미소를 지우며 도현의 팔을 살폈다. 타투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전에 한번 경험한 일이라 도현과 용주는 아쉬움 속에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홍영은 그러지 못했다.
금세 눈가에 눈물이 고여서 보는 도현을 당황스럽게 했다.
“괜찮아요. 더 이상 구하기 어려울 거라는 조 박사님의 예상과 달리 네팔에서 스톤을 찾아냈잖아요. 또 다른 스톤도 노력하면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슬퍼할 필요 없어요.”
보고 싶던 홍영이 슬픈 얼굴을 짓는 게 도현은 싫었다.
“도현이 말이 맞아요. 찾아보면 어딘가에 또 있을 거예요. 그것도 이번에는 훨씬 더 큰 녀석으로.”
용주가 도현을 거들며 말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계가 위험한 곳이지만 도현 씨에게는 여러모로 중요한 곳이잖아요.”
눈물을 훔친 그녀는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계에서는 어땠어요?”
“그래, 도현아. 이번엔 어땠냐? 그 무법자 도시란 곳에서 비열한 자식들과 다툼도 꽤 벌였냐?”
“그게 말이지.”
도현은 자신에게 악명이 붙었던 그날 밤의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을 잠시 하다가 결국 그 이야기를 포함해서 얘기를 풀어 갔다.
그가 경험한 일이 적지 않아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도현의 얘기가 워낙 가슴 졸이며 듣게 되는 것들이 많아서 둘은 그의 얘기에 빠져 들어갔다.
“그 블리잭이란 새끼 꼭 돌아가면 잡아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놔. 뭐 그런 비열한 새끼가 다 있어?”
“와아! 몬스터 가죽이 그렇게 비싸? 돈 좀 되겠는데?”
“잘했다. 이계에도 네 제자 한 명쯤 두면 나중에 이용해 먹기 좋을 거야. 심부름도 시키고. 아니, 뭐 꼭 그러라는 건 아니지만, 그 에드라는 녀석 싹싹하니 괜찮네.”
도현의 얘기를 들으며 신이 난 용주가 드문드문 말을 하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마룻바닥을 탁 치며 일어났다.
“뭐야? 내공이 더 이상 안 늘어난다고!”
“도현 씨, 잘못 안 거 아니에요?”
홍영까지 놀라며 급히 물었다.
“여러 번 확인한 사항이야.”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아무래도 내가 담을 수 있는 내공의 크기가 현재는 이 정도 수준인 것 같아.”
“내공의 그릇을 키우면 되겠네?”
“그렇지. 근데, 그 방법을 정확히 모르겠어. 막연하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건, 내 무예 경지가 오르거나 하면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용주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어차피 이계에서 그 상태로 더 있어 봤자, 내공은 늘지 않았겠구나.”
“응.”
“하아, 그래서 그다음은?”
폭설이 내리던 날 닥쳐온 내공의 벽 이야기에 짜증이 솟구쳤던 용주는 홍영과 시선을 교환하다가 다시 뒷이야기를 물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들은 도현이 경험한 피 냄새 가득한 도시의 전투에 몸이 굳어져 꼼짝할 수가 없었고, 살기 위해 강을 넘어 혹한의 추위 속에 눈밭을 뒹굴었다는 얘기는 눈물 없이는 듣기 어려울 만큼 처절했다.
“아, 염병할 자식들. 도현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하지만 힘든 상황만 있었던 건 아니야. 아버지가 지리산 도인에게 전수받았던 단전호흡법, 그 올바른 사용법을 그 와중에 깨닫게 됐거든.”
“올바른 사용법요?”
홍영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 단전호흡법은 앉아서 수련하는 게 아니었어요. 적당한 움직임 속에 호흡을 유지하는 동공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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