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디 임팩트 5권 20화
“형.”
“왜?”
“어쩌면 형 다친 어깨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방법을 발견했는데,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한번 해 보실래요?”
“농담 그만해라. 큰 병원에서도 맛이 갔다고 한 어깨야.”
“맞아요. 농담이에요. 하지만 1프로의 가능성은 존재하는 농담이에요.”
진지해진 도현의 말투에 장철호가 몸을 돌렸다.
“1프로의 가능성?”
“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수련해 온 단전호흡법 아시죠?”
“알지. 백 관장님이 돌아가신 사모님하고 대판 싸우고 지리산으로 수련 가셨다가 우연히 만난 도인에게 배웠다는 그 호흡법?”
장철호도 예전에 배워 두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간신히 들숨과 날숨을 편안하게 내뱉으며 호흡을 할 수 있게 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1년 해도 아무 효과가 없자, 더 이상 하지 않았고, 도장을 떠나 격투계로 진입했을 때는 머릿속에서 그 호흡법을 완전히 잊게 됐다.
“그런데 그 단전호흡법은 왜?”
“제가 이번 수련 중에 그 호흡법이 생각보다 좋다는 걸 깨닫게 되었거든요.”
도현은 호심공을 움직이면서 수련하면 상처의 통증이 줄고, 다친 곳도 서서히 회복이 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을 했다.
“정말이야? 호흡법, 아니 그러니까 그 호심공에 그런 놀라운 효과가 있었어?”
“저도 우연히 경험하고 나서 상당히 놀랐어요. 호심공을 통해 흡입된 기가 체내를 돌며 상처 부위를 보듬어서 점점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 같더라고요.”
도현은 희망에 찬 장철호의 눈빛을 보며 흐뭇한 마음으로 말을 계속했다.
“형, 그때 제게 배운 그 호흡법, 기억하세요?”
“아니, 다 잊어버렸는데.”
장철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몸으로 익힌 걸 다 잊을 정도면 도장을 나가서 아예 생각도 안 했다는 거군요.”
“그렇게 됐다. 다시 알려 줄 거지?”
“글쎄요. 한번 생각해 보죠.”
“이 자식이!”
장철호가 달려들자 유령처럼 뒤로 스르륵 움직인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형, 밖에 나가서 술 한잔 해요. 홍영 씨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호태식은 차 안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필리핀에 있는 서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접니다.”
-무슨 일이야? 아까 통화했잖아.
“할 말이 있어서요. 아니, 근데 옆이 왜 이리 시끄럽습니까?”
-술집에서 싸움이 났어. 무식한 자식들이, 총질을 하고 있네. 잠시만, 술집 좀 빠져나가고.
총소리가 나는 가운데 전화는 뚝 끊겼고 얼마 뒤, 서지철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아까 말입니다.”
호태식이 도현이 얘기를 꺼내려 할 때 서지철이 급하게 그의 말을 막았다.
-태식아, 나 총 맞았다.
“예? 총요?”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까 정말. 술집 빠져나오다가 싸우던 자식들이 갈긴 총알이 내 다리를 스쳐 지나갔어.
“운도 지지리도 없네요.”
호태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움직일 수는 있어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피도 많이 나고, 젠장. 아무래도 병원에 가 봐야겠어. 어? 헤이! 이봐! 거기 멈춰! 야 이 새끼야!
통화 도중 들리는 서지철의 다급한 목소리와 욕설에 호태식은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휴대폰을 귀에 바짝 댔다.
“형님, 무슨 일 또 났습니까?”
-하아, 하아. 이런 양아치 같은 새끼들을 봤나.
“무슨 일인데 그래요?”
-총 맞고 술집 밖에서 쓰러져 있었는데, 어떤 놈들이 내 여권이 든 가방을 훔쳐 갔어.
들을수록 답답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아니, 술집은 왜 가셔서는.”
호태식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소문난 술집이라기에 한번 놀러 와 봤지. 백도현 그 자식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도 좀 풀려고 했고.
끙끙대며 얘기를 하는 서지철에게 호태식이 운전석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병원 가 보시고요, 나중에 연락 주십시오.”
-야, 근데 왜 전화한 거야?
“아니에요. 내일 통화하죠.”
-괜찮으니까 말해 봐. 어서.
호태식은 옆에 있는 물을 마시며 대답했다.
“백도현이 나타났어요.”
-뭐? 그 녀석이?
“조 사범 대신 우리를 가르쳤어요.”
-드디어 나타났군, 백도현.
“그런데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일찍 오시기 힘들겠어요. 다리를 다쳐서.”
-음, 며칠은 필요할 것 같은데.
서지철이 침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도현이 나타났는데,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불안해. 그 녀석 갑자기 훅 하고 사라지거든. 마술사처럼.
“설마 또 그러려고요. 이제 본격적인 겨울철인데, 도장에 있겠죠.”
-장담할 수 없어. 내가 내일이라도 도착해서 손을 쓰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데.
아쉬움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호태식이 마음에 준비한 말을 조용히 꺼냈다.
“형님, 기분 상하실 말씀 좀 할게요. 이번 백도현 관장 의뢰 말이죠. 이거 그냥 포기하시죠?”
-너 뭐라고 했어, 지금. 포기?
“아까 봤는데, 등에 소름이 쫘악 흐르더라고요. 제가 육감이 남다르잖습니까. 몸에서 왠지 피 냄새가 질퍽하게 느껴지는데요. 한 시간 동안 교육받는 내내 겁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인마. 피 냄새라니? 너 잘못 본 거 아니야?
“집안에 신 내림 받은 분이 두 명입니다. 큰누나는 작두 타고 있구요. 아시잖아요, 우리 집안.”
호태식은 다시 물을 마시며 거듭 말했다.
“포기하십시오. 저 사람 잘못 건드렸다가는 우리 둘 다 제명에 못 산다고요.”
-네 육감이 다 정확했냐?
“그건 아니지만, 이번엔 진짜라니까요. 겉모습과 달리 속은 칼 든 귀신이 숨어 있다니까요.”
-나는 귀신도 잡는 프로 해결사다. 겁나면 너는 뒤로 빠져.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서지철이 화난 음성으로 전화를 끊자 호태식은 한숨을 내쉬며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유료 주차장에서 걸어 나온 그는 도장이 있는 건물 쪽을 지그시 응시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훤칠한 키의 도현이 인상 험악한 장철호와 미모가 뛰어난 홍영을 좌우로 두고 가까운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민이네, 거참.”
“한집에 살면 결혼해야지?”
술이 제법 들어간 장철호가 홍영이 먹기 좋게 잘라 놓은 삼겹살을 먹으며 툭 말했다.
“형, 아직 그런 거 아니에요.”
도현이 홍영의 얼굴을 슬쩍 확인하며 당황한 얼굴로 눈짓을 했다.
“사내자식이 여자를 데리고 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럼 결혼도 안 할 생각으로 홍영이가 네 뒷바라지하게 만든 거야?”
도현이 없는 동안 홍영은 용주와 함께 도장을 지켰고, 도현이 살던 빈집을 지켰다.
장철호에게는 따뜻한 눈빛과 저녁 수련 후 출출한 그를 위해 간식도 제공했다.
보육원 출신인 장철호에게는 홍영이 어느덧 친동생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말해 봐! 결혼할 거야 안 할 거야?”
마치 여동생을 위해 나서는 오빠처럼 장철호가 소주를 마시며 도현을 압박했다.
“오빠, 그만하세요.”
홍영과 장철호는 의남매를 맺은 듯 호칭도 가족처럼 서먹함이 없었다.
“도현 씨 말이 맞아요. 아직 우린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럼 안 되지. 용주 말 들어 보니까, 저 건물 살 때도 홍영이 네가 큰 도움을 줬다면서?”
장철호는 건물 관리까지 하는 용주가 이상해서 물어봤다가 건물주가 도현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었다.
그때 용주가 핑계 댄 게 홍영의 존재였고, 도현은 졸지에 그녀의 도움으로 건물까지 갖게 된 행운아가 돼 버렸다.
“홍영이가 이유 없이 널 이렇게 도와주고 있겠냐? 너도 중학생일 때 내게 상담을 했잖아. 여기 홍영이가 마음에 들어와서 기분이 이상하다고. 사춘기 감성이 다 사라진 거야? 아니지?”
술이라도 취했는지 장철호의 말은 거침없었다.
“형이 그런 말 하니까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네요. 그만하세요, 형.”
“그러니까 말해! 결혼할 거지?”
도현은 난감한 기색으로 옆에서 먹기 좋게 고기만 자르고 있는 홍영의 얼굴을 훔쳐봤다.
자신과 홍영 사이에는 서로를 위하고 좋아하는 감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둘만 있을 때 미묘하게 흐르는 감정선들을 모으면 종국엔 사랑으로 이어지고 결혼까지 연결될 수도 있다고 생각도 해왔다.
하지만 아직 그는 그녀의 마음을 확실히 장담할 수 없었고, 복수를 위해 가야 할 험난한 길이 그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점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가 망설일 때 조용히 고기만 자르던 홍영이 가위를 내려놓으며 도현을 쳐다봤다.
“오빠, 부담 주지 마세요. 도현 씨는 할 일이 많아요. 그렇죠?”
그녀의 눈이 웃고 있었다. 도현은 저 웃는 모습을 영원토록 지켜보고 싶었다.
말없이 서로 마주 보고 웃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장철호가 눈을 깜빡거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거 왠지 나만 뒷북치는 기분인데.”
머리를 긁적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어디 가세요.”
“고시원. 내일 새벽 일찍 인력 사무실에 가 봐야 돼. 파주에 가서 일을 하기로 해서 말이야.”
몇 시간이라도 잠을 자고 나가려면 지금 고시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너희들은 더 있다 나와. 형 먼저 갈게.”
“아니에요, 형. 같이 가요. 홍영 씨, 그만 가요.”
“네.”
도현이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하는데 장철호가 왼팔로 그의 앞을 척하니 가로막았다.
“형이 낸다.”
“제가 낼게요.”
“너 건물 있다고 형 무시하냐?”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형도 참.”
“막노동하면서 열심히 모은 돈이다. 가치 있게 쓰자. 사장님, 얼마죠?”
기어이 음식값을 낸 장철호는 식당 밖으로 나오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동생들 있고, 이렇게 술도 마시고. 내일은 일거리도 있고. 또, 도현이가 전수해 준 호심공도 있고.”
크게 한번 웃은 그는 다정히 서 있는 도현과 홍영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기 좋다. 간다. 내일 보자.”
“형, 우리 집으로 가요. 꼭 고시원 갈 필요 없잖아요.”
“시끄러, 인마. 난 고시원이 좋아.”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의 단단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도현은 홍영이 살며시 팔짱을 껴 오자 모른 척 그녀와 팔짱을 했다.
“철호 형을 경제적으로 돕고 싶은데, 쉽지 않겠어요. 자존심도 있고.”
“그냥 지켜봐요. 오빠는 스스로 일어서고 싶은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그녀와 함께 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무척 찼지만 그녀와 함께 걸으니 전혀 추운 줄 몰랐다.
“이계에서 쫓길 때 많이 고통스러웠죠?”
“육체보다는 정신적으로 조금 힘들었어요. 매순간 끝이라는 생각과 격렬하게 싸워야 했으니까요.”
추위 속에서 떨며 도망을 쳐야만 했던 도현은 그때 일을 회상하며 담담히 말했다.
“고마워요. 살아 돌아와서.”
“나도 고마워요. 함께 있어 줘서.”
둘은 서로 몸을 의지했고, 어느 순간 도현이 그녀를 업은 채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홍영 씨, 언젠가 우리…… 진짜 함께 살아요!”
도현의 넓은 등에 머리를 기댄 홍영은 한참 대답을 않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해방
홍콩에 거주하는 지인의 연락을 받은 한석호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파윤거리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밤늦은 시간이라 파윤거리 재래시장은 노점상을 비롯해 건물 안쪽에 진을 친 가게들도 모두 문을 닫아서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등에 작은 배낭을 멘 그는 재래시장 거리를 묵묵히 걷다가 다소 흉물스럽게 보이는 오래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가 주변을 예리하게 쓸어 볼 때, 가로등과 달빛이 비치지 않은 사각 지역의 어둠 속에서 중년의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왜 그렇게 조심해서 다니나?”
한석호의 물음에 작은 키의 중년 사내 유금찬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않습니까?”
“쓸데없이 그런 곳에 있으면 더 의심받아.”
“보이던가요?”
“그래.”
“다음엔 더 조심해야겠네요.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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