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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127화 (127/575)

[127] 디 임팩트 6권 2화

도현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주성하의 두 눈을 응시했다. 간신히 기이한 검술을 깨트리기는 했지만, 아직 복면인은 그 밑천을 다 들어내지 않은 것 같았다.

‘더 이상 이것으로는 상대하기 힘들겠어.’

사실 도현의 수중에 검이 있었다면 눈을 현혹시키는 기이한 검술을 피하며 어렵게 상대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가진 검술과 내공의 힘으로 맞상대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검이 필요해.’

복면인의 능력은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 보였다.

“내 몸에 손을 댔으니 편하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이를 갈며 다가오는 주성하를 보며 뒤로 물러나던 도현이 빠르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주성하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도현이 향하는 곳은 벽으로 둘러싸인 주방이었기 때문이다.

주방에 온 도현은 싱크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요리를 좋아하는 유금찬이 남겨 놓은 주방용 칼들이 다양한 크기로 가지런하게 칼꽂이에 꽂혀 있었다.

도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그중 날이 잘 선 길쭉한 칼을 두 자루 꺼내 손에 쥐었다. 부엌칼이지만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돌아선 그는 주방 입구에 서 있는 주성하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제 제대로 한번 해볼까?”

그가 든 부엌칼 끝에 주성하 못지않은 밝은 검기가 솟아났다.

쓰러져 있던 한석호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머리가 멍하니 온 세상이 흐리게 느껴졌고, 귀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그 소리는 천둥처럼 크게 다가왔다.

주성하의 내공이 실린 발길질에 머리를 제대로 얻어맞고 기절을 한 그는 깨어나며 자신이라는 존재를 망각하고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잘린 귀에서 전달되는 지독한 통증이 그를 현실로 빠르게 인도했다.

‘그놈!’

복면인을 떠올린 그는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인식하며 누운 상태로 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자는 보이지 않고 거실 쪽에서 금속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는 며칠 전 총상을 입었던 다리를 절뚝이며 거실로 향했다.

몇 미터 안 되는 그 짧은 거리를 지나는 동안 금속성은 더욱 격렬해졌고, 한석호는 심장이 뛰었다.

‘굉장한 검의 울음소리다!’

수십 년간 사라지고 묻힌 무예를 찾아내며 검을 익혀 왔던 그는 여태껏 이런 미친 검의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의 혼을 갉아먹는 것 같은 오싹하고 무서운 소리였다.

긴장된 마음으로 거실이 보이는 곳에 도착한 그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아니, 백 관장이!’

뜻밖에도 미친 검의 울음소리를 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도현이었다. 그는 짧은 부엌칼을 양손에 들고 장검을 든 복면인과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 들린 칼이 복면인의 검과 부딪칠 때마다 사방으로 무서운 검의 울음소리를 퍼트리고 있었다.

도현은 근처에 한석호가 나타났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성하 역시 한눈팔 새가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엔 정교하기 그지없는 도현의 검술에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내공이 깊고 검술은 뼈에 사무치는 차가움을 내포하고 있다. 이 녀석의 검은…… 강해!’

이성을 잃고 도현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주성하의 다리엔  그 대가로 얻은 상처가 선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그 상처로 인해 주성하는 냉정함을 되찾고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며 도현과 숨 막히는 대결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물여섯 번의 공방을 벌인 주성하는 도현의 칼을 피하며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달도 두 조각 내 버릴 것 같은 굉장한 기세의 그 검은 주성하가 익혀 온 검술의 정수가 일부 담긴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양쪽에서 몰아치는 도현의 부엌칼이 그 거대한 기세를 모조리 잘라 내며 주성하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고, 화들짝 놀란 주성하는 검의 방향을 바꿔 도현의 부엌칼을 막아 내야만 했다.

서로 콧바람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둘의 몸에는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갔고, 그럴수록 도현의 부엌칼은 더욱더 미친 듯이 날뛰며 천 년 전통의 검선문이 자랑하는 현묘한 검술을 상대해 갔다.

얼굴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호검술의 달인인 도현은 지금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는 주성하의 검을 정면으로 맞상대할 수가 없었다.

내공은 자신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고, 복면인의 손에서 피어나는 수준 높은 검술은 그도 처음 목격하는 대단한 것이었다.

마치 절전된 호검술의 후반 4식을 모아 두면 저런 검법이 태어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복면인의 검은 변화무쌍한 가운데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을 지속적으로 풍기고 있었다.

‘부엌칼이 아니라 장검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도현은 위에서 떨어지는 검을 부엌칼을 교차해 막으며 앞차기로 주성하의 턱을 걷어차 올렸다.

“선배님, 검 없습니까?”

도현의 외침에 넋을 놓고 둘의 박진감 넘치는 싸움에 빠져 있던 한석호가 정신을 차렸다.

그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무예에 빠져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자신의 처지도 잊고 그만 두 고수의 대결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검은 없고, 저쪽 방에 자동소총이 보관되어 있던데, 가지고 오지. 조금만 그 녀석을 붙잡고 있게.”

한석호의 말에 주성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빌어먹을 자식들! 무공을 익힌 녀석들이 총을 사용하려고 하다니!”

“부엌칼을 든 사람과 상대하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넌 끝이다.”

차가운 말을 내뱉은 한석호는 쓰러져 있는 유금찬을 힐끔 본 뒤에 유금찬이 사용하는 방을 향해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그 순간 마음이 급해진 주성하가 한석호를 죽이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앞서 도현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날이 많이 상한 부엌칼을 소리 없이 휘둘렀다.

주성하의 가슴에 길게 상처가 났다.

“젠장!”

간신히 도현과 평수를 유지하던 주성하가 욕설을 내뱉으며 제법 깊숙이 난 가슴 상처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어 봤자 득이 될 게 없을 상황이었다.

그는 쫓아오는 도현을 뿌리치며 몸을 날렸다.

베란다 유리창이 박살이 났고, 그는 둥글게 만 몸을 활짝 편 후, 허공에서 공중회전을 하며 밑으로 부드럽게 떨어졌다.

척.

바닥에 사뿐히 착지를 한 주성하는 고개를 들어 5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도현을 차갑게 노려보다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자는 갔나?”

“네, 선배님.”

뒤돌아선 도현은 유금찬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한석호에게 다가갔다.

“총은요?”

“없어. 한번 해 본 소리야.”

허리를 편 그는 피로 붉게 물든 도현의 흰 와이셔츠를 보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고맙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

“아닙니다, 선배님.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궁금하겠지만 일단 이 친구 먼저 병원에 데리고 가야겠네. 자네가 차를 좀 운전해 주겠나?”

한석호의 손에는 유금찬의 방에서 총 대신 가지고 나온 자동차 키가 들려 있었다.

그들이 간 병원은 며칠 전 한석호가 총상을 입었을 때 수술받은 곳이었다. 그곳의 병원장은 유금찬의 고객 중 한 명으로 암시장을 통해 물건을 수집하는 골동품 애호가였다.

차 안에서 정신을 차린 유금찬은 턱뼈가 조각난 얼굴로 수술실에 들어가며 손을 힘없이 흔들었다.

귀가 잘린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한석호에게 치료를 받으라고 손짓을 한 것이다.

비록 암시장이라는 위법한 공간에서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15년은 적이라도 친구로 삼을 만한 긴 시간이었기에 귀가 잘린 한석호가 그는 걱정이 된 것이다.

턱을 다쳐 말을 못하는 유금찬은 그렇게 손짓을 하며 수술실로 사라져 갔다.

“가시죠, 선배님. 선배님도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수술실을 말없이 보며 서 있던 한석호는 근처에서 눈치를 보는 간호사를 쳐다보다가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네. 자네도 치료가 급한데 말이야.”

도현의 몸에는 칼에 베인 상처가 적지 않았다. 물론 깊지는 않았지만, 치료가 늦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붕대로 상체를 여러 번 감은 도현은 수술을 마치고 병실 침상에 누워 있는 한석호 곁에 앉았다.

“봉합 수술이 안 돼서 아쉽습니다.”

“괜찮아. 귀 하나 없다고 해서 사는 데 지장 없으니까.”

검에 잘린 그의 귀는 주성하의 발에 완전히 짓이겨져서 봉합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군.”

“다리에 입은 총상은 어떻게 된 겁니까? 혹시 아까 그자와 관련이 있습니까?”

한석호는 붕대를 새로 감은 허벅지 총상 부위를 내려다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아주 내 꼴이 우습게 됐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병원 천장을 잠시 올려다보던 그는 도현을 응시했다.

“미안하네. 내 싸움에 끌어들이고도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아서.”

한석호는 상체를 세워서 침상에 앉았다.

“원인은 한 권의 책 때문이었어.”

“책요?”

“골동품을 은밀히 취급하는 암시장이 있네. 내가 종종 이용하는 곳이지. 며칠 전 그곳에서 고서를 한 권 샀는데, 그것이 화근이었지.”

한석호는 암시장을 나와 술집을 가다 습격받은 일과 도현이 아파트에 도착하기 전에 복면인과 싸웠던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도현은 복면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한석호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댄 죄가 있다고 언급했었다.

‘그게 고서였나 보군.’

도현은 복면인의 뛰어난 실력을 생각하며 가슴에 두른 붕대를 내려다봤다.

이계에서 검술 실력이 상승해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번 싸움에서 크게 낭패를 봤을지도 모른다. 그런 고수가 노릴 만한 책이 어떤 내용인지 도현은 궁금했다.

“명나라 시대에 제작된 ‘기예 잡술서’라는 책이라네.”

도현이 궁금해하는 것 같아 한석호는 그 고서에 대해 설명을 이어 갔다.

“사람의 신체를 단련시키는 일종의 외공 수련법이 담겨져 있었지.”

“외공이라면, 피부를 단단하게 하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주 관심 분야는 아니지만 수련 방법이나 그런 게 흥미로워서 연구나 해 보려고 암시장에서 구매를 했지. 사실, 원래는 사지 않으려고 했어. 수십 년간 책을 모으며 공부해 온 나는 그런 책 태반이 별 쓸모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럼 왜 사신 겁니까?”

도현의 질문에 한석호는 담담히 답했다.

“유금찬이 골동품 암시장에서 일을 그만둔다고 하더군. 마지막일 것 같아서, 한 권 사 줬지.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워했다.

‘한번 그 책을 봤으면 좋겠는데.’

뛰어난 고수가 노릴 정도면 특별한 뭔가가 담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 책은 복면인의 품 안에 들어간 뒤였다.

“자네, 그동안 많이 발전했더군. 몇 달 안 되는 사이에 말이야.”

복면인을 떠올리며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도현이 정신을 차리며 한석호를 봤다.

“네?”

“아까 싸움 말일세. 쌍두봉 골짜기에서 나와 검을 겨룰 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어. 검술의 깊이와 내공이 이미 나를 훌쩍 뛰어넘었더군.”

“아닙니다, 선배님.”

“겸손해할 필요 없네. 복면을 쓴 그자의 검술은 옆에서 내가 보기에도 놀라웠으니까. 그런 자를 상대로 부엌칼을 들고 싸우다니, 훌륭했어.”

칭찬을 아끼지 않던 그는 잠시 말을 멈추며 물끄러미 도현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기연이라도 얻었나? 아니면 자질의 차이인가?’

솔직히 몇 달 사이에 자신을 뛰어넘은 도현이 믿기지가 않았다. 젊은 나이에 도현이 도달한 검의 경지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둘의 시선이 병실 입구로 향했다. 턱 수술을 끝낸 유금찬이 이동식 침대에 눕혀진 채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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