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디 임팩트 6권 4화
그는 책 겉표지 사이에 얇게 숨겨져 있던 누런 양피지를 찾아냈다.
그의 목적은 기예 잡술서 상의 외공 수련법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한 장의 양피지였다.
도현에게 당한 상처에 분노하던 그는 그 양피지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둘째 사형, 미안합니다. 이건 이제 내 것이 됐네요, 흐흐흐, 으하하하하!”
세상이 떠나가라 크게 웃던 주성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납니다. 상처를 좀 입었는데 와 주셔야겠어요.”
전화를 끊은 그는 엉망이 된 집 안을 둘러보다가 집어 던진 검을 찾아서 벽에 걸어 놨다.
“대체 그 녀석들의 정체는 뭐지? 우리 문파와 비슷한 곳이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건가?”
주성하는 젊어 보이는 도현의 대단한 무예에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았다.
한동안 검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의사가 찾아오자 문을 열어 주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겠지.’
“고맙습니다.”
야간 당직을 서고 있는 여간호사가 건네준 프린트를 받으며 도현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한석호와 유금찬이 잠들어 있는 동안 그는 메모리 카드에 담겨져 있는 기예 잡술서를 병원 사람에게 부탁해 종이에 출력한 것이다.
“이제 가서 잘 거죠?”
주근깨가 있는 젊은 여간호사의 말에 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원래 이런 거 안 해 주는데, 특별히 해 드리는 거예요. 얼른 가서 주무세요. 새벽이에요.”
“수고하세요.”
도현이 뒤돌아서자 주근깨가 있는 여간호사는 옆에 있는 동료 간호사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멋있게 생겼지?”
“엉뚱한 생각하지 마. 아까 병원장님 하신 말씀 못 들었어?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우리에게 주의를 주셨잖아.”
턱이 뾰족한 여자 간호사의 경고에 말을 꺼낸 간호사는 입술을 샐쭉이며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도현의 등을 응시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병실에 조용히 들어선 도현은 창가 쪽 자신의 침대로 다가가 벽에 붙은 간이 등을 켰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작은 불빛에 의지해 도현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손에 들고 있는 기예 잡술서 사본을 살폈다.
오래된 고서를 사진으로 담았지만 글자 하나하나가 잘 보일 만큼 선명히 찍혔다. 그래서 종이에 출력된 이미지는 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서른 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얇은 책자인 기예 잡술서는 반은 글이고 반은 인체 혈도가 그려진 그림 형식으로, 목판이 아닌 필사본이었다. 어쩌면 복면인이 가지고 간 고서가 유일본일지도 모른다.
“정말 악필이군.”
한자로 쓰인 글은 제멋대로 휘갈겨져 있어서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다만, 인체도만큼은 비교적 성의 있게 그려져 있었다.
도현은 한 장 한 장 넘기며 주의 깊게 내용을 정독했고, 때때로 미간을 찌푸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림이 반인 얇은 책자를 다 읽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흠,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걸까?”
마지막 장까지 읽은 도현은 프린트된 기예 잡술서 사본을 침대에 내려놓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책은 강철같이 단단한 몸을 만들면서 황소도 집어 던질 만큼 강인한 체력과 근력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그림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었다.
글을 쓴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신비해서 태어날 때부터 강한 기운이 몸 안에 내재되어 있는데, 평생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했다.
그는 타고난 기운, 즉 선천지기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36곳의 혈도를 자극해야 한다고 했다.
혈도가 자극받으면 잠재된 힘이 깨어나고, 그 주변의 뼈와 근육 들이 영향을 받아 종국에는 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지며 괴력도 발휘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방법은 그림에 표시된 인체 36곳의 혈도와 그 주변을 순서에 따라 몽둥이로 강하게 후려치는 무식한 방법이었다.
맞고 눈물이 나오지 않는 타격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며 강조하는 대목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확실히 때리라는 말이었다.
“결국은 매일매일 매타작을 받으라는 건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발바닥부터 등에 이르는 전신 36곳의 혈도를 책에 따르면 숨 몇 번 쉴 동안의 시간 안에 모조리 자극을 줘야 한다고 한다.
웬만큼 손이 빠른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했고, 거기에다 정확도도 있어야 했다.
“혼자서는 익히기도 불가능해.”
뼈 없는 연체동물이 아닌 이상 등과 엉덩이 부근 등 손이 가지 않는 부위를 때릴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대신 수련자를 때려 줘야 한다는 의미다.
효과가 바로 나타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수련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기간 동안 매일매일 맞고 살아야 한다.
“독특하고 재밌는 수련법이야.”
도현은 피식 웃으며 내려놨던 종이를 들어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복면인이 이 책을 노렸다면 적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했다.
그는 재차 기예 잡술서를 정독한 뒤 침상에서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올리자 새벽 어둠이 물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내용이나 의미는 없어 보여. 처음 읽은 그대로야.’
한동안 창밖을 보던 그는 고개를 숙여 손에 든 기예 잡술서 사본을 내려다봤다.
어쩌면 책의 내용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익히는 과정이 괴롭고 말도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를 긴장시켰던 복면인 같은 내공의 고수가 이런 외공이 굳이 필요할지 의문이었다.
‘혹시 효과가 엄청난 건 아닐까?’
복잡한 눈빛으로 종이를 내려다보던 도현은 블라인드를 닫고 간이 등을 끄고는 침상에 누웠다.
간호사가 들어와 유금찬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갔고, 눈을 뜬 도현은 기예 잡술서가 담긴 종이를 눈앞에 가까이 댔다.
어쩌면 긴 시간을 두고 책을 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놓치고 지나간 뭔가가 존재할 수도 있었다.
종이를 베개 밑에 넣은 도현은 가볍게 숨을 토하며 병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놀라운 고수인 복면인의 등장과 의심스러운 고서.
모두 관심이 가고 신경이 쓰였지만, 보다 중요한 건 한석호로부터 들은 단전의 비밀이었다.
깨달음을 통해 한 발자국만 더 전진한다면 새로운 단전이 열리고 진정한 고수의 세계에 진입한다는 것.
생각할수록 가슴이 뛰는 일이었고, 아주 멀게만 느껴졌던 태선군의 존재가 드디어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것 같았다.
“깨달음이라…….”
돌담길
퇴원 준비를 하며 도현은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었다.
12월 초순이었지만 홍콩의 날씨는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해서 두꺼운 옷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서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정장을 사서 입었다. 원래 그는 정장을 선호하는 편이 아닌데, 홍영의 보기 좋다는 칭찬에 귀가 솔깃해 정장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패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그의 성격상, 정해진 스타일의 정장 차림이 오히려 신경 쓰이지 않고 입기도 무난한 면이 있었다.
“무도인이 아니라 어느 회사의 젊은 CEO 같군.”
웃으며 말을 한 한석호는 앉아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도현의 앞에 섰다.
지난 일주일 동안 같은 병실을 사용하면서도 도현과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마음은 어느새 제법 가까워진 상태였다.
“수고했네. 굳이 여기에 입원해 있을 정도의 상처가 아닌데도 계속 있었던 게 나 때문이라는 거 알고 있어.”
“아닙니다, 선배님.”
도현은 담담히 웃으며 몸이 가벼워 보이는 한석호의 위아래를 살폈다.
귀가 잘린 부상과 다리에 입은 총상이 많이 나아서 이제는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이 없어 보였다.
그의 말대로 도현은 자신의 상처를 핑계로 병실에 한동안 같이 머물렀다.
복면인이 꼬리를 감추고 몸을 사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일은 생각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한석호의 몸이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곁을 지켜 준 것이다.
“사과하지.”
“네?”
“2,000만 원짜리 사진 말일세. 좀 비싸게 후려쳤지?”
한석호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하자, 도현이 빙그레 웃었다.
“괜찮습니다. 제겐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진이었으니까요.”
“네팔은 잘 찾아갔었나?”
“그곳 아이들에게 달콤한 초콜릿과 사탕을 나눠 주고 왔습니다.”
“그 장소가 왜 자네에게 중요한지는 얘기를 안 해 줄 테지?”
한석호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고, 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좋은 곳이었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도현이 기예 잡술서 사본을 내밀었다.
“그동안 잘 봤습니다.”
병실에 머문 지난 시간 동안 그는 숨겨진 내용을 찾으려 다각도로 애를 썼지만 소득이 없었다.
“가지고 가게. 필요하면 익혀도 보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몸만 축나는 일일 것 같아. 자네에게 추천은 하지 않겠네.”
도현은 잠시 손때가 묻은 기예 잡술서를 내려다보다가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어쩌면 말이야…….”
한석호는 화장실을 간 유금찬의 빈 침상을 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흘렸다.
“복면인은 외공 수련법이 아닌, 책 자체가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
“책 자체요?”
“그자가 처음 내 방에 들어와서 고서를 차지했을 때 제일 먼저 한 행동이 뭔지 아나?”
한석호는 유금찬이 심심풀이로 읽던 잡지를 들고 왔다.
“내용을 보는 게 아니라 이렇게 책 겉표지를 면밀히 살피던 눈치였어. 마치 내가 표지를 훼손시켰는지 어쨌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때는 워낙 긴박했던 상황이라 무심코 넘겼는데, 어제 갑자기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더군.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건, 책의 내용을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그자의 의도를 우리가 파악하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거네. 책 자체에 비밀이 있다면 말이야.”
도현은 독특하지만 무식한 외공 수련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책 자체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책을 구성하는 내용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면 무슨 비밀이 있는 걸까?’
짐작하기 어려웠다.
“선배님은 그자들을 쫓을 생각이십니까?”
“단서가 있으면 쫓고 싶은데, 쉽진 않겠지. 하지만 기회가 되면 이 상처는 돌려주고 싶군.”
한석호는 잘린 귀 부분에 손을 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차가운 인상의 그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 차가움이 온몸에서 풍겼다.
그때 유금찬이 미이라처럼 얼굴을 붕대로 감싼 모습으로 나타났다. 화장실에 다녀온 그는 도현이 퇴원하려고 하자 다가와 손짓으로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넸다.
턱 수술이 끝나고 이튿날 정신을 차린 그는 도현이 구해 줬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고마워하고 있었다.
“으으으. 으으.”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작별 인사를 하는 그에게 도현이 말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으으으.”
턱에 철심을 넣은 유금찬은 목에서 소리를 내다가 그 진동이 턱에 이르자 아픔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선배님, 그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아, 그리고.”
한석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도현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내 제자에게는 행여나 이번 일이 귀에 안 들어갔으면 하는군. 무슨 뜻인지 알겠지?”
“말조심하죠.”
“조심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신경 쓰란 말이지.”
한석호는 병원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나와서 마지막에 한마디 더했다.
“그런데 자넨 나와 대련하는 데 얼마를 받고 싶은가?”
도현에게 대련 한 번에 천만 원을 요구했던 한석호가 주저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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