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디 임팩트 6권 5화
“수고하셨습니다.”
용주의 인사에 저녁 교육을 받은 이호선 피디와 김유진 작가, 그리고 호태식이 땀을 흘리며 바른 자세로 마주 인사를 했다.
“사범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돌아서던 그들은 한쪽 구석에서 검을 수련하는 장철호를 응시했다. 베고 찌르는 동작 하나하나가 매우 느려서 하품이 나올 정도였지만, 진지한 그의 얼굴 표정과 눈빛을 보면 감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아직 장철호와 제대로 얘기를 해 보지 못한 그들은 잠시 서서 그를 지켜봤다.
“우리도 조만간에 검을 들 날이 오겠죠?”
턱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김유진이 부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우린 벌써 한 달이 지났잖아.”
이호선은 뿌듯한 표정으로 옆에 선 호태식을 쳐다봤다.
“태식 씨는 언제가 한 달이죠?”
“글쎄요. 삼사일 남았나요?”
“아직 한참 남았네.”
이호선의 농담에 호태식이 가볍게 웃었다.
그들 셋은 힘든 교육 속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5층 도장을 나와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이 피디가 물었다.
“저기, 태식 씨는 어떤 일을 해요?”
김유진도 궁금한 듯 호태식을 쳐다봤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미소가 많은 사내여서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영업직이 아닌가 생각이 됐다.
질문을 받은 호태식은 난처한 표정을 감추며 대답했다.
“백수예요.”
“아…… 미안합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이 피디를 향해 호태식이 웃음을 보였다.
“괜찮아요. 때때로 큰누나 일을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그분이 사업을 하시나 보죠?”
“무당이에요. 작두를 잘 타서 벌이가 괜찮죠.”
“아, 그러시구나.”
“언제 필요하시면 말씀 주십시오. 집안에 우환이나 이런 거 한 방에 다 없애 드리니까요.”
거리낌 없는 유쾌한 그의 말에 이 피디와 김 작가가 어색함을 없애며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호태식을 쳐다봤다.
“가시면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 거예요?”
김 작가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냥 짐이나 좀 나르는 정도죠 뭐. 가끔 굿판에 싸움 일어나면 말리는 정도고요. 사실, 큰누나가 저 보고 싶으면 가끔 일 핑계 삼아 부르는 정도예요. 그래서 백수가 맞는 거고요.”
건물 밖으로 나온 그들은 시원한 표정으로 겨울 찬 바람을 얼굴에 맞았다.
도장에서 쌓이고 쌓였던 뜨거운 열기가 몸 밖으로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저기 분식집에서 순대나 먹고 갈래요?”
김 작가의 말에 이 피디가 배를 두드렸다. 운동을 하고 나면 언제나 배가 출출했다.
“같이 갑시다, 태식 씨.”
“괜찮습니다.”
“에이, 같이 가요. 먹는 데 시간 얼마 안 걸리잖아요.”
김 작가가 강제로 팔을 잡고 가자 호태식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분식집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길 건너 커피숍에서 지켜보던 서지철이 바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태식아, 어디 가냐 지금?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잖아.”
-여보세요. 잘 안 들리는데요.
“이 자식이 엉뚱한 소리는. 백 관장 소식 들었어? 홍콩에서 언제 온데?”
-아직 별 소식 없습니다.
“젠장. 금방 온다고 하면서 갔다는데 왜 안 와. 일주일이 넘었잖아.”
-네, 먼저 들어가 계세요. 잠시 통화 좀 하고 들어갈게요. 여보세요.
분식집으로 이 피디와 김 작가가 들어가자 호태식이 말을 편하게 했다.
-형님, 백 관장이 공항 주차장에서는 저에게 그렇게 말을 했어요. 근데 늦게 오나 보죠.
“사범 녀석에게 자세히 물어보지 그랬어?”
-물어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죠. 제가 백 관장 얘기를 자꾸 꺼내면 저쪽에서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자연스럽게 얘기가 제 귀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어요.
“미치겠다, 정말. 후우, 이 자식 또 잠수 탄 거 아니야?”
-형님, 그러니까 포기하자니까요. 왜 생고생하냐구요. 그깟 해결사 인생에 오점을 안 남기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참나.
“넌 새끼야, 내게 한마디도 하지 마. 빌어먹을 새끼, 배신자 새끼.”
-나중엔 제게 고맙다고 하실 날이 분명히 온다니까요.
“시끄럽고 얼른 와. 같이 저녁 먹자. 나 아직 저녁 안 먹었다.”
-안 되겠는데요.
“왜?”
-분식집에서 순대하고 떡볶이 먹기로 했거든요.
“너 미쳤냐? 그놈들하고 어울리는 게 나보다 중요해!”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치던 그는 습관처럼 커피숍 내부를 둘러봤다.
경찰보다 무서운 커피숍 여직원이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감시하기 좋은 커피숍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몸을 사려야 했다.
-유치하게 왜 그러세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지금 분식집으로 끌려온 거라고요.
“순대 배 터지게 먹어라, 이 자식아.”
전화를 끊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혼한 후 혼자 밥을 먹는 게 익숙했지만 왠지 오늘은 더욱 씁쓸했다.
“도대체 호검술 도장에서 뭔 세뇌를 받았기에 저 녀석이 저렇게 바뀌었지? 정말 백도현이 그렇게 불길한 녀석인가?”
2층 커피숍에서 내려온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눈이 커졌다.
“저, 저 새끼, 백도현!”
차에서 내린 도현이 도장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도현이 홍콩에 있는 사이 홍영은 호심공의 호흡법을 익힌 후 좌공에서 벗어나 동공으로 전환을 했다.
느리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꼭 북경의 어느 아침 공원에서 기 체조를 하는 노인들의 모습과 흡사해 보였지만, 그녀의 발은 호검술의 보법을 따르고 있었고, 손동작은 호검술의 검식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동안 굼벵이처럼 작은 동작으로 느릿하게 수련을 하던 그녀는 조용히 숨을 거두며 제자리에 섰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좌공이 아닌 동공으로 호심공을 수련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조금만 빨리 움직이려 해도 호흡이 엉키며 숨이 막혀서 현기증이 밀려왔다.
호심공을 익힌 사람은 그녀와 용주, 장철호 세 명이었는데, 그들 중 가장 진도가 빠른 사람은 장철호였고, 그녀가 중간, 용주가 제일 늦은 편이었다.
낮에 용주는 처음으로 좌공에서 벗어나 동공을 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도장 바닥에 픽 쓰러져 홍영을 놀라게 했었다.
그에 비해 장철호는 빈손이 아닌 목검을 들고서 동공을 펼치면서도 10분 정도가 다인 그녀를 뛰어넘어 20분 정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도 빠르게 움직이는 건 한계가 있어서, 아직은 그녀처럼 느리게 움직이며 동공을 수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올 때가 됐지?”
벽시계를 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도복 소매로 닦던 그녀는 마치 그녀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한 도현의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이번 출장은 어땠어요?”
그녀의 출장이라는 단어 선택에 도현은 웃음을 참으며 도장 안으로 들어섰다.
“옷을 새로 살 만큼 격렬했어요.”
그녀는 살짝 놀라는 눈빛으로 도현의 옷차림을 살폈다. 서울의 겨울 날씨에 입기에는 다소 가벼운 느낌의 정장이었지만 도현에게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 옷은 그가 홍콩으로 갈 때 입고 갔던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못 보던 새 옷이었다.
“홍콩에서 싸웠어요?”
“싸우다니?”
도현의 등 뒤에서 용주가 불쑥 얼굴을 내밀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 싸우고 왔냐?”
도현은 홍영과 용주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
“자식이, 그런 일 있으면 바로 보고를 해야지. 왜 전화했을 때 얘기 안 했어?”
“전화로 하기 뭐해서.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뭐야, 너 어디 다쳤었어? 천하에 백도현이?”
용주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도현의 위아래를 훑었다.
“목마르다. 물 한잔 마시고 얘기하자.”
관장실에 온 도현은 홍영이 건네는 물을 마신 후 홍콩에서 복면인과 싸웠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복면인과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는 그의 말에 듣고 있던 홍영과 용주는 크게 놀라워했다.
이계를 다녀오며 내공을 쌓고 검술도 깊어진 도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그들 수준으로는 추측도 불가능했다. 그런 도현을 맞아서 대등하게 승부를 이끌어 갔다는 복면인의 등장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이기긴 했잖아, 그것도 부엌칼로. 그럼 그 녀석은 네 밑이지 뭐.”
친구와 동급으로 복면인을 올려놓는 게 싫었는지 용주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검술이 그렇게 대단했어요?”
홍영의 물음에 도현은 복면인의 검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수련을 거쳐 온 냄새가 났어요. 검법 자체도 굉장했고요. 다만, 실전을 별로 겪어 보지 못해서인지 임기응변 능력은 좀 뒤떨어져 있던 것 같고.”
“실전 하면 너 아니냐. 이계에서 몬스터하고 싸워, 마법사하고 싸워, 거기에다 수많은 인간들하고도 싸워. 그 자식 정말 운 좋았네. 부엌칼 대신 검 한 자루 네 손에 들려 있었다면 도망도 못 쳤을 텐데.”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치며 용주는 아쉬워했다.
“한 선배님이 화가 많이 났을 것 같아요. 그런 부상을 당하시다니.”
병원에서 같이 머물다 왔다는 도현의 얘기에 홍영은 도현이 심하게 부상 입지 않을 걸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멀쩡한 귀를 잃은 한석호를 동정했다.
“도현아, 그런데 그 기예 잡술선지 뭔지는 어떤 책인데 그 난리가 난 거냐?”
용주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물었다.
“외공 수련법이 담겨져 있었어.”
“뭐? 외공?”
용주가 눈을 번뜩이며 귀를 후비던 손가락을 내렸다.
“전설의 금강불괴! 도검불침!”
“그런 건 아니지만, 제법 신체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 내공과는 다른 거력을 발휘하게 만들어 준다는 독특한 수련 방법이 수록되어 있지.”
“젠장, 아깝다. 복면인처럼 강한 녀석이 노렸다면 꽤 쓸 만한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병실에 머물며 연구를 좀 해 봤어. 그런데 장담하긴 힘들어.”
도현은 들고 온 가방에서 클립에 끼워진 수십여 장의 종이를 꺼냈다.
“원본은 없지만 이게 그 사본이야.”
카메라에 담겨져 있었다는 얘기를 하며 도현은 홍영과 용주가 볼 수 있게끔 클립에 끼워진 종이를 빼내 그들에게 나눠 줬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들에게 도현이 한석호가 해 준 말을 그대로 반복해서 해 줬다.
“그러니까 복면인이 노린 건 이 책 내용이 아니라 표지나 뭐 이런 데 숨겨져 있는 비밀스러운 뭔가라는 건가?”
용주는 알아보기 힘든 한자를 힐끔거리며 도현을 쳐다봤다.
“책 내용의 가치가 내공의 고수가 노릴 만한 것으로 보기에는 조금 애매하거든. 그 효과도 미지수고.”
“아, 그래.”
용주는 입맛을 다시며 들고 있던 기예 잡술서의 일부를 테이블 위에 툭 던져서 올려놨다.
“괜히 좋다 말았네.”
“괴상해요. 수련 방식이.”
그림과 함께 조금 읽다 만 홍영도 고개를 갸웃하며 손에 든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거북스럽긴 해요.”
도현은 웃으며 클립에 종이를 끼웠다.
“수련 방식이 어때서?”
용주가 슬쩍 물었다.
“매를 맞으면서 익히는 외공이야.”
“미쳤군. 그 짓을 왜 해?”
“그런가? 나는 시간이 나면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데.”
“변태 자식, 흐흐흐.”
짓궂은 농담을 하던 용주는 홍영의 따가운 시선에 침을 삼키며 딴청을 부렸다.
“도현 씨, 그나저나 홍콩에 간 이유가 있잖아요. 내공의 벽에 대해 물어봤어요? 상황이 좋지 못해서 물어보기 좀 그랬겠지만.”
“물어봤어요. 그리고 답을 듣고 왔죠.”
도현은 깨달음을 얻으면 새로운 단전을 얻고 진정한 고수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고 말을 했다.
홍영과 용주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면 도현의 내공이 영영 저대로 멈추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는데, 알고 보니 놀라운 변화를 위한 준비 선상에 도착한 셈이었다.
“끝내준다. 새 단전을 얻어?”
감탄을 하던 용주는 그러다 곧 턱을 매만지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어떻게 깨달음을 얻으라는 거지? 깨달음이라는 게 도대체 뭔데?”
“무도인의 깨달음은 정신적인 수양과 육체적인 수련이 극에 이르렀을 때 우연처럼 잠시 왔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형체 없는 어떤 것이라고 했어. 그 순간을 놓치면 또다시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거지.”
“누가 그런 말을 해 줬어?”
“한 선배님이.”
“어? 조금 전엔 너보고 알아서 깨달음을 찾아야 한다고 그랬다면서.”
도현은 웃으면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석호와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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