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133화 (133/575)

[133] 디 임팩트 6권 8화

머리 위로 눈이 제법 내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얼마 뒤, 덕수궁 돌담길이 끝이 났다.

“우리 다시 한 번 걸어요.”

작은 눈송이들이 함박눈으로 변해 갔고, 그들은 눈을 듬뿍 맞으며 돌담길을 여러 차례 다시 걸었다.

“미친것들, 도대체 왜 다리 아프게 여러 번 걷는 거야? 에이취!”

변장을 한 서지철은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은 다음 저 앞에 돌담을 만지며 걷는 도현과 홍영을 노려봤다.

그는 호태식이 보여 준 동영상을 본 후, 포기를 할까 아니면 자존심을 지킬까 계속 고민 중이었다.

“젠장. 왜 하필 여기야?”

서지철은 이혼한 아내와 가을 낙엽이 깔린 이 돌담길을 걸었던 옛 생각이 나서 마음이 울적했다.

잠시 넋을 놓고 길을 걷던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덕수궁 돌담길 중간에 만들어 놓은 나무 벤치에 앉았다.

도현과 홍영이 그의 앞을 지나쳐 갔지만 그는 미동도 않고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받았다.

“그땐 참 좋았는데.”

칼춤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던 도현은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뜨며 앞으로 몸을 굴렸다.

복면인이 휘두른 검이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스르릉.

칼을 뽑은 도현은 냉정한 눈으로 뒤따라오던 복면인의 검을 번개처럼 좌우로 쳐 낸 뒤, 앞으로 나가다가 검기가 실린 검이 눈앞을 어지럽게 하자 급히 보법을 발휘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곧 그는 기세를 온몸으로 발산하며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복면인의 몸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단번에 잘라 내 버렸다.

그 순간, 마음에서 만든 홍콩의 복면인이 연기처럼 사라졌고, 도현이 손에 들고 있던 검도 희미해지며 없어졌다.

근처에서 호심공을 수련하던 홍영은 별안간 도현이 몸을 날리며 맨손으로 검을 든 것처럼 휘두르자 놀란 눈빛으로 바라봤다.

“도현 씨, 괜찮아요?”

“네? 아, 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도현은 말아 쥔 손을 펴며 몸을 바로 했다.

“왜 그런 거예요? 꼭 싸우는 동작이었는데.”

홍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홍콩에서 만난 복면인이 나타나서 공격하기에 반격했어요.”

“복면인요?”

“그 사람이 쉽게 잊히지가 않네요. 그의 검술도.”

한석호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일단 한발 물러나긴 했기만 시간이 갈수록 복면인과 싸우던 모습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도 나처럼 단전에 내공이 다 차서 어떤 경계에 서 있는 걸까?’

내공도 엇비슷하고 검술은 탐이 날 만큼 현기가 어리면서 깊었다.

“그럼 환상하고 싸운 거예요?”

홍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도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싸우던 장면을 회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복면인이 뛰쳐나왔어요. 깜짝 놀라서…… 그렇게 싸운 거죠. 이상하게 들리죠?”

“이상하긴요. 아무래도 도현 씨가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려나 봐요. 그런 환상과 마주하는 건 특별하잖아요.”

홍영은 미소를 보이며 한쪽으로 물러나 다시 호심공을 수련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그녀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도현은 관장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은 그는 달력을 보았다. 홍콩에서 돌아온 지 열흘이 넘었다.

‘의식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의식이 돼.’

한석호를 만난 이후 깨달음이란 단어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전처럼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순간이 드물었고, 검을 휘둘러도 의식은 검이 아닌 어떻게 하면 깨달음에 빨리 도달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 쪽으로 자꾸만 뛰어갔다.

복면인에 대한 관심도 어쩌면 그 연장선에서 돌출되어 나온 심마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홍영이나 용주, 장철호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한 마음의 평정심과 검에 대한 집중력이 정작 요 근래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은 것이다.

이래서는 곤란했다.

이런 정신 상태로는 영원히 현재의 수준에 머물러야 할지 모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언제 관장실로 들어왔는지 찻물을 우려내던 홍영이 조용히 물었다.

“마음가짐을 돌아보고 있었어요.”

“왜요, 요즘 자신이 마음에 안 들어요?”

홍영이 부드럽게 말을 하며 찻물을 담은 찻잔을 도현 앞에 내려놨다.

“상당히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도현 씨는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몸은 그렇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아요.”

도현은 테이블 너머 맞은편에 앉은 홍영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

묵묵히 도현의 얘기를 들어 주던 그녀는 길고 가느다란 흰 손을 내밀어 도현의 거친 손을 감쌌다.

“아무래도 도현 씨에게는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내가요?”

“그동안 태선군 때문에 쫓기듯 살아왔잖아요. 강해져야 한다는 마음은 늘 도현 씨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요. 거기에다 내가 와서 더 마음이 급해진 것 같아요.”

“아니에요, 홍영 씨. 홍영 씨가 없었더라도 똑같았을 거예요.”

도현은 강하게 부정을 하며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홍영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렇다면 조금 자신에게 여유를 줘요. 검을 잠시 놓고요. 도현 씨는 사람이지, 멈추지 않는 열차가 아니잖아요. 쉬었다가 다시 출발해요.”

홍영의 따뜻함이 깃든 조언이 도현의 가슴 깊이 다가왔다.

저녁 교육이 끝나고 이호선, 김유진, 호태식이 도장 밖으로 나가자 용주는 커튼을 치기 시작했다.

복도와 접한 통유리는 금세 짙은 갈색 커튼으로 인해 가려졌고, 밖에서는 도장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게 됐다.

호검술을 수련하던 장철호는 도복을 벗었다. 착 달라붙는 사각 수영복이 보였다.

그의 몸에는 볼펜으로 둥그렇게 표시된 곳이 수십 군데였다.

선천지기가 흐른다는 36곳의 혈도였다.

도현과 달리 그들은 아직 눈썰미만으로는 정확히 혈도를 가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익숙해질 때까지 몸에 표시를 해 둔 것이다.

이런 표시는 용주의 몸에도 있었다.

마네킹을 통해 여러 날 연습을 한 그들은 어제부터는 도현이 대신 서로의 몸을 때릴 수 있게 됐다.

“자아, 시작해 볼까?”

“네.”

용주는 목검을 들고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너 어제 일로 앙심 품은 건 아니지?”

장철호의 눈빛은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요. 우린 아직 익숙지 않잖아요. 실수할 수도 있죠. 그런데 하마터면 남자구실 못할 뻔했어요. 아파서 잠도 못 잤다구요.”

씨익 웃으며 용주는 장철호의 낭심을 노려봤다.

“우린 함께 가는 거다. 조금 있다 내 차례라는 걸 잊지 말아.”

장철호의 은근한 협박에도 용주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흐흐, 알아요 형. 그땐 그때구요.”

용주는 목검을 눈높이로 올렸다.

“갑니다, 철호 형. 왼발 올리세요.”

언제나 시작은 왼쪽 발바닥부터였다. 그리고 오른쪽 발바닥에 이은 종아리와 허벅지, 엉덩이를 거친 상체.

조금 전 장철호에게 농담을 하며 장난을 쳤던 용주는, 혈도를 때리는 순간만큼은 웃음기를 빼고 온 정신을 집중했다.

숨 몇 번 쉴 동안 전신 혈도를 정확히 때려야 했다.

도복 자락을 날리며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던 그는 나름대로 정한 시간 안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오며 마지막 등의 혈도를 목검 끝으로 강하게 가격했다.

쩌어엉.

“으헉!”

참았던 비명을 마지막에 터트리며 장철호가 도장 마룻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쿠웅.

“하아, 하아. 괜찮았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빠른 속도로 목검을 휘두른 용주는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을 닦아 내며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잘했어. 모두 혈도에 적중한 것 같다. 이제 내 차례지?”

바닥에 누워 숨을 고르던 장철호가 목검을 들고 일어섰다.

“윽!”

어금니를 물고 고통을 참는 용주의 목에 시퍼런 힘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매질이 끝나자 그도 조금 전 장철호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픽 쓰러졌다.

“철호 형, 이거 분명 효과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몸을 덜덜덜 떨며 말했다. 아파도 너무 아파서 사실 요즘 가위에 자주 눌린다. 그런데 효과가 없으면 억울해서 평생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몇 개월은 지나 봐야지.”

그 이후로 그들은 두 번을 더 반복하는 근성을 발휘했다.

큰대자로 누워 있는 그들을 도현이 위에서 내려다봤다.

“나 없이 두 사람이 할 수 있겠어요?”

“당연하지. 오늘은 실수도 없었다고.”

장철호가 대답을 하며 일어나 앉았다.

“그럼, 내가 없어도 되겠어요.”

“어디 가려고?”

용주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겨울 산행.”

“뭐? 겨울 산행?”

그가 세 살 때였다.

아버지는 검을 포기하라는 어머니와 크게 싸우시고 경남 함양으로 가셨다.

그곳에는 지리산 줄기를 이은 취영산이라 불리는 험산이 있는데, 아버지 군대 동기분의 부모님이 산속 깊이 집을 짓고 사셨다.

그분들은 원래 취영산 산자락에 자리한 작은 마을에 거주하셨는데, 아버지 군대 동기인 그분들의 자식이 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뒤 전답을 정리하고 산속에 머무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다.

그분들과 인연이 깊었던 아버지는 산속 깊은 그분들의 집에 한동안 머물며 어머니를 위해 검을 포기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셨다고 한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얼기 직전의 폭포수 밑에서 몸을 떨던 아버지는 지나가는 신선풍의 노인을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단전호흡법을 가르쳐 준 분이다.

끝까지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은 그분을 아버지는 지리산 도인이라고 하셨고, 그 호흡법을 간직한 채 산을 내려오셨다.

그 뒤, 아버지는 결국 검을 포기하셨다. 어머니를 위해.

하지만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검을 들고, 호검술 도장까지 여셨다. 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가 슬퍼하는 아버지에게 다시 검을 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도현이 오래된 도장을 지키고 싶었던 이유는 어머니의 희망과 눈물이 함께한 그런 사연이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눈 덮인 산길을 오르며 아버지가 해 주셨던 과거 얘기를 회상하던 도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차가 다니도록 길이 난 곳은 저 밑에서 끝났다. 지금부터는 좁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했다.

‘아직 그분들은 그곳에 계실까?’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올랐던 길을 더듬어 올라가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분들이 그곳에 건강하게 살아 계실지 의문이었다.

등에 배낭을 멘 그는 새하얀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며 16년 전,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길을 홀로 묵묵히 걸었다.

개 짖는 소리에 여든이 넘은 허 할아버지는 도끼질을 멈췄다. 소로를 따라 웬 젊은 사내가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여보, 누가 올라오는데?”

“누구래요?”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던 주름살 많은 아내의 물음에 허 할아버지가 허허 웃었다.

“이 사람이. 내가 그걸 어찌 아누. 처음 보는데.”

“물어봐요, 그럼.”

“가까이 와야지 물어보지.”

“배에 힘 없어요? 소리 질러 물어보면 되지.”

“그럴 필요 있나. 기다리면 오는데.”

“그럼 왜 누가 온다고 말을 했어요, 사람 궁금하게.”

“이 사람이 정말! 그냥 말할 수도 있잖아!”

“귀 안 먹었어요. 살살 얘기해요.”

아내의 핀잔에 허 할아버지는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도끼질을 힘차게 했다.

파삭.

장작이 시원하게 두 조각 났다.

“사람이 늙어서도 어찌 그러누. 아직도 처녀 때 꽃순이인 줄 아나?”

“나 죽고 슬퍼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요.”

“거 말을 해도 사람이 참!”

도끼를 내팽개친 그는 쪼글쪼글한 손가락 사이에 담배 한 개비를 끼웠다.

“당신이야말로 내가 먼저 죽고 나서 땅을 치고 후회해 봤자 늦어. 있을 때 잘해, 후우.”

담배 연기가 겨울 산 공기를 타고 느리게 흩어져 갔다.

“여보.”

“왜요?”

“근데 가까이 올수록 누굴 닮은 것 같은데?”

“누구요?”

“백남식, 그 사람.”

“네?”

부엌에 있던 황순옥이 서둘러 나와 남편의 곁에 섰다.

“어디요?”

“저기 앞에.”

“나 눈 잘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설명해 주잖아. 가만, 그러고 보니까 백남식 그 사람 지금쯤 나이가 50이 훌쩍 넘었을 텐데, 왜 저렇게 젊지?”

허진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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