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디 임팩트 6권 9화
그가 산을 방문한 지 10여 년이 넘었다. 그때도 이미 저 사람보다는 훨씬 나이가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 물어보랬잖아요.”
“알았으니까 그만해. 다 왔잖아.”
도현은 키가 작고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와 반대로 키가 큰 할머니를 보며 반가운 표정으로 크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뉘시오? 내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았는데.”
허진국이 담뱃재를 톡톡 떨며 물었다.
“백도현이라고 합니다. 오래전에 아버지 손잡고 여길 한번 왔었는데요. 혹시 기억나십니까?”
“부친 함자가?”
“백 남 자, 식 자 되십니다.”
도현의 대답에 허진국이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찰싹 때렸다.
“그렇구먼. 이제 생각나. 자네가 그때 봤던 어린아이였구먼. 웃지도 않고 얌전했던 그 소년.”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제가 그때는 웃음이 별로 없어서요. 결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닙니다.”
도현은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벗어 놓은 다음, 땅 위에서 큰절을 올렸다.
노부부가 건강히 잘 있는 모습을 보자,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백남식의 아들이라고?”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황순옥이 큰절을 하고 일어서던 도현의 얼굴을 가까이 붙어서 빤히 들여다봤다.
“그놈 잘생겼다. 아주 잘 컸어. 백남식보다 잘생겼어.”
“이 사람이! 다 큰 사람에게 그놈이라니!”
남편이 한 소리 하자 황순옥은 빙그레 웃으며 도현에게 말했다.
“괜찮지?”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주름 깊은 얼굴에 미소를 담은 할머니는 도현이 뒤를 살폈다.
“아버지는 같이 안 왔어? 보고 싶은데.”
“아들이 왔는데, 오겠지. 혼자 보냈겠어?”
허진국이 담배를 피우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아버지께서는…….”
도현은 사실 산을 타면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이분들을 만나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사실대로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니면 잘 계시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연로한 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현이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자 허진국과 황순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돌아가셨구먼.”
긴 세월을 살아온 그들은 도현의 얼굴에서 금세 백남식의 죽음을 읽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 드려야 하는데.”
“아니야, 괜찮아. 우리 나이쯤 되면 그런 일들은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어. 한데, 언제 돌아가셨나?”
“올여름입니다.”
“자네가 힘들었겠군.”
허진국은 담배를 끄며 아내를 봤다.
“남식이 아들이 왔는데, 닭이라도 잡아야지?”
“닭은 저녁에 잡고, 점심이나 얼른 먹자고요. 오늘 자고 갈 거지?”
“부담 주지 마, 이 사람아.”
허진국이 아내에게 눈치를 주자 도현이 얼른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할아버지.”
“자고 갈 거야?”
허진국이 웃으며 물었다.
“저 방, 아직 비어 있지요?”
도현은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잠을 잤던 작은 방을 가리켰다.
“비었지.”
“두 분만 괜찮으시다면 며칠 여기서 머물고 싶은데요. 괜찮겠습니까?”
“며칠이든 한 달이든 상관은 없지. 안 그래?”
허진국은 헛기침을 하며 아내를 봤다.
“도현이라고 했지? 점심 준비할 테니까 얼른 방으로 들어가. 날 추운데.”
황순옥은 긴말하지 않고 부엌으로 향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도현은 작은방에 배낭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마당에서 기다리던 허진국이 손짓을 했다.
“무슨 이유로 여기에 머물려고 하는지 물어봐도 되나?”
“아버지가 예전에 이곳에 머물며 검을 수련했던 산속 장소들이 있어서요. 그곳에서 며칠 시간을 보내려고요.”
“아, 기억나. 그때 그랬지.”
허진국은 백남식이 검을 가지고 와서 산에서 수련을 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자네 검은 어디 있나?”
“빈손으로 왔습니다.”
“왜? 자네 부친은 검을 들고 왔는데?”
도현은 집 옆으로 보이는 깊은 산속을 지그시 응시하며 답했다.
“검이 없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산중 겨울은 추웠지만 아직 폭포수를 얼릴 정도는 아니었다. 도복 차림의 도현은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높이 3미터 정도 되는 작은 폭포를 근처 바위에 앉아 가만히 응시했다.
말이 폭포지 떨어지는 물의 양이 하도 적어 시원한 맛도, 웅장함도 찾기 어려웠다.
많은 비가 와야 그때서야 잠시 폭포다운 기개를 보이며 폭포수가 콸콸콸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도 깊은 산속에 위치한 폭포는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제법 운치 깊었다.
폭포까지 오는 길이 험하지 않고 산속 깊이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취영산 저 밑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여름 더위를 피하거나 가을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어떠냐? 너도 다음에 여기 와서 수련을 해 보는 게?
도현은 16년 전, 아버지가 폭포를 보시면서 한 말씀이 생각났다.
그는 바위에서 일어나 폭포가 만든 작은 물웅덩이가로 다가갔다.
웅덩이 주변은 살얼음이 껴 있었고, 그 뒤로 녹지 않은 흰 눈들이 가득했다.
몸을 숙여 차가운 폭포수를 마신 도현은 폭포를 우회해 더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10여 분쯤 산을 탔을까, 나무로 가려진 작은 동굴이 하나 나왔다. 아버지에게 호심공인 단전호흡법을 전수해 준 나이 든 지리산 도인이 살던 거처다.
랜턴을 비추며 안으로 들어간 도현은 몇 걸음 걷지 않아 막다른 동굴 벽에 다다랐다.
16년 전처럼 지리산 도인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고, 차가운 냉기만이 가득했다.
도현은 랜턴을 끄고 동굴 바닥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버지에게 호흡법을 전수해 준 노인은 이 동굴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이계에서 그는 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동굴 속에서 두 달간 무예를 높이기 위해 집중했다.
그 노인도 그런 것일까? 아니면 도를 깨치기 위해 참선을 하던 사람이었을까.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던 노인은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고승처럼 눈을 내려감고 정좌한 허벅지 위에 양손을 내려놓은 도현은 해가 저물도록 움직일 줄을 몰랐다.
새벽 일찍 일어난 도현은 수건 한 장을 들고 폭포로 향했다.
노부부가 기르는 개 두 마리가 껑충대며 도현의 뒤를 쫓다가 도현이 도복을 벗고 폭포 밑으로 들어가자 혀를 길게 내밀고 바라보더니, 흥미가 떨어졌는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졸졸 떨어지는 얼기 직전의 폭포수는 도현의 머리를 거쳐 정좌한 허리를 타고 내려갔다.
잡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물의 감촉에 도현은 깨달음에 대한 조급함도, 스톤을 찾아서 이계에서 뭔가를 더 얻고 싶다는 갈증도 조금씩 잊어 갔다.
“안 추워?”
그의 명상을 깨는 한 소리에 도현은 천천히 눈을 뜨며 전면을 응시했다.
뒤에 개를 달고 온 허진국이 쭈그려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얼어 죽어. 정신만 갈고닦으면 뭐하나. 몸이 죽는데.”
“조심하겠습니다.”
폭포수 밑에서 나온 도현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한쪽에 걸쳐 놓은 도복을 빠르게 입었다.
어느새 날이 환하게 밝은 아침이었다.
“몸에 왜 그리 흉터가 많아?”
원치 않게 도현의 나신을 본 허진국이 혀를 차며 물었다. 옆구리, 등, 가슴, 배, 허벅지, 어깨 등 전신이 흉터였다.
도현은 할 말이 마땅치 않아 그저 웃기만 했다.
“어여 내려가자고. 아침 먹어야지.”
허진국과 폭포에서 내려온 도현은 아침을 먹으며 물었다.
“제가 도와 드릴 일 같은 건 없습니까?”
“겨울 날 준비 다 했어. 아궁이에 넣을 장작도 다 준비해 놓았고. 집도 튼튼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
허진국과 황순옥은 백남식과의 인연 때문인지 몰라도 도현에게 아주 잘 대해 줬다.
아침을 먹은 도현은 눈 덮인 산 일대를 구경 삼아 천천히 돌아다녔다.
딱히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발목까지 덮는 눈을 밟으며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들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낄 뿐이었다.
겨울 산을 구경하며 돌아다닌 도현은 오후에는 다시 폭포수 밑에서 마음을 다스렸고, 밤에는 전기 없이 생활하는 노부부의 과거 얘기를 촛불 밑에서 들어 주며 하루를 마감했다.
그렇게 손에서 검을 놓고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던 도현은 산을 내려가기 위해 짐을 쌌다.
며칠만 있다 가자 했는데, 어느덧 열흘 가까이 돼 버렸다. 정이 들어 섭섭해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표정이 눈앞을 가렸지만, 그만 산을 내려가야 한다.
전날 밤에 짐을 싸고 새벽에 일찍 일어난 그는 밤새 내린 눈에 뒤덮인 마당과 집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한 후, 폭포로 향했다.
“드디어 얼었구나.”
새해를 며칠 앞두고 간밤의 맹추위는 끝까지 버티던 폭포를 결국 얼려 버렸다.
내려가기 전에 마지막 폭포수를 맞아야겠다 싶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도현은 얼어 버린 폭포를 바라보며 바위에 편안하게 걸터앉았다.
폭포는 그대로인데, 그곳에서 수련을 하시던 아버지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아버지 말씀대로 왔다 갑니다. 좋은 시간이었어요.”
빙그레 미소를 지은 그는 팔짱을 끼며 스르륵 두 눈을 감았다. 날은 추웠지만 마음은 포근했고, 정신은 폭포수 밑에 있는 것처럼 차고 맑았다.
그 어느 때보다 심신이 자유롭고 맑은 가운데, 그의 눈앞에 환한 빛 덩어리가 불쑥 나타났다. 상서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는 멍하니 지켜만 보았고, 어느 순간 빛은 점점 작아지며 도현으로부터 멀어져 가려 했다.
‘잡아!’
누가 말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음성 같기도 했고, 용주와 철호 형 목소리 같기도 했고, 홍영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는 있는 힘껏 하늘로 뛰어올랐다.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빛에 도현은 이를 악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빛을 쫓아갔다.
영원 같은 순간이 지속되며 도현은 빛을 쫓아 구름 너머 하늘까지 닿았고, 빛이 소멸하기 직전 간발의 차로 그는 반딧불만 하게 작아진 빛을 간신히 낚아챌 수 있었다.
그 순간 바위에 걸터앉아 무아의 세계에 빠져 들어갔던 도현의 몸에서 강한 기운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 영향으로 주변의 눈들이 물결 모양을 만들며 뒤로 길게 밀려났고, 머리카락은 산발되어 허공에서 춤을 췄다.
긴 시간 뒤 천천히 눈을 뜬 도현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바위에서 벌떡 일어섰다.
새로운 단전이 열리며 정체되어 있던 내공이 좁쌀처럼 변해 그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뜻밖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깨달음이 찾아온 것이다.
“어!”
바위에서 일어서던 도현은 깜짝 놀라며 급히 몸의 중심을 잡았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변해서 허공으로 1미터 가까이 점프를 한 것이다.
“굉장해. 단전만 변한 게 아니야.”
도현은 주변 사물을 둘러봤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도 평소보다 훨씬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호심공을 발휘해 보았다.
청명한 기운들이 그의 전신으로 스며들어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그 전에는 내공이 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축기가 정상적으로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확인할 수가 있었다.
“축기가 된다!”
미세하지만 기운이 쌓이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도현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호검술을 펼쳐 갔다. 이계의 동굴에서 두 달간의 수련 끝에 검술이 진일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검로들이 허공에서 마구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도현은 미친 듯이 새로 보이는 검로를 따라 나뭇가지를 휘둘렀고, 어느 순간 그의 기운을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가 중간에 뚝 부러져 버렸다.
“아니, 오늘 내려간다면서 예서 뭐 하는 거야?”
털모자를 쓴 허진국이 눈밭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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