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디 임팩트 6권 10화
“어여 가자고. 음식 식기 전에. 자네 오늘 내려간다고 해서 할망구가 아침을 거하게 차렸다니까.”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도현은 허진국을 업고 산을 뛰어 내려갔다.
“아니, 자네 위험하게 왜 이래?”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뭐가?”
“여기 머물게 해 주셔서요.”
“새삼스럽게.”
허진국은 말을 하며 옆을 봤다.
경사진 눈길을 도현이 훨훨 날아서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나무들이 휙휙 지나쳐 가는데?”
“할머니가 준비하신 음식이 식기 전에 내려가 봐야죠. 그리고 할아버지.”
“왜?”
“며칠 더 있다 가도 되겠습니까?”
“좋지. 할망구도 좋아하겠구먼.”
도현은 바람처럼 골짜기를 내려와 노부부의 집에 도착했다.
“며칠 더 있다 간다고?”
황순옥 할머니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네, 할머니. 저 때문에 음식을 많이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서요.”
“아니야, 음식이야 먹으면 되는 거지. 어서 들어와. 밥 먹어.”
“할아버지, 낫 좀 쓸 수 있을까요?”
“낫? 낫은 왜?”
아침을 먹은 도현이 낫을 찾자 허진국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나무를 다듬어서 검을 만들려고요.”
“지난번에는 검이 필요 없다면서?”
“이제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저기 창고 안에 있어.”
허진국은 볼일이 급한지 얼른 대답을 하며 뒷간으로 뛰어갔다.
도현은 나무 문을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 평 남짓 되는 공간에는 각종 농기구가 거미줄이 쳐진 채 놓여 있었다.
둘러보던 그는 곡괭이 옆에 있는 여러 자루의 낫을 발견했다.
녹이 약간 슬었지만 숫돌에 날을 갈면 된다.
산에서 어른 손목 두께만 한 긴 나무를 구해 온 도현은 도끼로 적당한 크기로 자른 뒤, 낫을 이용해 손질해 갔다.
어떻게 하는지 곁에서 지켜보던 황순옥 할머니는 볼품없던 나무가 목검의 형태를 점차 띠어 가자 손뼉을 치며 신기해했다.
“운동한다면서 목공 일이라도 배웠나?”
“아니에요, 할머니.”
“예사 솜씨가 아닌데? 낫으로 단단한 나무를 어찌 그리 쉽게 쑥쑥 다듬어?”
할머니의 칭찬에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손잡이 부분을 낫을 이용해 사사삭 깎았다.
‘됐다.’
그럴듯한 목검이 완성됐고, 도현은 마당에서 일어나 가볍게 시험 삼아 목검을 휘둘러 봤다.
목검이 움직일 때마다 차가운 겨울 공기들이 갈라지며 큰 소리가 팡팡 났다.
“장군이네, 장군이야. 옛날에 태어났으면 무관으로 급제도 했겠어.”
황순옥의 말에 허진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식이 그 사람이 핏줄은 아주 잘 놓고 갔어.”
마당에서 목검이 잘 다듬어졌는지 시험을 한 도현은 목검 한 자루를 더 만들고 나서야 낫을 놓았다.
마당 한쪽에 앉아서 추위에도 불구하고 도현이 하는 일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노부부는 도현이 목검 두 자루를 완성하자 박수를 쳤다.
“만든 목검을 팔아도 되겠네. 손재주가 아주 타고난 것 같아.”
“고맙습니다.”
도현은 미소를 머금으며 목검을 만들기 위해 자른 나무 조각들을 정리했다.
마당 정리를 하고 폭포가 있는 곳으로 가려던 도현은 한쪽에 서서 그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노부부의 시선에 잠시 망설이다가 되돌아섰다.
노부부의 일과는 자연 속에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었고, 유일한 취미는 오래된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국악 소리를 따라서 흥얼거리는 것이었다.
얼마나 구경거리가 없으면 목검을 만드는 내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켜봤을까 싶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가 칼춤을 한번 춰 볼까요?”
“칼춤?”
“예, 이 두 자루의 목검으로요.”
아까 목검을 시험 삼아 휘두를 때 좋아하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 도현은 즉석에서 제안을 했다.
“옳거니, 좋지! 나는 왕이고 이 사람은 왕비네. 신명 나게 칼춤 한번 춰 보게나.”
“왕비는 무슨 왕비예요. 다 늙어서 주책이야.”
황순옥이 한 소리했다.
“어디 보자 자고로 춤은 음악이 필요한 법이지.”
허진국은 방에서 들고 나온 오래된 카세트를 눌렀다. 전기도 안 들어와 건전지로 움직이는 카세트에서는 곧 가야금 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정 도복을 입은 도현은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맨발로 마당에 섰다.
척.
두 자루 목검을 좌우로 하나씩 든 그는 가야금 운율에 몸을 맡기며 어깨를 덩실거리다가 발밑에 검을 서서히 눈높이로 올렸다.
“흐차!”
입으로 흥에 겨운 소리를 낸 도현은 검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원을 그리며 마당을 한 바퀴 돌았고, 이어서 훌쩍 공중으로 뛰어오르더니 뒤로 재주를 넘어 검으로 땅을 휩쓸었다.
“흐차!”
또 한 번 흥에 겨운 소리를 낸 그는 가야금 소리가 격렬해지자 그에 맞춰 하늘에서 내려온 천상의 장수가 마졸들을 박살 내는 것처럼 용맹하게 검을 휘둘렀다.
뇌성벽력이 치고 해일이 덮쳐 마졸들을 일거에 휩쓸어 갔고, 도현은 위풍당당하게 천상의 장수가 되어 하늘로 비상해 갔다.
이때 가야금 소리가 부드러워지자 도현의 검이 또 변화를 일으켰다. 한없이 정적인 가운데 두 자루의 검이 서로에게 구애를 하는 것처럼 음양의 조화를 이루며 남녀 간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해 냈다.
수려한 외모의 도현이 검뿐만 아니라 온몸을 이용해 펼치는 칼춤은 카세트테이프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고, 황순옥과 허진국은 탄성을 터트리며 기뻐하다가도 슬픈 곡조에 도현의 검이 변화를 일으키면 덩달아 슬퍼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공중제비를 돌며 목검을 언 땅 속에 집어넣은 도현은 한쪽 무릎을 꿇은 착지한 모습 그대로 한동안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노부부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즐거움을 주고자 시작했던 칼춤이였는데, 가야금 소리가 담고 있는 희로애락에 이끌려 그 자신조차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몰입됐다.
새벽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이런 깊은 감정의 몰입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 같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가야금 소리에 맞춰 췄던 칼춤을 머릿속에 정리해 가던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일어섰다.
노부부는 인자한 얼굴로 도현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았습니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그만큼 다시 볼 수 없는 진기한 광경이었어.”
“난, 죽은 아들이 생각났어요.”
황순옥이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자 허진국은 따뜻하게 아내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좋아서 흘리는 눈물이야. 자네가 추는 춤사위에 이상하게 오래전 죽은 아들의 모습이 겹쳐졌거든. 아마도 가야금 곡조 중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곡이 있었는데, 자네가 훌륭히 표현해서 그런가 봐.”
눈물을 닦던 황순옥은 주름진 손으로 박수를 보냈고, 곁에 있던 허진국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같이 박수를 쳤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칼춤이었어.”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도현은 목검을 챙겨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름의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던 것처럼,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으로 표현한 감정들이 아직 그의 몸속에 남아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폭포로 향한 그는 목검을 들고 가야금 곡조에 맞춰 펼쳤던 아까의 칼춤을 반복해서 펼쳤다.
‘검은 단순히 강하고 빠르고 무겁고 호쾌한 것만이 아니었어. 기쁨과 슬픔, 노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것을 담아서 보여 줄 수가 있는 내 마음의 거울 같은 거야.’
스르륵 눈을 감은 도현은 마당에서 보였던 진한 감정들을 다시 담아 펼치며 그것들을 하나씩 정리해 갔다.
‘그래, 이것을 호검술 후반부 검식으로 만들자.’
그로부터 며칠 동안 도현은 우연한 기회에 얻은 감정의 검들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일정한 초식으로 만들어 갔고, 그것이 모두 끝났을 때는 어느덧 새해가 밝아 왔다.
목검
“이제 내공의 벽도 사라졌고, 스톤만 남았는데…….”
취영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 도현에게 용주가 웃으며 말했다. 겨울 산행에서 설마 단번에 무언가를 얻어서 내려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도망치는 빛을 잡아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은 용주나, 홍영이 듣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구태여 도현도 그것을 말로써 자세히 풀어 설명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깨달음은 빛으로 나타났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별이 될 수도, 바다가 될 수도, 혹은 어둠이 되어 나타날 수도 있었다.
‘깨달음은 끝이 없어.’
도현은 새 단전을 얻고 검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없이 깊어졌지만, 그것은 대장정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한석호가 홍콩에서 말한 진정한 고수의 세계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고수들의 세계에서 우뚝 서 있을 것 같은 태선군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까지는 아직 그가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 산 중 하나는 발을 굴러 땅을 진동시켰던 태선군의 막대한 내공이었다.
내공이 쌓일수록 도현은 그 당시 태선군이 발휘했던 여러 행동들이 얼마나 많은 내공이 필요한지 여실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호심공이 의외로 축기의 효과가 뛰어나 내공이 느는 즐거움을 맛보고는 있지만, 이계에서 몬스터를 잡아 내공을 상승시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용주가 말한 대로 내공의 벽이 허물어졌으니, 이제 다시 이계의 필요성이 더욱 커진 상황이다.
“내일이라도 당장 스톤을 팔겠다는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
용주가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말했다.
도현이 산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조 박사는 조카인 용주에게 연락을 해 스톤을 구한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도 된다고 허락을 했다.
아직 뉴질랜드에 있는 그는 귀국이 늦어질 것 같아, 먼저 연락을 한 것이다.
휴대전화를 꺼 놓고 산에서 지냈던 도현은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에는 이미 국내는 물론 해외 여러 사이트에 홍영과 용주가 스톤을 산다는 구매 글이 올린 뒤였다.
광고 글은 일전에 도현이 있을 때 결정된 대로, 2,000달러와 옵션으로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스톤의 사진도 올려놨는데, 조 박사가 뉴질랜드에서 이메일로 보내 준 것이다.
“기다리면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며칠 전 홍영은 상해의 어머니를 보고 왔는데, 중국 내 사이트 여러 곳에도 글을 남겨 놓았다.
“고마워요, 홍영 씨. 용주 너도 고맙다.”
“자샤, 고맙긴. 당연한 걸 가지고.”
주로 해외 사이트에 글을 올린 홍영과 달리 용주는 국내의 온갖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해서 스톤을 산다는 글을 올려놨다.
중고 거래 장터는 물론 친목 단체에도 올렸는데, 그러다 회원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너 그런데 왜 호심공이 내공을 만들어 주는 내공심법인 걸 말 안 했냐? 내가 그저께 밤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미안. 나도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어.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단전에 기를 모을 수 없기도 하거든. 실망감 주기 싫었다.”
“흐흐흐.”
관장실에서 홍영이 타 준 차를 마시던 용주가 의자에 앉은 채 악당처럼 음산하게 웃었다.
“도현이 너도 예상치 못했지? 설마 가장 자질이 떨어져 보이는 내가 동공을 수련하다 제일 먼저 내공을 맛볼 줄이야.”
이틀 전 용주는 호심공을 수련하다가 몸이 부웅 뜨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 직후, 한 가닥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들어 와 배꼽 밑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다.
내공이 생성된 것이다.
“나나 철호 오빠는 내공과는 인연이 없나 봐요.”
담담하게 말했지만 어딘지 아쉬움 가득한 홍영의 표정에 자랑하듯 말을 늘어놓던 용주가 귀밑머리를 긁적였다.
“곧 생기겠죠. 아직 모르잖아요.”
“용주 말대로예요.”
도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히 홍영을 응시했다.
“실망하지 말고 하던 대로 호심공을 계속 수련해요. 사람에 따라 기가 모일 수 있는 시점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알았어요.”
홍영은 그윽한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했다. 답답해하던 그가 겨울 산행을 통해 성장해서 돌아온 게 너무 기뻤다.
“용주야, 너도 이제 겨우 시작이야. 내공이 생긴 것과 사용하는 건 전혀 별개거든.”
“어떻게 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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