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디 임팩트 6권 12화
“아니야, 네가 무슨 잘못이겠니. 용주가 너를 걸고넘어지니까 너도 어쩔 수 없이 거짓말에 맞장구를 쳐 줄 수밖에. 용주 이 녀석을 그냥!”
“제 잘못이에요. 용주에게 짐을 넘긴 건 저니까요.”
장철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건 내 잘못이다.”
“예? 형 잘못요?”
“오래토록 도장을 외면하고 내 살길만 찾았던 과거의 내 잘못.”
시무룩한 그의 표정에 도현이 당황하며 얼른 말했다.
“형, 그래서 그런 거 아니에요.”
“좀 더 잘하마, 형으로서. 비록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지만.”
“이야기 이상한 쪽으로 간다. 자꾸 그러면 저 화내요.”
“화내지 마라. 미치광이로 돌변하는 너 보기 싫다.”
장철호의 농담에 도현과 홍영은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홍영아, 차 한 잔 더 줄래?”
김이 올라오는 따듯한 차를 보며 장철호가 조용히 물었다.
“홍콩에 간 것도 진짜 이유가 따로 있는 거지?”
“네.”
도현은 정체된 내공 때문에 한석호를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기예 잡술서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 이야기도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세상에 왜 이렇게 내공을 가진 고수가 많아? 그 복면인이라는 녀석도 그렇고.”
“그러게요.”
“겨울 산행에서 얻은 게 많았다고 아까 그랬는데, 그럼 혹시 깨달음을 얻은 거냐?”
도현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 같은 녀석. 축하한다.”
“고마워요, 형.”
차를 반쯤 마신 장철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공 한번 써 봐. 구경이나 해 보자.”
도현은 벽에 걸린 진검을 뽑아 도장 한가운데 섰다. 그리고 호검술에 내공이 가미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철호의 코앞에서 생생히 보여 주었다.
‘운다! 외로운 호랑이가 산천초목이 떠나가라 울부짖고 있어!’
깨달음을 얻은 도현의 검은 호검술 전반부 12식이 보여 줄 수 있는 극치의 검술을 펼쳐 보이며 장철호의 심혼을 옭아맸다.
그가 알던 호검술이 아닌 전혀 다른 호검술이었다.
넋을 놓고 지켜보던 장철호는 검의 환영이 사라지고 도현이 천천히 검을 회수하자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빌어먹을. 관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 훌륭한 검을 보셨어야 하는데.”
산적같이 생긴 험악한 인상의 장철호가 울고 있는 모습이 슬퍼 보여 홍영은 돌아서서 도복 소매로 눈물을 닦아 냈다.
“철호 형.”
도현이 다가와 말했다.
“아버지는 이미 보셨을 거예요.”
“그렇겠지?”
눈물을 거둔 장철호는 벽에 걸린 백남식 관장의 사진을 길게 바라봤다.
“도현아, 호심공을 익히면 내공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지? 안 생길 수도 있고.”
“네. 좌공으로 20년이 걸렸지만, 동공으로 하면 그 시간이 훨씬 단축돼요. 이미 생긴 사람도 있고요.”
“홍영인가 보구나. 축하한다, 홍영아.”
“용주예요.”
“…….”
장철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아니에요. 용주가 먼저 생겼어요.”
“동공을 홍영이나 내가 훨씬 더 길게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그것과는 상관없나 봐요. 하지만 너무 실망 마세요. 늦게라도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꼭 내공이 아니라 해도 형의 어깨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동공은 계속 수련을 하셔야 해요.”
“그렇긴 하지만. 내공이 꼭 생겼으면 좋겠는데.”
도현이 펼치는 호검술에 마음이 빼앗긴 그는 혹시 자신은 내공을 가질 수 없는 체질이 아닐까 마음이 흔들렸다.
“형, 그런데 아까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뭐였어요?”
“응? 아, 그 얘기.”
“놀라운 이야기라고 하셨잖아요.”
홍영까지 가까이 와서 빤히 쳐다보자 장철호는 난감해졌다. 도현이 엄청난 내공을 가졌고 차원 이동을 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낮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세상 살면 그런 운 좋은 상황도 한 번씩 벌어지곤 한다는 병원 의사의 냉소적인 대답도 뒤늦게 생각났다.
‘그래, 외공의 효과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 난 운 좋은 놈이었는지도 몰라.’
“형, 뭔데요?”
“아무것도 아니야.”
“예?”
“생각해 보니까, 지금 말할 게 아닌 것 같아. 나중에 더 확실해지면 말해 줄게.”
“형도 참. 알았어요.”
“도현 씨, 이제 그만 올라가요. 저녁 교육 끝날 시간이에요.”
“벌써 그렇게 됐어요?”
도현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준비한 케이크를 들고 위로 향했다.
“관장님, 저 감동했어요. 저희를 이렇게 생각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김유진이 눈시울을 붉히며 불이 꺼진 도장 한가운데서 촛불이 밝혀진 케이크를 내려다봤다.
케이크에는 ‘2달 축하, 이호선, 김유진’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어려운 교육을 잘 따라와 줘서 고맙습니다. 검을 배우고 싶다는 진실 된 마음이 없었다면, 참기 어려운 시간이었을 겁니다. 물론, 여기 우리 조 사범도 노력을 많이 했지만요.”
도현의 말에 용주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그럼. 내가 수위 조절을 잘했지. 에프엠대로 했으면 호태식 씨 빼고 다 도망갔을 거야.”
용주의 독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말하는 스타일을 이미 다 알 만큼 이호선이나 김유진, 그리고 호태식은 가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호태식 씨는 일주일 뒤에 케이크를 준비하죠. 그때가 두 달이니까요.”
“아니에요, 관장님. 전 괜찮습니다.”
호태식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래도 공평해야죠.”
사범인 용주가 웃으며 말하자 호태식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 불 끄세요.”
도현의 말에 이호선이 김유진에게 턱짓을 했다.
“꺼.”
“피디님이 꺼요.”
“네가 제일 고생했잖아. 얼른 꺼.”
“그럴까요?”
김유진은 은은한 불빛을 사방에 비추는 촛불을 입바람으로 단번에 꺼 버렸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도장의 불을 켠 도현은 준비한 또 다른 선물을 이호선과 김유진에게 건넸다.
“관장님, 드디어 저희들이 검을!”
이 피디와 김 작가는 감격에 찬 눈빛으로 도현을 쳐다봤다. 그들의 손에는 광채가 나는 목검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부터는 목검 수련 과정이 시작될 겁니다.”
“와아아!”
얼싸안고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에 용주도 옛날 생각이 났다. 그 역시 지루하게 느껴졌던 기초 체력 과정을 통과하고 백남식 관장에게 목검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식 가요!”
김 작가가 흥에 겨워 소리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험악하게 생긴 장철호가 눈을 부라렸기 때문이다.
“이제 막 목검을 든 주제에 너무 들떠 있는 거 아니야?”
풀어지려는 이호선과 김유진의 마음가짐을 말 한마디로 싸잡은 장철호는 도현을 쳐다봤다.
“그래도 저런 말이 나왔는데, 회식은 고려해야죠, 관장님?”
장철호의 높임말에 도현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회식.”
“만세!”
좋아하는 김 작가를 보며 호태식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백 관장은 도장을 돈 벌기 위해서 연 게 아닌 것 같아. 그럼 왜 연 거지? 겨우 우리 세 명을 가르치기 위해서 버리는 게 너무 많잖아?’
그는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회식은 싫어하지 않았다.
삼겹살에 호프집까지, 그는 신 나게 놀았다.
중간에 장철호가 일어서고 용주까지 갔지만 그는 끝까지 놀았다.
그러다 사람들과 헤어져 대리운전 기사를 부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는데, 어딘지 체형이 눈에 익숙한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호태식은 호프집에서 마신 술이 확 깨 버렸다. 그를 스쳐 지나간 검정색 오토바이 헬멧을 쓴 남자가 누군지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오토바이는 호프집에서 헤어진 도현과 홍영을 쫓고 있었다.
“빌어먹을. 형님, 그건 아니라고 했잖아요!”
전화를 안 받는 서지철을 향해 호태식은 화를 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헬멧을 쓴 서지철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해결사를 하면서도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이혼과 함께 깨지면서, 그에게는 이제 해결사라는 직업의식만이 버티게 해 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난 무너지지 않아!’
호프집에서 나온 도현이 홍영과 함께 골목길로 걸어 들어가자 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밤늦은 거리는 사람도 드물어서 일을 벌이기에 나쁘지 않았다. 녹지 않은 빙판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오토바이를 운전한 그는 골목길 입구에 섰다.
‘한 방이면 돼!’
눈 가리고 사과를 벴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취 총에서 발사되는 빠른 주삿바늘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됐다.
호태식이 하도 옆에서 경기를 일으키며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여러 말을 늘어놓아서 그렇지, 결국 백도현은 싸움 좀, 아니 아주 잘하는 녀석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오늘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이 지겨운 싸움도.’
부르릉.
골목에 주차된 차량들 옆을 걷고 있는 도현을 노려보던 그는 오토바이를 몰아 골목 안으로 진입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도현의 넓은 등을 보며 그는 가죽점퍼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마취 총이 만져졌다.
‘5초면 돼. 치고 빠지는 데는.’
오토바이에는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도 있었다. 도현이 휘청거리는 순간 달려들어서 무자비하게 녀석을 두들겨 팰 참이었다.
같이 걷는 여자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칠 때쯤이면 이미 모든 게 끝난 상태에서 자신은 유유히 현장을 벗어나면 된다.
‘실수하면 안 돼.’
도현에게 한번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그는, 도현이 가까워질수록 호흡이 거칠어지며 긴장감이 높아졌다.
‘녀석의 곁을 지나치며 가볍게 마취 총으로.’
그가 막 마취 총을 꺼내려는 그 순간, 도현이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오토바이의 밝은 라이트 빛을 꿰뚫고 들어오는 그의 강렬하고 차가운 눈빛에 서지철은 가슴이 철렁해 그만 빙판길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제기랄!’
끼이이익. 우당탕탕.
“어머, 어떡해요. 오토바이가 미끄러졌어요.”
도현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홍영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도현은 길가에 쌓인 눈에 오토바이와 함께 처박힌 서지철을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그는 오토바이 소리에 뒤를 돌아본 것뿐인데, 그 직후 오토바이가 미끄러진 것이다.
그가 한 행동이라고는 라이트가 너무 강해서 눈에 약간 힘을 준 것뿐이었다.
“움직이실 수 있으세요?”
도현이 부축하려 하자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서지철이 흠칫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니, 도와 드리려고요.”
도현이 웃으며 쓰러진 오토바이를 세워 주었다.
“도현 씨, 이것도.”
홍영이 땅에 떨어진 야구방망이를 주워 왔다.
“혹시 제가 미끄러지는 데 영향을 준 건 아니죠?”
“…….”
헬멧을 쓴 서지철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목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에 혹시 미끄러졌나 했습니다. 조심하세요. 골목에 빙판이 많아요.”
서지철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도현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눈빛 하나에 쫄아서 기회를 날려 버리다니, 젠장.’
그는 털썩 주저앉아서 자신의 한심한 행동을 자책하다가 가죽점퍼를 뒤졌다.
‘어디 갔지, 마취 총이?’
그는 절뚝거리며 조금 전 처박혔던 눈 더미로 향했다. 눈을 여기저기 파헤쳐 봤지만,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특수 개량된 마취 총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짜증이 왈칵 솟구쳤다.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주변을 둘러보며 고함을 치던 그의 시선이 골목길에 주차된 차로 향했다.
몸을 숙여 차 밑을 보니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취 총이 보였다. 헬멧을 벗은 그는 낑낑대며 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 마취 총을 손에 쥐었다.
‘이 고생을 하면서도 결실을 못 맺다니. 정말 분하다.’
한기가 올라오는 땅바닥에 누워 자신의 신세타령을 하던 그는 뒤에서 들리는 오토바이 시동 소리에 흠칫하며 서둘러 차 밑에서 빠져나왔다.
세워 놓은 그의 오토바이 위에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 녀석이 떡하니 타고 그를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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