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디 임팩트 6권 14화
“형님, 딴생각하시지 말고요, 몸조리 잘하셨다가 건강하게 퇴원하세요. 아니, 이게 뭔 꼴이에요. 교통사고라니.”
“백 관장은?”
“왜요, 또 그 사람은?”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호태식은 사과를 와작와작 씹으며 조용히 대꾸했다.
“미국에 갔어요.”
“미국?”
“네, 홍영 씨하고 며칠 전에요.”
“팔자 좋군. 누군 병원에서 TV나 보고 있는데.”
서지철이 낮게 웃으며 이를 갈았다.
“또, 또 그러신다. 그만큼 당했으면서.”
“뭘 당해! 난 그놈에게 당한 게 아니라 교통사고를 당한 거야!”
“큰누나에게 얼마 전 백 관장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줬거든요. 큰누나가 백 관장을 보고 뭐라는지 아세요?”
호태식은 서지철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이승과 저승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한 사람이래요. 한마디로 사람이 아니래요.”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사람이 아니면 귀신이야?”
“불가사의한 존재래요. 원래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차라리 외계인이라고 하지?”
비아냥거리는 서지철에게 호태식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근데 형님,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하고 얼른 가. 귀찮으니까.”
“굿 한번 받아 보실래요?”
“나가, 이 새끼야!”
서지철이 베개를 집어 던졌다.
“공개적으로 찾는 게 효과가 있긴 하군.”
조 박사는 도현의 왼팔에 다시 생긴 타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스톤의 힘을 제가 먼저 흡수했습니다.”
“죄송은 뭐. 이미 자네와 약속한 사항 아닌가? 다음에 찾는 건 내가 연구하는 데 사용하면 되지.”
스톤을 구했을 때 처리 문제를 두고, 그들은 사전에 약속을 했었다.
“아프리카에 이어 네팔, 이번에는 미국이라. 스톤이 아무래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게 확실해졌군.”
조 박사는 스톤의 가치가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게 두려웠지만, 반면에 찾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스톤을 구할 수 있게 되자 앞으로의 연구에 기대감이 상승했다.
“이계에는 언제 갈 건가?”
“내일 가려고 합니다.”
“흥분되겠군.”
도현은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조심하게. 가서 마음껏 힘도 얻고.”
“고맙습니다, 박사님.”
가평에서 돌아온 도현은 머리를 정리했다. 딘과 리드만이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 이질감이 느껴져서는 곤란했다.
“어때요?”
홍영이 가위를 내리고 거울 속 도현에게 물었다.
“비슷해요.”
도현이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이계에 있을 때와 흡사한 머리스타일을 만든 도현은 그날 밤, 홍영과 용주, 장철호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당을 나서며 장철호는 도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살아서 돌아와라.”
“형, 너무 비장하잖아요.”
“그런가?”
장철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옆에 서 있는 홍영과 용주를 둘러봤다.
“너희들은 도현이가 이계에 갈 때 어떻게 작별 인사를 했냐?”
“손 흔들면서 잘 다녀오라고요. 돈 되는 것 있으면 구해 오라는 말도 했고요.”
용주가 별거 없다는 식으로 가볍게 말했다.
“홍영이 너는?”
“마음으로 응원을 했어요.”
“에이, 마음이 아니지. 키스했잖아요.”
용주의 지적에 홍영이 도현을 응시했다.
“그건…… 도현 씨가 내게 했죠.”
“자아, 그 얘기는 그만해요.”
당황한 도현은 중간에 말을 끊고 장철호를 봤다.
“잘 다녀올게요. 너무 걱정 마시고요.”
“그래, 큰 걱정 안 할게. 믿는다.”
장철호는 지옥으로 가는 동생을 보내는 것처럼 헤어지며 몇 번을 뒤돌아봤다.
“도현아, 살아서 와야 한다!”
문을 열고 한 걸음 디디면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은 비행기와 자동차가 돌아다니지만, 문밖은 검과 마법의 시대다.
게이트를 넘어온 도현은 멈춰진 이계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를 기다리며 여관방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딘과 리드만을 응시했다.
남부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몰락한 영주 딘과 딘을 모시는 사제 리드만.
‘이렇게 다시 보게 되는군요.’
영원히 못 볼 수도 있다는 아쉬움 속에 헤어졌던 그들을 다시금 보자, 도현은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잠시 뒤 멈췄던 시간이 정상으로 흘렀고, 도현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함께 여관을 나섰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추운 겨울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제복 등에 매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쓴 도현은 앞서 가는 딘과 리드만이 견습 사제 신분 문제로 또다시 다투기 시작하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급히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의 한마디에 딘과 리드만이 입을 다물며 좌우를 살폈다.
노스리어 상점 거리는 술집이나 도박장을 찾는 사람이 적을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영주님, 이제 그만하시고 받아들이십시오. 신전 사람들이 다 착해서 영주님을 견습 사제라고 함부로 깔보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넌지시 말한 리드만은 욱하려는 딘의 시선을 피해 얼른 앞서 걸어갔다.
“도현.”
“네, 영주님.”
“아무리 생각해도 리드만이 일부러 견습 사제라는 신분을 만들어 온 것 같지 않나?”
“설마요.”
“아니야. 자네도 아까 듣지 않았나, 신전의 대사제 휴고스가 리드만과 아는 사이라고. 그럼 견습 사제가 아니라 동등한 수행 사제 정도로 하면 좀 좋아?”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도현은 사제복을 입은 채 투덜대는 딘을 달래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리드만에게 걸어갔다.
얼마 뒤 그들은 대사제 휴고스가 구해 준 사제 증표를 이용해 수십여 명이 지키고 서 있는 육중한 성문을 무사히 통과해 성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곳이 진정한 다크캐슬.’
성은 작은 도시 규모였다.
수많은 석조 건축물과 넓은 길.
성벽 아래로 끝없이 보이는 병사들의 숙소들.
헬구스가 준 성의 배치도 그림에서 느꼈던 크기를 훨씬 상회하는 성의 규모였다.
예전 그는 처음 이 성을 멀리서 봤을 때 수천 명은 살 거라고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틀렸다. 병사들의 수만 해도 그 정도는 될 것 같았고, 그들의 가족과 일반인들까지 생각하면 성내의 거주민의 수가 몇 배는 증가할 것이다.
도현은 거리의 바닥을 살폈다.
바닥에 깔린 돌은 빗물이 새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촘촘해서 고대인들이 성을 어떻게 설계하고 만들었는지 그 정성을 엿볼 수가 있었다.
잘 짜인 계획도시의 구조물들을 보는 듯한 착각을 받으며 성 내부를 구경하던 도현은 성 주민들이 사제복을 입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는 걸 발견했다.
스므차 성주의 아내가 일곱 신의 열렬한 신자라더니, 그 영향을 일반 주민들도 상당히 받는 것 같았다.
“영주님, 느끼셨지요?”
리드만이 발걸음을 늦추며 작게 딘에게 속삭였다.
“뭘 말인가?”
“사람들의 시선요. 친밀하잖아요. 존경도 담고 있고. 사제의 직분을 이용하면 30년 전 스므차 성주가 감춘 지하 유적을 찾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제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 이용할 생각만 하는가?”
영주의 지적에 리드만이 풍성한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신은 융통성이 있는 분입니다.”
“고마우신 분이군. 아무튼 수고했네. 견습 사제지만, 자네 말대로 성을 조사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신분이야.”
“이제 화가 풀리셨습니까?”
“처음부터 화 안 났었어.”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영주님을 위해서 이 모든 걸 하고 있는데, 속 좁게 제게 화를 내실 분이 아니시죠.”
“그럼. 내가 누군가? 영주 아닌가. 난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도현은 딘의 말에 웃음을 참으며 깨끗한 거리에 조성된 시장을 지나 3층 높이의 건물들이 밀집된 지역을 통과했다.
그러자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오며 놀랍게도 숲이 등장했다.
성의 입구부터 조금 전 거쳐 온 데까지는 석조 건축물들이 비교적 조밀하게 밀집된 공간이었지만, 지금 도현의 시선에 들어오는 공간들은 전혀 달랐다.
흰 눈이 뒤덮인 숲과 한쪽에 흐르는 폭이 좁은 시냇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림 같군.”
딘이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나도 다음에 성을 지으면 안에 이런 공간을 만들어야겠어.”
“건축 비용이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그러면 이곳을 내가 차지할까?”
“스므차 성주를 어떻게 대적하시려고요. 그는 30년 전부터 대륙을 호령하던 강자인데요.”
리드만의 대꾸에 딘이 미간을 좁혔다.
“스므차가 몇 살이나 됐지?”
“아마 영주님보다 배는 많을 겁니다.”
“기다렸다 그가 죽으면 생각해 봐야겠군.”
“스므차는 얼마나 강한 사람입니까?”
도현이 묻자 딘이 헛기침을 하며 숲을 응시했다.
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숲 가운데에는 스므차의 대저택이 존재했다.
“아마 나와 자네가 폭주를 하더라도 그를 감당하기는 어려울걸. 그는 이미 30년 전에 넘볼 수 없는 강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도현도 소문으로 얼핏 듣기는 했지만, 딘의 입을 통해 다시 한 번 듣자 그 느낌이 새로웠다.
“지하 유적을 찾는다고 해서 스므차와 싸우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해. 내가 영주 체면에 이런 비겁한 말을 하는 건 자존심 상하지만, 그는 그 정도 되는 인물이야.”
잠시 모자를 벗고 숲의 경치를 감상하던 딘은 모자를 다시 쓰고, 오른쪽 길로 걷기 시작하는 리드만의 뒤를 쫓았다.
도현은 헬구스가 준 성 내부 배치도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정면에 보이는 숲으로 난 길로 가면 스므차의 대저택이 나오고 리드만과 딘이 걸어가고 있는 오른쪽 길로 가면 그 끝에 신전이 있다.
스므차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사람임은 분명해 보였다.
‘만약 그가 사는 대저택에 지하 유적이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과연 그와 싸우지 않고 유적을 조사할 수 있을까?’
도현은 잠시 더 숲을 지켜보다가 신전으로 향하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긴말하지 않겠다.”
대사제 휴고스는 거만한 눈빛으로 자신의 집을 찾아온 도현과 딘을 둘러봤다.
“리드만의 수발이나 드는 너희들을 내가 견습 사제라는 높은 직분으로 불러들였으니, 나를 실망시키지 말고 떠날 동안 신전에서 충실히 봉사해. 알겠지?”
“명심하겠습니다, 대사제님.”
도현은 허리를 살짝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넌 왜 대답을 안 하는 것이냐! 생긴 건 천한 놈이!”
휴고스가 막말이 섞인 호통을 치자 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견습 사제가 싫어? 싫으면 말해. 당장 성을 나가도록 조치를 취해 주지.”
“아닙니다.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딘은 억지로 대답을 쥐어짰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도현과 리드만은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커흠.”
뒷짐을 진 휴고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리드만에게 다가갔다.
“난 약속을 지켰으니, 자네 또한 약속을 지켜야 할 거야.”
“여기서 지내는 동안 대사제님의 명성이 올라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치료의 권능이 휴고스보다 한 수 위인 리드만은 휴고스가 요청 시 두말 않고 치료의 권능을 발휘해 주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고맙군. 기대하겠네. 만약 약속을 어기거나 저 견습 사제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난 당장 자네들을 쫓아낼 거야.”
“정말 그러실 수 있습니까?”
리드만이 은근히 바라보자 휴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30년 전 일로 나를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말게. 난 여기서 존경을 받는 신분이고 친구들이 아주 많아. 특히, 성주님의 아내 되시는 디엘르 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 내가 자네와 저들을 여기 머물게 해 주는 건, 자네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야. 알겠나?”
“알겠습니다.”
리드만은 휴고스를 더 이상 자극하지 않고 정중히 대답하며 일행과 함께 그의 집을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영주님?”
리드만이 살짝 불안한 눈빛으로 굳은 표정의 딘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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