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디 임팩트 6권 15화
“휴고스와 자네, 친하지 않지?”
“그렇습니다.”
“잘됐군. 나중에 이곳을 떠날 때 마음 편하게 손을 쓸 수 있겠어.”
“설마, 죽이시려고요?”
리드만이 놀라며 물었다.
“죽이다니. 아무렴 내가 마음 좀 상했다고 해서 함부로 검을 들겠나? 그저 조용히 손 한번 봐 주겠다는 거야. 어찌 됐건, 그 사람 도움을 받는 건 사실이니까.”
“아니, 그렇다면 그냥 무시하시지요.”
“아니지, 아니야, 이보게 도현.”
대사제 집에서 얼마 안 떨어진 웅장한 신전을 바라보던 도현은 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네.”
“리드만이 치료의 권능을 발휘해 대사제의 입지를 강화해 준다면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 아닌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픈 사람을 단번에 치료하는 능력은 말 그대로 능력 있는 사제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니까요.”
“들었지 리드만? 자네가 그 정도 일을 해 주면 내가 이곳을 나갈 때 저 사람을 손봐 줄 명분은 충분하지 않나? 비록 저 사람이 우리를 도와줬다고 하지만, 자네는 그에 못지않은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우리 숙소는 어딘가? 앞장서.”
리드만의 말을 끊은 딘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웅장한 신전을 따라 걷다 그 뒤편에 위치한 사제관으로 들어갔다.
2층 규모의 사제관에는 열 명의 사제들이 거주하며 신전을 관리했고, 예배를 관장하는 대사제를 옆에서 보좌했다.
1층 복도 끝에 있는 방 두 개가 딘과 도현이 앞으로 머물 공간이었다.
“자넨 어디서 자고?”
딘의 물음에 리드만은 헛기침을 하며 창밖으로 보이는 그럴듯한 2층 석조 건물을 가리켰다.
“거긴 누가 사는데?”
“저 혼자 머물고 있습니다.”
“뭐야?”
딘은 좁은 방과 딱딱한 침대를 둘러봤다.
“난 여기서 자고, 자넨 저렇게 큰 집에서 혼자 머문다고?”
“휴고스가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인지, 집을 하나 마련해 줬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영주님. 여기 사제들과 인사 나누십시오.”
“어딜 가!”
딘이 손을 뻗자 리드만이 황급히 도현의 등 뒤로 숨었다.
“도현, 우리 영주님 좀 잘 부탁하네. 난 휴고스와 자주 붙어 다녀야 할 입장이라서 말이야. 사제들과는 눈치껏 알아서 지내라고. 나중에 보세.”
리드만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고, 딘은 딱딱한 나무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하 유적을 빨리 찾아서 여기를 나가야겠어. 아무래도 피곤한 일이 많이 일어날 것 같아.”
“빨리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요.”
도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방문을 열었다.
“영주님, 그럼 전 맞은편 방을 사용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도현은 복도를 지나 맞은편 방으로 들어갔다. 등에 메고 있던 긴 나무 상자를 내려놓은 그는 창문을 열어 밖을 봤다.
사제관 뒤로는 나무 몇 그루가 보였고, 그 뒤에는 검은 빛깔을 띤 높은 성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가깝군.”
신전과 성벽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성벽 위를 순찰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몸을 돌려 조금 전 그가 내려놓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검은 가죽 갑옷과 검 두 자루가 들어 있었다.
대저택
견습 사제로 들어온 도현과 딘은 신전의 잡다한 일에 동원 됐다.
사제관에 딸린 주방에서 요리를 책임지는 사제를 도와 물을 나르거나 음식 재료들을 시장에서 사 오기도 했고, 눈이 내리면 신전 주변의 눈을 깨끗이 치우기도 했다.
심지어 대사제 휴고스의 집 안 청소까지 그들의 몫이었다.
“저쪽도 닦으시오.”
팔짱을 낀 젊은 사제의 지시에 도현은 군말 없이 마른걸레로 가구와 집기를 닦았다.
“양탄자에 먼지가 많은데.”
“털어 오겠습니다.”
도현은 바닥에 깔린 질 좋아 보이는 양탄자를 돌돌 말아 집 밖으로 나갔다.
성에 들어온 지 4일째, 도현은 열심히 부려 먹는 신전 사제들에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했다.
젊은 사제들은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고, 나이가 좀 있는 중년의 사제들은 30년 전 스므차 성주가 이 성을 차지할 때 어리지만 지켜봤던 사람들이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그들로부터 지하 유적과 관련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달. 그 안에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해야 돼. 헬구스의 말대로 정말 스므차 성주가 30년 전 이 성을 차지하며 지하 유적을 발견했는지, 아니면 뜬소문인지.’
무한정 성에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게이트를 열지 않아도 타투의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을 지난번 경험으로 깨달은 이상, 그는 이계에서의 시간을 사용하는 데 좀 더 신경을 써야만 했다.
폭주 현상을 해결하는 게 필요하긴 하지만, 정 안 되면 몬스터를 잡아서 내공이라도 늘려서 돌아가야만 한다.
북쪽 몬스터 지역엔 그가 상대해 보지 못한 강한 몬스터들이 아직 수두룩해서, 이번 기회를 잘만 사용하면 엄청난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도현은 커다란 양탄자를 쫙 펼쳐서 허공에 탁탁 털며 리드만의 집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사제복을 입은 딘이 물통을 휘두르며 집을 막 나오고 있는 리드만을 쫓아가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도현이 휘파람을 크게 불자, 딘은 리드만을 그냥 보내 주며 그에게 다가왔다.
“허험, 견습 사제복을 입고 있으니까, 행동도 딱 고 정도 수준에서 나오는군.”
물통을 들고 리드만을 쫓아다닌 게 쑥스러웠는지 딘이 어색하게 웃다가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대사제 집엔 이상한 점이 없나?”
“다는 둘러보지 못했지만,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들은 가까운 곳 먼저 탐색을 하고 있었다.
리드만이 얻은 정보에 따르면 신전과 그 주변 여러 건물들은 30년 전 스므차가 이 성을 차지한 후, 새롭게 조성된 건물군들이었다.
성내 건물들 대부분이 고대인의 건축물들을 보수 유지한 것인 반면, 신전과 그 주변 건물들은 완전히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충분히 의심이 갈 대목이었다.
“지하 유적의 입구를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그 위에 신전과 여러 건물들을 지은 것일 수도 있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구태여 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현은 가까이 있는 신전을 쳐다봤다.
“신전을 짓는 데 많은 인력과 돈을 지출했을 텐데요. 저 같으면 다른 방법을 고려해 봤겠습니다.”
“두 가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일 수도 있지.”
“두 가지라면?”
도현이 먼지를 턴 양탄자를 다시 둥글게 말며 영주를 쳐다봤다.
“스므차는 지하 유적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고, 그의 아내인 디엘르는 척박한 다크캐슬에 일곱 신의 신전을 새로 건립해 신의 은총을 받고자 했겠지. 그녀 집안은 일곱 신에 대한 믿음이 대대로 강했으니까.”
“그녀의 집안에 대해 잘 아십니까?”
“내가 살던 남부 대륙은 일곱 신에 대한 믿음이 굉장히 강한 지역이고, 그녀는 그곳 대영주의 딸이네. 스므차와 결혼한 그녀가 이곳에 와서 신전을 세웠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지.”
“아, 그렇군요.”
도현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신전을 응시했다.
디엘르를 위해 신전을 지어 주면서 스므차는 자연스럽게 지하 유적을 감춘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이건 가정이네. 내가 너무 깊이 들어간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자네가 어제 말한 대로 스므차의 대저택이나 숲, 혹은 제3의 장소에 존재할 수도 있겠지.”
물통을 바닥에 내려놓은 딘은 팔짱을 끼며 신전을 비롯해 대사제의 집, 사제관, 리드만이 머무는 집 등을 둘러봤다.
“하지만 나를 진짜 혼란스럽게 하는 게 있어.”
“스므차 성주가 지하 유적을 발견했다면 왜 폐쇄시켰을까, 하는 점 말입니까?”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자네가 헬구스라는 친구에게 그 정보를 얻었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의혹이 일어났어. 그 이유가 뭘까 하고 말이야.”
도현도 궁금했지만 그 속사정이야 알 길이 없었다.
“꼭 발견해서 그 궁금증을 파헤쳐 보도록 하죠.”
도현은 뒤를 힐끔 보며 양탄자를 어깨 위에 걸쳤다. 양탄자를 털러 간 도현이 오래도록 안 돌아오자 감독을 하던 젊은 사제가 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대사제의 집 안을 청소하고 나온 도현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어 신전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갈 여유가 생겼다.
신전은 창문이 없었고, 오로지 청동 촛대에 꽂힌 수많은 촛불들만이 24개의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신전 내부를 은은하고 신비롭게 밝히고 있었다.
도현은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돌기둥을 지나쳐 신전 깊숙한 곳에 놓인, 높이 1미터 정도 되는 직사각형 돌 제단 앞에 섰다.
돌 제단 사면에는 24개의 기둥에 부조가 된 것처럼, 일곱 신이 조각되어 있었다.
‘리드만의 치료 능력은 정말 신이 부여해 준 걸까?’
도현은 제단을 손으로 만져 보며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믿음이 가져다준 신비한 마법의 다른 이름일 수도.’
마법사들조차도 신의 힘이라고 믿을 만큼 알려지지 않은 어떤 미지의 힘일 수도 있었다.
제단에서 한 걸음 물러난 그는 신전 바닥에 시선을 둔 채,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촛불의 은은한 빛이 반사될 만큼 바닥의 대리석은 매끄럽고 반들반들했다.
‘만약 신전 밑에 지하 유적으로 가는 통로가 있다면, 대리석을 뜯어내지 않고는 확인하기 불가능하겠군.’
딘의 말대로 의심이 가긴 했지만 확신하지 않는 한은 벌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자칫하면 신전에 온 자신들이 의심받는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다른 장소를 조사한 후, 마지막에나 손을 될 만한 곳이다.
“여기 있었군.”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리드만이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가세.”
“어디 말입니까?”
“스므차 성주의 대저택.”
“대저택요?”
도현이 깜짝 놀라며 쳐다보자 리드만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수염을 매만졌다.
“드디어 신이 내 기도에 응답을 해 주셨어. 내가 스므차의 집을 보고 싶다고 몇 차례나 기도를 했거든. 그랬더니 떡하니 기회가 찾아왔어.”
“스므차가 부른 겁니까?”
“아니, 그의 아내 디엘르.”
“그녀가요? 무슨 이유로 말입니까?”
도현은 리드만을 따라가며 물었다.
“자네와 영주님, 그리고 내가 성에 머물 수 있게 조치를 취해 주신 분이 누군지 아나? 바로 디엘르야. 대사제의 요청을 받고 수락을 해 주긴 했지만, 직접 얼굴을 보고 싶으셨나 보네.”
“그렇군요.”
신전을 나가자 사제관 주변에 말을 탄 여러 명의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체격이 장대하고 은빛이 감도는 철판 갑옷을 걸친 사람들이었다.
“로이 사제 왔는가?”
영주 딘은 도현을 로이 사제라고 불렀다. 인간 도살자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도현의 본명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말을 타실 수 있으십니까?”
은빛 갑옷을 입은 병사들의 우두머리가 물었다.
“물론이오. 자, 다들 타지.”
리드만의 손짓에 도현과 딘은 가벼운 몸동작으로 병사들이 끌고 온 빈 말 등에 올라탔다.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은빛 갑옷을 입은 다섯 명의 병사들이 출발하자 도현과 딘, 리드만도 서둘러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신전을 벗어난 여덟 필의 말은 얼마 뒤 폭이 좁은 시냇물을 건너 숲으로 난 길에 진입했다.
‘여기가 며칠 전 봤던 그 숲.’
도현은 부드럽게 말을 몰며 숲을 둘러보다가 숲 안쪽에서 집단으로 싸우는 수백 명의 사내들을 목격했다.
바지만 입은 그들은 우람한 상체 근육을 보이며 상대방을 향해 맨주먹을 거침없이 날리고 있었는데, 기합 소리도 비명 소리도 없는 그야말로 침묵 속에서 그들은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맨주먹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그들은 흉포하고 거칠어 보였다.
‘늑대처럼 싸운다.’
넓은 숲에서 집단으로 벌이는 그들의 주먹싸움은 어느새 도현이 탄 말 뒤로 멀어져 갔지만, 그는 그들의 원초적 주먹싸움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저 주먹에 무기를 들려 주면 일당백의 용사들이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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