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디 임팩트 6권 18화
“어떤 준비 말이오? 오합지졸 구역장들? 스므차의 친위대가 등장하면 그들은 모조리 도륙을 당할 텐데.”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아무튼 나는 이 싸움에 개입할 생각이 없소. 그렇게 전하시오.”
“주인님이 정말 섭섭해하실 겁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생각은 바뀌지 않소. 그리고 다시는 나를 한밤중에 찾아오지 마시오. 더 이상 그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주인님은 당신이 끝까지 거부하면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비버가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앞으로 쫘악 펼쳤다.
그 순간, 번쩍하는 빛이 날아와 플리어스의 머리를 박살 냈다. 사방으로 튄 피와 뇌수를 보며 비버는 차갑게 미소를 짓더니 방문을 열고 재빨리 집을 빠져나갔다.
“입막음을 하려고 왔던 거야.”
도현은 참혹한 플리어스의 죽음을 내려다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창에 매달려 안의 상황을 엿들은 그는 설마 비버가 플리어스를 이렇게 신속하게 곧바로 죽일 줄은 예상을 못 했다.
술잔을 쥔 채 죽어 있는 마법사의 시신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집을 나와 성벽 쪽으로 달려갔다.
‘윌벤슨이 스므차와 싸운다는 건, 이 성을 노린다는 말이잖아.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디언을 도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윌벤슨이, 이번에는 다크캐슬의 지배자 스므차 성주와 싸우려고 한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까?
어느 쪽의 편도 아닌 그는 마법사를 잔인하게 죽인 비버가 위장한 땅굴의 입구로 사라지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윌벤슨. 정말 어떤 자인지 꼭 한번 보고 싶군.’
계획
“이곳입니다.”
도현이 위장된 땅굴 입구를 가리키자 딘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돌아가세.”
신전으로 되돌아온 딘은 아직 잠을 자고 있는 리드만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리드만, 일어나게.”
“무슨 일입니까, 영주님?”
새벽잠에 취해 침대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를 딘은 한마디 말로써 깨웠다.
“이 성을 두고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눈을 껌뻑거리는 리드만에게 도현은 비버와 플리어스가 나눈 대화를 설명해 주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윌벤슨이란 자가 스므차 성주와 대적하겠다는 게?”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윌벤슨은 도시의 구역장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도시의 구역장들이 모두 그에게 힘을 보태 준다면, 도시 전체가 움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시 전체가?”
리드만이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크게 떴다.
“이제 잠 좀 깼으면 밖으로 나오게. 태평하게 잠을 잘 때가 아니야.”
딘과 도현이 침실을 나와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자, 리드만이 사제복을 입으며 허겁지겁 뒤따라왔다.
“내일이라도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아주 피곤해지는 거야. 리드만 자네는 스므차를 위해서 자네의 능력을 죽도록 발휘해야 할지 모르고, 도현과 난 자네 때문이라도 그 근처를 맴돌 수밖에 없는 거지.”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리드만이 감격한 어조로 말하자 딘이 헛기침을 했다.
“그럼. 자네가 잘못되면 내 수발은 누가 들겠나?”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저를 걱정하시는 마음 다 압니다. 영주님은 그런 분이시니까요.”
“낯간지럽게 왜 이러나? 그만하고, 아무튼 우리는 지금 중차대한 결정을 해야 돼.”
딘은 도현과 리드만을 돌아보며 말을 계속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이 성을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이 전쟁을 이용하거나.”
“이용하신다면, 혹시 양측이 싸우기를 기다린다는 말씀입니까?”
도현의 물음에 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우리가 할 수 없는 행동이나 탐색도, 혼란스러운 그때에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들이 정확히 언제 싸울 지만 파악하면 우리는 좋은 기회를 잡는 거지.”
“영주님, 성과 도시 사이에 전쟁이 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겠습니까? 그런데 그때를 이용한다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습니까?”
리드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 비겁한가? 어차피 벌어질 싸움을 좀 이용한다는 것뿐인데. 가만 보면 자네 아주 나쁜 사람이야.”
“사제를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신께서 벌을 내리십니다.”
“죽은 사람 시체에서 돈을 빼 가고 남의 물건은 자기 물건처럼 잘도 사용하면서, 싸움판을 이용 좀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냉정한 영주의 지적에 리드만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그런 건 모두 영주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알아. 아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하라고. 폭주를 해결하자고 남부 대륙에서 날 살살 꼬여서 여기까지 오게 한 게 대체 누군데 그래?”
“제가 그랬죠.”
리드만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둘 중 하나를 빨리 선택해서 결정해 보자고. 자네들은 아침이면 스므차 일가에게로 가야 하니까.”
딘은 도현과 리드만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전쟁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람 손들어 보게.”
도현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손을 들었다. 이미 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 자신이 전쟁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우스웠다.
만약 스므차의 대저택에 지하 유적으로 가는 입구라도 있다면, 평상시에는 들어가는 게 굉장히 힘들겠지만 전쟁 중에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게 한결 수월할 것이다.
“한 표가 나왔군. 리드만 자네는?”
“전 다른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차라리 오늘 도현이 보고 들은 사실을 스므차 쪽에 알려 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럼 작은 싸움으로 일단락될 수도 있다고 보는데요. 우두머리들 몇만 제거하면 되니까 말이죠.”
“리드만, 역사적으로 말이야, 어려운 싸움인 줄 알면서도 하려면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해. 특히 공성전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아마 윌벤슨이란 자는 성의 고위층 중에 자신의 편을 심어 두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설마 그렇겠습니까?”
“모르는 거네. 내부에 동조자가 있어 발각됐다는 사실을 윌벤슨에게 전한다면, 전쟁을 더욱 빨리 일으키는 자극제만 될 뿐이야.”
“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리드만, 많은 사람이 죽는 전쟁을 원치 않는 걸 나도 이해하네. 나도 그렇고, 여기 도현도 그렇다네. 하지만 한번 불타오른 욕심과 투쟁심은 재가 되기 전까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아. 설사 윌벤슨이나 우두머리가 제거되더라도 잠시 전쟁의 시기만 늦출 뿐이지 스므차를 상대로 한 전쟁은 한 번은 벌어지게 되어 있어.”
딘의 진지한 말에 리드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은 전쟁을 이용해야겠다고 벌써 마음을 정하셨군요. 알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결정됐군. 도현.”
“네.”
“윌벤슨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전쟁 시점을 알아볼 수 있겠나?”
꼭 필요한 정보였다. 그게 아니면 세 명이 한데 모여 대처하기 어려웠다. 한동안 깊게 생각을 이어 가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말게. 정 안 되면, 지하 유적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우리 셋이 그냥 도망가면 되니까.”
도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플리어스가 살해당했다고요?”
아버지 대신 성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스므차의 아들 나담은 4층 집무실에서 보고를 하는 행정관에게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부성주님. 현장을 조사한 경비단장의 말에 따르면 강력한 마법파로 인해 머리가 부서져 즉사를 했다고 합니다.”
“마법파라면 수준 높은 마법사나 발휘할 수 있는 공격 마법이 아닙니까?”
“예. 그래서 성내에 거주하는 몇몇 마법사들을 조사하려고 합니다.”
“신중히 접근하세요. 성내에 있는 마법사들은 모두 우리의 힘이니까.”
“네, 부성주님.”
행정관이 나가자 눈빛이 차가운 중년의 나담은 의자에서 일어나 넓은 창을 통해 숲을 응시했다.
도시는 매일같이 쓰레기 같은 도망자들이 온갖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지만, 성안은 안전했다. 범죄도 거의 없고.
그런데 마법사가 살해당했다. 예감이 별로다.
천장에서 내려온 줄을 잡아당기자, 집무실 밖에서 대기 중인 친위대장 마르탠이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플리어스가 죽었네. 소식 들었나?”
“예, 경비단장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가 죽었으니 숲이 슬퍼하겠어.”
플리어스는 수준이 낮은 마법사였지만 나무와의 친화력이 강해 대저택을 감싸고 있는 숲을 생기 있게 유지하는, 나름 중요하다면 중요한 일을 성에서 맡고 있었다.
“경비단장과 행정관이 잘 조사하겠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군.”
“범인을 찾아내겠습니다.”
금발의 마르탠이 묵직한 목소리로 절도 있게 말했다.
“그래 주게.”
나담은 마르탠에게 신뢰 깊은 시선을 보냈다.
30년 전 이 성을 차지할 때 혁혁한 전과를 올린 아버지의 친위대들은 그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금도 오직 아버지의 명령만 듣는다.
그에 반해 마르탠이 이끄는 300명의 친위대들은 온전히 나담 자신의 사람들이었다.
아버지인 스므차를 공격하라 해도 이유 불문하고 충분히 몸을 던질 인물들.
마르탠이 나가고 다시 홀로 된 그는 죽은 플리어스가 돌봤을 숲에서 시선을 떼며 의자에 앉아 책상 위를 봤다.
금으로 장식된 책상 위에는 본토 대륙에서 건너온 서신이 여러 통 있었다.
작은 왕국의 왕실과 규모가 있는 대영주들이 보낸 서신이었는데, 대부분 부친인 스므차 성주의 도움을 바라는 편지글들이었다.
‘내게 도움을 청하는 자들은 한 명도 없군.’
씁쓸한 미소를 지은 그는 편지들을 촛불에 한 장 한 장 모두 불태워 버렸다. 어차피 아버지는 30년 전 발견한 고대 지하 유적에 빠져서 다른 데 관심을 두실 분이 아니셨다.
“부성주님, 리드만 사제와 로이 사제가 인사차 왔습니다.”
집무실 밖을 지키는 친위대원의 보고에 그는 손짓을 했다.
“들여보내게.”
“예!”
커다란 문이 열리고 사제복을 입은 도현과 리드만이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카펫이 깔린 바닥을 걷던 도현은 리드만과 보조를 맞춰 인사를 올렸다.
“수행 사제 리드만입니다. 부성주님을 뵈어서 영광입니다.”
“견습 사제 로이입니다. 부성주님을 뵈어서 영광입니다.”
예를 다한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천장이 높은 집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지만 넓은 집무실을 그 존재감만으로 가득 채우는 장대한 체구의 부성주 나담이 푸른 눈으로 리드만과 도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오시오.”
“네.”
도현과 리드만은 나담의 책상 근처로 다가갔다.
“어머님은 일곱 신을 믿지만 난 아니오.”
의자에서 일어난 나담은 책상을 돌아 도현과 리드만 앞에 섰다.
“따라서 신의 계시가 있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다는 말도 난 믿지 않소.”
리드만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도현의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사제는 돈이나 밝히는 인간이고, 그 밑에 사제들은 게으른 자들. 그리고 당신들은 다크캐슬까지 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신의 계시로 왔다는 거요.”
나담은 리드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며 말을 이었다.
“뭐 좋소. 이유야 어쨌든 당신들로 인해 어머님이 만족스럽다면 난 그걸로 됐으니까.”
리드만은 일곱 신은 존재하니 믿으라는 말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나담의 왼손은 다섯 손가락이 모두 붙어 있었다. 멀쩡한 손은 오른손뿐이었다.
“이 손이 신경 쓰인다면 미안하오. 어렸을 때 화상을 입어서.”
“아닙니다, 부성주님.”
나담은 리드만을 보던 시선을 도현에게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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