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디 임팩트 7권 2화
다리가 잘려 쓰러져 있는 병사의 머리를 발로 으깨며 붉은 갑옷의 전사 한 명이 소리쳤다.
“부성주 나담! 스므차는 안 오는가?”
“그 뒤에 늘어선 네 친위대와 너로는 약해서 안 돼. 우릴 막으려면 스므차와 그 친위대가 와야지.”
수십여 명의 붉은 갑옷 전사들이 건들거리며 일렬로 늘어섰다.
“어이 나담, 당신 한 손이 병신이라던데, 우릴 감당할 수 있겠어?”
그들의 모욕적인 말에 나담의 표정이 더없이 차가워졌다.
“주둥이를 찢어 주마!”
“글쎄, 그럴 수준은 되냐 이 말이지.”
붉은 갑옷의 전사는 비웃음을 흘리며 투구 위에 걸쳐 놓은 안면 보호대를 밑으로 내렸다.
더 이상 대화 없이, 다가오고 있는 나담과 친위대들을 상대하겠다는 무언의 표시였고, 그 속에서 도현은 강한 자신감을 읽어 냈다.
‘투기가 하늘로 치솟는 것 같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수백 명의 시체를 짓밟고 서 있는 저들은 핏물이 진득하게 묻어 있는 도끼와 철퇴, 검 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들은 이 싸움을 즐기고 있어.’
수많은 스므차의 병력과 그 뒤의 수천 명의 무장한 주민들을 앞에 두고도 붉은 갑옷의 전사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현은 시선을 멀리 두었다. 성문으로 가는 넓은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수십여 명의 전사들 뒤쪽으로 칼라치가 또 다른 전사 수십여 명과 함께 조용히 서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기둥에 막혀서 성문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불기둥이 약해지는 순간, 칼라치와 전사들이 성문을 공격해 안에서 성문을 열어 버릴 것 같았다.
‘이 싸움을 나담이 이겨 낼 수 있을까?’
도현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늘어서 있는 수십여 명의 붉은 갑옷 전사들을 보며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강한 자들이야. 한 명 한 명, 모두가.’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분노하고 흥분한 나담과 친위대는 적들을 향해 해일처럼 달려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붉은 갑옷 전사들은 무기를 천천히 위로 올렸다.
‘곧 충돌한다!’
도현의 눈이 강렬하게 빛나는 순간, 큰 소리와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콰아앙! 우지직!
검과 검이 부딪치고, 도끼와 도끼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맹렬하게 충돌했다.
곧이어 갑옷이 찌그러지는 소리와 뼈와 살이 갈라지는 섬뜩한 소리가 나더니, 친위대 앞줄 일각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붉은 갑옷 전사들의 거센 공격을 얼마 견디지 못한 친위대들이 쓰러진 것이다.
“죽여 버려!”
수십여 명의 붉은 갑옷 전사들이 친위대 속으로 파고들며 사방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단순히 길을 막으며 싸우던 종전의 패턴에서 벗어난, 공세적이고 격렬한 싸움 방식이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건 붉은 갑옷 전사들이었지만, 터져 나오는 비명과 피는 친위대의 것이었다.
도현이 늑대 전사들이라고 평할 만큼 친위대는 거칠고 단련된 사내들이었지만, 본토에서 강인한 전사들로 훈련받고 이디언의 강화 마법으로 한층 강해진 붉은 갑옷 전사들을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친위대의 검을 도끼로 막아 낸 붉은 갑옷 전사가 장갑 낀 주먹으로 상대의 투구를 후려치자, 투구가 안으로 움푹 들어가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투구로 보호되던 친위대원의 얼굴이 박살 난 것이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너희들은 우리 상대가…… 아니라니까!”
허물어지듯 주저앉는 친위대원의 머리를 도끼로 두 조각 낸 그는 괴성을 지르며 덤비는 또 다른 친위대원의 검을 옆으로 흘려 낸 뒤, 허리에 찬 단검을 번개처럼 뽑아 친위대의 안면에 쑤셔 넣었다.
“으아악!”
비틀거리는 상대의 복부를 발로 걷어찬 붉은 갑옷 전사는 나담 쪽으로 향하다가 사제복을 입은 리드만을 발견하고는 비릿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신은 뒈졌다. 알았냐?”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도끼가 리드만의 머리 위로 쏜살같이 떨어졌다.
그 순간, 소리 없이 등장한 검이 도끼날을 옆으로 강하게 밀쳐 냈다.
채애엥!
“어!”
하마터면 손에서 한 손 도끼를 놓칠 뻔한 붉은 갑옷 전사는 놀란 눈빛으로 자신의 도끼를 막은 사내를 응시했다.
천으로 된 모자를 눌러쓴 사제복 차림의 사내였다.
“뭐냐? 방금 네놈이 한 짓이냐?”
도현이 말없이 고개를 들어 거구의 붉은 갑옷 전사를 올려다봤다. 그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붉은 갑옷 전사들은 하나같이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들이었다.
“눈깔을 빼 주마!”
말없이 노려보는 도현의 차가운 시선이 거슬렸는지 붉은 갑옷 전사는 흥분한 어조로 말을 내뱉으며 쾌속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얼마나 빠른지 근처에서 지켜보던 리드만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본 건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듯 잠시 번쩍한 푸른 빛이었다.
차아앙!
도현은 그 빠른 도끼질을 어깨 근처에서 검으로 막아 낸 뒤 한 발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붉은 갑옷 전사의 가슴을 가볍게 내리쳤다.
도현의 검에만 신경을 쓰던 붉은 갑옷 전사는 비릿하게 웃으며 그냥 맞아 주었다.
‘그 손바닥으로 무엇을 한다고. 바보 같은 녀…… 커헉!’
콰아앙!
내공이 실린 도현의 장력에 맞은 붉은 갑옷 사내가 입으로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나다 넘어졌다.
화살과 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는 단단한 붉은 갑옷에 엄청난 압력이 집중됐고, 그 압력이 갑옷 뒤의 그의 심장을 크게 두들긴 것이다.
“우엑!”
붉은 갑옷 전사는 피를 연신 게워 내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을 쉬기 힘들었는지 그는 투구를 벗으며 손가락으로 도현을 가리켰다.
“너, 너 이 자식!”
비틀거리던 그의 머리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나담의 배후를 지키던 친위대장 마르탠이 검으로 그의 머리를 잘라 버린 것이다.
마르탠은 처음부터 도현과 붉은 갑옷 전사와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도현을 깊은 시선으로 응시하던 그는 고개를 돌려 나담을 노리고 다가오는 붉은 갑옷 전사의 검을 상대해 갔다.
“자네, 굉장하군. 어떤 수법인가?”
리드만의 물음에 도현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왼손을 허공에 털어 내며 답했다.
“마나를 손바닥을 이용해 분출해 봤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영주님이 아시면 배우고 싶어서 못 견디시겠는걸.”
도현은 작게 웃으며 화끈한 손바닥의 열을 계속 식히기 위해 손을 털어 냈다.
‘실전에서 처음 사용한 것치고는 괜찮은데. 다만, 이 열이 문제야. 너무 무식하게 했나?’
취영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도현은 최근에 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리드만 사제님, 저기 불타오르는 수레 쪽으로 가시죠. 부성주 주변에 계속 있다가는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럴까?”
도현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도끼에 머리가 잘릴 뻔한 리드만은 두말없이 그의 의견을 따랐다.
싸움은 치열했다.
쉽게 무너질 것 같았던 친위대들은 전략을 바꿔 적의 강함을 인정하고 한 명의 적이라도 줄이는 방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일대일 싸움을 피하고 철저히 여러 명이 한 명의 붉은 갑옷 전사를 집중 공격했다.
“이거 놔! 이 자식들아!”
육중한 갑옷을 입은 거구의 붉은 갑옷 전사가 그의 팔다리, 심지어 등에도 매달려서 움직임을 방해하는 친위대원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퍼억! 퍽퍽!
강철 장갑을 낀 그의 주먹에 다리에 매달린 두 명의 친위대원들이 즉사를 했지만, 다리를 감싼 그들의 몸은 죽어서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 틈에 날카로운 검을 든 친위대원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투구와 갑옷 사이의 빈틈에 검을 정확히 찔러 넣었다.
목에서 폭포수 같은 피가 터져 나왔다.
“개, 개자식들. 약한 겁쟁이…… 새끼들.”
열 명가량의 친위대원들을 찢어 죽인 붉은 갑옷 전사가 기우뚱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쿠웅.
“허억, 허억, 다음은 저 자식이다!”
살아남은 친위대원들은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몸을 날렸고, 그와 같은 장면은 넓은 길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희생은 컸지만 붉은 갑옷 전사들도 한 명 두 명 바닥에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불타는 수레 주변에서 리드만을 보호하며 지켜보던 도현도 방관만 한 건 아니었다.
도시와 성의 전쟁에 개입해 어느 쪽 편을 들어 줄 마음이 없는 그였지만, 그를 공격해 오는 자들은 상대 안 할 수가 없었다.
멋모르고 도현에게 덤벼들었다가 목이 부러진 붉은 갑옷 전사가 불타는 수레 위로 쓰러지자, 불씨와 재 들이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
“사람들이 다가오는군.”
리드만의 말에 도현이 뒤를 돌아다봤다.
거리에 몰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서히 친위대와 붉은 갑옷 전사들의 싸움터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저 괴물 같은 붉은 갑옷 전사들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칼라치가 어떻게 대응할까?’
도현은 아직까지 미동도 하지 않는 칼라치와 나머지 수십여 명의 붉은 갑옷 전사들을 응시했다.
복장은 같았지만, 나담의 친위대와 싸우고 있는 자들보다 칼라치 주변에 있는 수십여 명의 붉은 갑옷 전사들이 한 수 위인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저들이 개입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친위대와 동료들의 싸움을 지켜볼 만한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서인 것 같았다.
하지만 거리의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온다면, 그때는 반드시 저들이 움직일 것이다.
‘아! 불길이 사그라지고 있다!’
칼라치의 접근을 막고 있던 10여 미터도 넘는 거대한 불기둥들이 갑자기 약해지며 흔들렸다.
“마법사의 힘이 다한 모양이야.”
리드만은 미간을 찌푸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성문이…… 열리는가 보군.”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도현은 칼라치가 수십여 명의 전사들을 데리고 약한 불길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잠시 후, 하늘이 떠나갈 듯한 고함 소리가 들리며 성문을 통해 개미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내로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와아아아! 이제 성은 우리 것이다!”
“우리도 성에서 살 수 있다!”
“같이 살자, 이 개새끼들아!”
성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구역장과 그 부하들뿐만이 아니었다. 도시 거주민들까지 합세해 단숨에 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성을 지키자!”
“스므차 성주님이 오실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거지 같은 새끼들! 다 죽여!”
거리를 가득 메우며 싸울 준비를 마친 성내 주민들은 성문을 통해 밀려오는 적들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이미 친위대와 붉은 갑옷 전사들의 싸움은 멈춘 지 오래였다. 성문이 열리자, 목적을 완수했다는 표정으로 붉은 갑옷 전사들이 썰물 빠지듯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붉은 갑옷 전사들 중에서도 특출 나게 강한 두 명에게 가로막혀 혼신의 힘으로 싸움을 벌였던 나담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허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흥분한 성내 주민들이 무기를 흔들며 그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역시 부성주는 안 돼, 손이 저래서인지.”
“스므차 성주님이 오셨다면 성문은 열리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부성주는 뭐 한 거야? 체구만 아버지를 닮았지, 너무 약해.”
나담은 귓가에 들리는 수많은 비난의 목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적이 강했다. 그뿐이다.
아버지가 오지 않은 이유도 그의 탓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저들의 눈에는 모두 그의 탓으로 보였나 보다.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 나담은 비틀거렸고, 친위대장 마르탠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부성주님, 일단 대저택으로 돌아가시지요.”
“안 돼. 난 여기서 끝까지 싸우겠다.”
나담은 대규모 싸움이 벌어진 성문 주변으로 가다가 몸을 휘청거렸다. 누가 보더라도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리드만 사제! 어디 계시오, 리드만 사제!”
“험, 여기 있습니다.”
리드만과 도현이 조용히 나타났다.
“어서 치료를 해 주시오.”
리드만은 정신을 잃고 친위대원의 팔에 기대어 있는 나담의 부서진 갑옷을 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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