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디 임팩트 7권 3화
옆구리 부분에 깊은 상처가 보였다.
손을 가져가 치료를 하려던 그의 머리 위로 불화살이 떨어졌다. 성에 침입한 사람들이 사방으로 불화살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서걱.
도현이 검으로 불화살을 잘라 버리며 말했다.
“서두르시지요.”
“험, 알겠네.”
리드만은 다시 정신을 집중해 신의 별자리를 허공에 그려 신성한 빛을 모은 후, 나담의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옆구리 상처가 끓어오르며 빠르게 아물었지만, 나담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적을 막아라!”
“예!”
붉은 갑옷 전사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친위대들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성내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들이 가세하자 넓은 길을 통해 물밀듯 내려오던 적들의 움직임이 다소 주춤거렸다.
그사이 마르탠은 도현을 보며 말했다.
“로이 사제, 부성주님을 모시고 대저택으로 가 주시오.”
“제가 말입니까?”
“그렇소. 난 여기서 적들을 막아야겠소.”
“…….”
도현은 마르탠의 하복부를 응시했다. 부서진 갑옷 밑으로 내장이 언뜻 보였다. 그 상태로 내색하지 않고 부성주의 치료를 먼저 권한 그의 정신력이 대단했다.
“이런! 왜 말하지 않았소! 당신이 더 급한데!”
리드만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번 신성한 힘을 발휘하면 연이어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그는 마르탠을 치료할 수가 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부성주님이오. 부탁이니 무사히 대저택으로 가 주시오.”
도현은 단호한 눈빛의 마르탠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그는 정신을 잃은 거구의 나담을 양손으로 번쩍 들었다.
“가시죠, 리드만 사제님.”
“음…….”
리드만 사제는 성내에서 벌어지는 도시 주민과 성내 주민의 싸움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르탠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도시의 주민들은 성문이 열리자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었다.
마치 승리가 목전에 있는 듯 도취된 눈빛으로, 너도나도 성문을 통해 성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성문이 열리자, 심리적 두려움이 완전히 제거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대장, 소문과 달리 스므차도 별거 아닌가 봅니다. 벌써 성문이 뚫렸는데요?”
추위를 잘 타는 짐브리오가 거구의 몸을 약간 움츠리며 옆을 돌아봤다. 나이 든 어베인이 눈가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 별거 아닌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 성문 하나 열렸다고 해서 대륙을 진동시켰던 강자가 패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
신중히 대답을 한 어베인은 로나가 건넨 술을 입에 댔다.
“사자도 늙으면 힘이 다하기 마련 아니요.”
“지금 대장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 아주 욕을 하지그래요?”
머리를 길게 기른 아름다운 로나가 옆에서 한마디 했다. 어베인도 적지 않은 나이였기 때문이다.
“허험, 누가 대장을 두고 말하는 건가? 스므차를 두고 하는 말이었지.”
“나이가 들수록 강해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
어베인은 술을 한 모금 더 한 후 추위로 코끝이 빨개진 짐브리오에게 술을 건넸다.
“아무튼 상황이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게 됐습니다. 손쉽게 성안에 들어가 고대 지하 유적을 찾아볼 수 있게 됐으니 말입니다, 흐흐흐.”
술병을 비운 짐브리오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고개를 한차례 돌렸다. 도둑질 중에서도 고대인들이 남긴 사원이나 신전, 보물 창고를 터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은 없었다.
다크캐슬에 고대 지하 유적이 있다는 정보는 오래전 그들 세계에 떠돌던 소문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스므차의 성을 넘어가 그 진실을 파악하진 못했다.
“영주 커딜과 이안에게 고마워해야겠는걸. 그놈들이 보낸 추적자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여길 올 생각이나 했겠느냐 이 말이야.”
강한 마법사들이 섞인 추적자들을 따돌리며 피해 다니던 그들은 귀찮았는지 아예 도망자들의 도시 다크캐슬로 와 버렸다.
도시 자체가 범죄자들의 소굴이라서, 누굴 잡으러 왔다고 감히 소리치며 다닐 만한 배짱 있는 녀석들은 드물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주의 깃발 아래 들어오는 녀석들을 스므차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크캐슬에 있는 동안은 추적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직업의식이 투철한 도둑들.
어제 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소문의 진상을 파악해 보자며 스므차의 성에 몰래 숨어 들어가 고대 지하 유적을 찾아보려고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오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게 좋아할 필요 없어요. 소문은 그저 소문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찾아야 우리 것이 되지요. 진짜 어려움은 지금부터라고요.”
로나가 앵두같이 고운 입술로 말했다.
“로나 말이 맞아. 성이 혼란에 빠졌다 해도 그 혼란이 잠잠해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스므차가 이기든, 전쟁을 일으킨 도시의 사람이 이기든 말이야. 그 전에 찾아야겠지.”
어베인은 말을 하며 성문이 아닌 성벽 쪽으로 걸어갔다.
성벽을 지키던 스므차의 병사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성문이 열렸단 신호를 받고 모두 성내 전투에 대비해 성벽을 포기하고 성 중심지로 이동한 것이다.
“많이도 죽었네.”
성벽 밑에 죽어 있는 수많은 구역 사내들의 시신을 보며 짐브리오가 혀를 찼다.
“어휴 미친 자식들, 여기까지 도망 왔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왜 이 죽을 짓을 해? 누구 좋으라고. 로나, 그쪽 끝 들어.”
“혼자 들어요. 들 수 있잖아요.”
로나가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무겁다고!”
“힘 좋잖아요.”
“젠장.”
짐브리오는 어베인을 쳐다봤다. 그러나 어베인도 뒷짐을 지며 딴청을 부렸다.
“정말, 내가 혼자 돌아다니든지 해야지 이거야 원”
그는 투덜대며 긴 사다리를 들어 성벽에 걸쳤다.
“도현이 그 녀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도현과 같이 다닐 때는 제법 부려 먹을 수가 있어서 몸이 편했는데, 지금은 늙은 대장과 약한 척하는 로나 때문에 무거운 짐을 들거나 힘을 쓰는 일은 대부분 그가 해야 했다.
짐브리오가 도현 얘기를 꺼내자 로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사한지 모르겠어요.”
도현에게도 추적자들이 붙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추적자 중 한 명을 붙잡아 알아낸 상태였다.
설마 그들 세 명이 아닌 도현에게까지 사람이 붙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게 우리랑 계속 다녔으면 좋았지, 무슨 몬스터를 잡으면서 검을 수련한다고.”
짐브리오가 사다리 끝을 미끄러지지 않게 단단히 바닥에 고정시키며 말했다. 그러나 퉁명스럽게 말을 하는 그의 얼굴 한편에도 로나처럼 걱정하는 빛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별일 없을 거야. 검을 다루는 게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어베인의 담담한 말에 로나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도현의 검술 솜씨를 시험해 본다며 단검을 들고 까불다가 그의 빠른 검에 가슴 부위의 옷자락이 열십자로 갈라져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검술 솜씨가 비록 훌륭해 보이긴 했지만, 마법사를 감당할 정도로 강할까요?”
“나중에 만나면 물어보자고.”
재치 있는 대답으로 로나의 걱정을 안심시킨 어베인은 사다리에 발을 얹었다.
눈이 그친 하늘에 달이 환하게 빛났다.
호드리오스
“말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리드만이 숨을 헐떡이며 거리를 둘러봤다. 친위대가 놔둔 수백 필의 말은 보이지 않았고, 불안한 눈빛으로 무기를 들고 몰려가는 주민들만 보였다.
“계속 뛰실 수 있겠습니까?”
정신을 잃은 나담을 어깨에 메고 있는 도현이 물었다.
“이래 봬도 뛰는 데는 나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네. 한데, 자네야말로 괜찮겠나? 부성주를 안고서 말이야.”
이미 상당한 거리를 뛰어온 상태다.
큰 체구의 나담이 무척 무거워 보였기에, 도현의 체력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요에 따라 도현이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체력이 고갈된다면 난감한 일이다.
“괜찮습니다. 가시죠.”
작은 도시만 한 거대한 성내를 관통해 대저택이 위치한 숲으로 달려가는 도현의 보폭은 일정했다. 오히려 맨몸으로 달리는 리드만이 숨찬 얼굴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쉬었다 가시죠.”
도현이 보다 못해 달리는 속도를 줄이며 말했다.
성문이 열렸다는 소식은 어떤 식으로든 벌써 스므차의 대저택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들이 할 일은 정신을 잃은 나담을 무사히 그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인데, 촌각을 다툴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저기 냇가에서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세.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숲 앞을 흐르는 냇물에 도착한 그들은 얼음을 깨고 차가운 물을 마셨다.
“아, 살 것 같군.”
리드만은 눈밭에 푹 쓰러져 편안한 자세를 취했고, 도현은 어깨를 가볍게 풀어 주며 눈이 그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한쪽에선 성을 차지하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이 악에 받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눈구름이 사라진 밤하늘은 달빛이 고왔고 별들도 제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싸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자연은 모든 걸 초월한다. 그저 지독스러울 정도의 무심함으로 인간들을 내려다볼 뿐.’
취영산에서 감정의 검을 깨닫고 호검술 후반식을 만든 도현은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여러 감정들조차도 궁극적으로는 뛰어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닐까 싶었다.
깊은 생각에 빠져 밤하늘의 달과 별들을 올려다보던 도현은 시선을 점점 내려 땅을 봤다.
달빛과 별빛을 받으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자들이 있었다. 멀리서도 피 냄새를 물씬 풍기는 자들.
‘그자들이군.’
칼라치가 이끄는 붉은 갑옷 전사들이다.
성문을 열고 조용히 사라진 그들이 눈 덮인 들판을 거쳐 숲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목표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리드만 사제님, 그만 가야겠습니다.”
도현의 굳은 표정에 리드만이 허벅지를 두드리며 일어섰다. 그의 눈에는 아직 저 멀리서 달려오는 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칼라치와 그 전사들입니다.”
“뭐라고?”
깜짝 놀란 리드만이 넓은 들판을 응시했지만, 여전히 어둠뿐이었다. 그의 시력으로는 어둠 속을 도현처럼 밝게 볼 수 없었다.
“마법사로 보이는 자들도 몇 있군요.”
도현의 동공이 어둠 속에서 커지며 달려오는 자들의 면면을 확인해 주었다.
나담을 어깨에 다시 멘 도현은 급히 숲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아직 저들 중에는 그와 리드만을 발견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저들보다 빨리 대저택에 도착해야 한다.’
나담을 대저택에 무사히 데려가 주기로 마르탠과 약속을 한 도현은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도현은 내장을 쏟으면서도 그렇게 담담히 말을 내뱉은 사람을 무시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물론, 대저택에 자연스럽게 돌아가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그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죽어 가는 자와 눈빛으로 맺은 약속은 지키는 것이 검을 평생 수련해 온 도현의 마음에 어긋나지 않는 당당한 행동이었다.
‘길은 피하자.’
느낌이 숲으로 난 잘 다듬어진 길 위에 무언가 위협 요소가 다분히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도현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리드만과 함께 숲 속을 통과해 대저택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리드만 사제님, 제 옆으로 오십시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나?”
지친 기색이 있는 리드만을 도현이 왼팔로 휘감았다.
“속도를 좀 내야겠습니다.”
“내야지. 그런데 왜 나를 껴안은 건가?”
“잠시 뒤에는 아실 겁니다. 몸에 힘을 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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