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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154화 (154/575)

[154] 디 임팩트 7권 4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리드만은 도현의 말을 따랐다.

그 순간 몸이 둥실 뜨는 느낌이 나더니, 그의 뺨 위로 찬 바람이 찰싹찰싹 부딪혀 왔다.

도현이 놀라운 속도로 눈 쌓인 숲 속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나 안고 달리는데도, 그의 행동은 신의 힘을 빌려 쓰는 리드만조차도 놀랄 만큼 빠르고 안정적이었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군.”

리드만은 감탄과 놀라움이 섞인 어조로 말하며 빠르게 지나치는 사물들을 응시했다.

피부에 아프도록 찬 바람이 부딪혔고 화살이 지나칠 때나 들릴 법한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도현은 촘촘한 숲의 나무들을 속도를 줄이지 않고도 요리조리 잘 피해 냈고, 앞에 바위가 나오면 마치 새처럼 허공을 날아서 뛰어넘기도 했다.

리드만은 보면 볼수록 놀라움이 커졌다.

‘대단한 사람이야.’

리드만은 도현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절로 깨달았다.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때는 영주님보다 한참 아래였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강해진 것이지?’

“괜찮으십니까?”

도현은 내공의 일부를 소모하며 신법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주 좋네. 말보다 편안하군. 진작 알았으면 내가 잘 달린다는 말을 하지 않을 걸 그랬어.”

리드만의 농담에 도현은 피식 웃고는 뒤를 돌아다봤다. 칼라치의 무리는 보이지 않았다.

‘윌벤슨은 어디에 있을까?’

10년을 준비한 그라면 스므차와의 싸움을 가까이서 지켜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저들의 무리 중에는 윌벤슨이 보이지 않았다. 붙어 다니던 비버와 이디언 역시.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달리는데, 사제복을 입은 한 사내가 옆에서 빠르게 접근해 왔다.

영주 딘이었다.

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기다렸다.

“좋은 길 놔두고 왜 이런 길로 다니는 건가?”

딘은 신전 수색을 마치고 대저택으로 향하다가 말을 타고 부성주를 쫓아가는 도현과 리드만을 목격하고는 숲의 길 한쪽에서 여태껏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할 말이 많았던 딘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뒤늦게 도현의 어깨 위에 있는 나담을 발견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정신을 잃었으니까요.”

도현의 말이 있고서야 딘은 안심하며 입을 뗐다.

“지금 어떤 상황인가?”

“성문이 뚫렸습니다. 부성주는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런 상태고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딘은 현재 상황을 단번에 이해했다.

“스므차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도현은 스므차의 지시 없이 나담이 단독으로 병력을 지휘했다고 설명했다.

“성에 관심이 없는 건가?”

스므차의 조용함이 오히려 불안했는지 딘의 표정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배어 나왔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고 다닐 것만 같은 영주 딘이었지만, 30년 전 대륙을 진동시킨 강자 중 한 명인 스므차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신전은 조사하셨습니까?”

“괜히 바닥만 부쉈어.”

입맛을 다시던 딘은 리드만과 도현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모양새가 보기 안 좋군. 리드만, 얼른 떨어지지 못하나?”

“제가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뒤에 윌벤슨의 정예 병력이 쫓아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는 거지요.”

“벌써 적들이 여기까지 밀고 들어왔나?”

“네.”

“흠, 그럼 어서 가야겠군. 리드만, 이리 오게. 이러다 도현이 이 친구 힘 다 빠지겠어.”

싫다는 리드만의 몸을 짐짝처럼 어깨에 멘 딘은 도현과 함께 숲 속을 내달렸다.

둘 다 가진 힘이 평범치 않아서인지 그 달리는 속도가 빠르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딘은 중간중간 숲의 나무에 부딪힐 뻔하며 리드만의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영주님, 조심하십시오! 제 머리가 부딪힐 뻔했습니다!”

“좀 조용히 하게, 힘드니까! 근데 왜 이렇게 무거워!”

딘은 힘 안 들이고 달리는 도현의 체력과 지구력이 부러웠는지 괜히 리드만에게 역정을 냈다.

“영주님, 신전의 사제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몸을 스쳐 지나가는 나무의 감촉에 흠칫 몸을 떨면서 리드만이 물었다.

“몸을 피하기 바빠서 신전 근처에도 오지 않더군. 덕분에 난 아주 편하게 신전을 다 망가트렸지.”

“좋으셨겠습니다, 신전을 그렇게 만들어놔서요.”

“지하 유적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

리드만의 유치한 도발에 여유롭게 응수하던 딘은 도현의 손짓을 보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정신을 잃은 나담이 서서히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대저택이 가깝게 보이는 숲에서 걸음을 멈춘 도현은 나담을 눈밭 위에 눕혔다.

그 순간, 눈을 번쩍 뜬 나담이 도현의 목을 한 손으로 조였다.

“감히 성을 공격하다니!”

도현을 적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죽여 버리겠다, 이놈들!”

“부성주님, 로이 사제입니다. 진정하십시오.”

리드만이 옆에서 말했지만 나담은 바닥에 누운 상태로 도현의 목을 계속 졸랐다. 그것도 모자라 화상을 입어 손가락이 붙은 손으로 도현의 얼굴을 마구 후려쳤다.

“감히 스므차의 아들인 나를 어떻게 보고!”

핏발 선 눈이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성문 전투에서 패한 게 그에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이었나 보다.

무심한 눈빛으로 몇 대 맞아 주던 도현은 목을 조이는 나담의 손을 힘으로 떼어 낸 뒤, 천천히 얼굴을 밑으로 내렸다.

“마르탠이 죽었습니다, 부성주님을 맡기면서요. 그러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도현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나담의 눈빛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눈밭 위에 누워 숲의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갑자기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 으하하하하!”

웃고 있는데 눈가에는 눈물이 보였다.

도현과 딘, 리드만은 몇 걸음 떨어져서 그가 감정을 토해 내도록 기다려 주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나도 영지전에서 패하고 나무에 목을 매고 싶었지.”

딘이 작은 목소리로 도현에게 말했다.

“그러셨습니까?”

“오래됐지, 내가 아주 젊었을 때니까. 그때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분해서 울고, 아끼던 몇 안 되는 부하들의 죽음에 슬퍼서 울었지. 그러다가 다음 날이 되니까 살고 봐야겠다 싶어서 영지를 탈출했다네. 비겁했나?”

“아닙니다.”

“요즘도 가끔 죽은 내 부하들이 생각나. 자네도 휘하에 사람을 부리게 되면 알게 될 거야, 부하들의 의미를. 가까운 자들은 마치 친구나 가족처럼 여겨지거든. 그들은 오래토록 기억에 남지.”

말을 마친 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미 죽어 그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부하들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작은 도장의 관장으로 몇 안 되는 관원들을 이끌고 있는 도현으로서는 목숨을 바치며 죽어 갈 수 있는 부하들의 의미를 깊게 생각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전쟁터에서 희생을 각오하고 병사들을 내보내는 지휘관의 정신력은 바위처럼 묵직하고 단단해야만 할 것 같았다.

‘말 한마디에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이 결정된다. 지휘관은 냉철해야 해.’

웃으며 울고 있는 나담을 조금 떨어져서 응시하던 도현은 주위를 한번 쓸어 보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기서 무한정 그가 진정되기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부성주님, 그만 일어나시죠.”

도현이 몸을 가볍게 흔들자 나담의 주먹이 날아왔다. 하지만 그 주먹은 중간에 도현의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도현과 숨 막히는 눈싸움을 벌이던 나담이 주먹을 거두며 물었다.

“여긴 어디지?”

“숲입니다. 대저택에 거의 다 왔습니다.”

나담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몸을 반쯤 틀어서 뒤를 보자 멀지 않는 곳에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대저택의 일부가 보였다.

“비참하군.”

나담은 평소에 보이지 않던 감정의 표현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 꼴을 보게. 우습지 않나? 오죽 못났으면 부하들을 다 죽이고 사제인 자네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도망 왔을까?”

도현은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했다.

“부성주님, 어서 대저택으로 가야 합니다. 성문에서 부성주님과 싸움을 벌였던 적들의 정예 병력이 벌써 숲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오, 그런가? 거 잘됐군. 아버지의 충직한 친위대들이 어떻게 그 녀석들을 막는지 지켜봐야겠군. 그래도 대비라도 해야 하니까, 얼른 가서 알려 줘야겠지?”

자조 섞인 미소를 띤 그는 대저택으로 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런데 여기 옆구리에 난 상처, 리드만 사제 당신이 치료했소?”

“그렇습니다, 부성주님.”

“깨끗하군. 그래도 난 여전히 일곱 신을 믿지 않아.”

얄미운 말을 내뱉고 대저택으로 쑥 달려가는 나담을 리드만이 노려보았다.

“쳐 죽일 놈.”

“이런, 이런. 사제가 그렇게 험한 말을 해도 되는가?”

딘의 지적에 리드만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전쟁을 이용해 영주님의 폭주를 치료하려고 하는 제가 욕 몇 마디 못 하겠습니까?”

“어째 말 속에 가시가 가득하군.”

딘이 슬며시 눈을 내리깔며 응시하자 리드만이 움찔하며 앞서 가는 도현에게 달라붙었다.

“같이 가세.”

50년 전, 호드리오스는 창에 미친 인간이었다. 사람도 기분 내키는 대로 죽이고 다녀서 그의 창날엔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병사들 수백 명이 인해전술로 덤벼들었지만, 아까운 목숨만 부질없이 사라졌을 뿐 호드리오스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창에 피를 묻히는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가 남부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왕국에 발을 디뎠고, 한 작은 마을에서 자신과 엇비슷한 거대한 체구의 금발 사내와 시비가 붙어 일전을 벌이게 됐다.

술집이 통째로 날아가고 목조로 된 마을 건물의 반이 호드리오스와 금발 사내의 싸움에 휘말려 폭삭 주저앉거나 파괴되었다.

무시무시한 그들의 싸움에 겁에 질린 마을 주민들이 달아났고, 병사들은 감히 그들의 싸움에 개입할 수 없어 멀찍이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을을 부수며 벌어진 일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가 나며 호드리오스가 땅에 처박힌 것이다.

뚜벅뚜벅 걸어와 부러진 창을 손에 들고 꿈틀거리는 호드리오스의 머리를 짓밟고 선 금발의 사내는 바로 스므차였다.

“호드리오스, 살려 주면 내 부하가 되겠나?”

“날 부하로 두려면 많은 돈이 필요할 거다.”

“돈이라면 산만큼 주지.”

“네가 누군데 그런 장담을 하는 거지?”

“스므차다. 이곳 왕의 둘째 아들이지.”

호드리오스는 꿈틀대며 일어나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야수성을 뛰어넘는 패도적인 인물을 만나고 보니 야수 같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피를 보며 흥분하던 마음도 어느새 조용히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마치 야수가 조련사를 만난 것 같은 이치였다.

그 뒤로 그는 스므차의 호위가 되어 늘 곁에서 붙어 다녔고, 친위대도 직접 만들어 훈련을 시켰다.

스므차의 친위대가 칼날처럼 긴 날이 있는 창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건 ‘창 귀신’ 호드리오스의 영향 때문이었다.

마치 옛날이야기를 하듯 딘은 스므차의 친위대장인 호드리오스와 스므차의 일화를 설명해 주었다.

“그럼 나담과 얘기하던 노인이?”

도현은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병력을 잃고 홀로 살아온 나담을 대저택 입구에서 강한 질책이 섞인 말로 혼을 내던 노인이 한 명 있었다.

눈빛이 워낙 강렬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도현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킨 사람.

오래 지켜볼 수가 없어서 대저택 입구를 지나쳐 내부에 있는 성소에 들어온 도현은 그 노인에 대해 딘에게 물어봤고 딘은 간략하게 호드리오스와 스므차의 일화를 말해 준 것이다.

“부성주를 그렇게 혼낼 만한 사람은 스므차 일가 중에서는 친위대장 호드리오스밖에 없을 거네.”

“그렇군요.”

도현은 스므차를 높이 평가하는 딘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내심 한번 붙어 볼 만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늙어서 주름이 가득한 호드리오스가 뿜어내는 강렬한 기운을 접하자 ‘어쩌면 정말 스므차는 아직 내 수준으로는 넘지 못하는 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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