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디 임팩트 7권 5화
“사람들은 스므차를 주목하지만, 사실 무서운 건 호드리오스네. 스므차는 직접 움직이지 않거든. 그의 오른팔인 호드리오스가 조용히 친위대를 이끌고 싹 쓸어버리지. 그와 관련된 이야기도 많은데 말이야, 분위기상 길게 말을 할 수 없겠군.”
남부 대륙 출신인 그는 스므차의 이야기를 제법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네가 말한 칼라치가 아무리 강해도 스므차는 고사하고 호드리오스나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딘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기도하는 리드만의 등을 응시했다.
그는 성소에 들어오자마자 일곱 신께 회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보게 리드만, 신전을 부순 내 죄도 용서를 구하게.”
“그럴 수 없습니다, 영주님. 그건 영주님이 직접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눈을 감고 제단 앞에서 기도를 올리던 리드만이 대답했다.
“귀찮게. 관두게 그럼. 벌받으면 그만이지. 안 그런가, 도현?”
“그래도 잠시라도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리드만 사제님을 위해서라도요.”
도현의 제안에 딘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자네도 하지.”
“제가요?”
“우린 한배를 탄 사이 아닌가. 자네도 신전을 부수는 데 힘을 보탠 셈이지.”
딘이 일어서며 도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별수 없이 도현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제단으로 걸어가던 그는 성소의 출입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시간으로 보아 칼라치와 그 전사들이 대저택 주변에 이미 도착해 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칼 소리가 밖에서 들릴 것만 같았지만 밖은 조용했다. 아마도 칼라치와 전사들이 휴식을 취하며 싸울 시기를 저울질하는 것 같았다.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스므차도 이제 모습을 드러내겠지?’
도현은 대저택을 감싸고 있는 알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감았다.
침묵 속에 기도를 마친 세 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의자에 앉아 스므차의 부인인 디엘르의 연락을 기다리던 그들은 서로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잊었나 보군.”
딘이 잘됐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엘르가 전쟁이 벌어졌을 때부터 리드만과 도현을 계속 곁에 두려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딘은 혹시 몰라 자리를 지켰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없자 대저택을 조사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소를 나가려 할 때, 뜻밖의 불청객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들 있었군!”
대사제 휴고스가 몇 개 남지 않은 누런 이를 보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여긴 어떻게?”
리드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성소의 출입문을 닫고 들어오는 휴고스를 쳐다봤다.
“성에 큰 변고에 있는데 당연히 이곳으로 와야지.”
“다른 사제들은?”
“어딘가에서 신께 기도를 잘 드리고 있겠지. 그런데 어딜 가려던 참인가?”
휴고스의 물음에 리드만은 말을 얼버무리며 다시 성소 안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어디 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닙니다.”
리드만의 대답에 휴고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적들이 대저택 코앞까지 쳐들어왔다고 들었네. 나가서 좋을 것 없어. 여기서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다가 어느 편이 이기면 그쪽에 가서 신의 축복을 내려 주면 되는 거야. 우리 사제들은 그 누구 편도 아니거든.”
“훌륭한 조언이군요.”
“왜 이러나, 다 알면서.”
처세에 밝은 휴고스는 웃음을 보이곤 딘과 도현을 둘러봤다.
“너희들도 명심해! 허튼짓하지 말고 말이야. 알았어!”
딘의 눈썹이 꿈틀댔다.
“대사제님, 기도라도 하시지요. 누가 이기든 우리가 무사하게 말입니다.”
리드만의 제안에 휴고스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야겠지?”
휴고스가 제단 앞에 근엄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감았다.
그가 기도를 올리는 순간, 리드만이 성소에 있는 촛대로 그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허억!”
입에서 김빠지는 소리를 낸 휴고스가 눈을 부릅뜨고 허우적거리다가 제단 앞에 픽 쓰러졌다.
리드만의 과감한 행동에 도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신성한 성소에서 이래서 쓰나?”
딘이 혀를 찼다.
“제가 했으니 괜찮습니다. 전 사제니까요.”
리드만이 촛대를 내려놓고 기절한 휴고스를 안아 의자에 앉혔다.
휴고스는 뒤에서 보면 고개를 푹 숙이고 묵상에 빠진 사람 같았다.
“도현, 봤나? 저게 리드만의 진면목이네. 무서운 사제지. 동료 사제의 머리를 깨부술 듯 세차게 휘두르는 촛대라니.”
“제가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리드만이 목소리를 높이자 딘이 질색하며 손짓을 했다.
“누가 뭐라고 했나? 잘했어! 그렇지 않아도 내가 손을 한번 봐 줄까 했는데 말이야.”
딘은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이 거의 없는 휴고스의 정수리를 찰싹 때렸다.
그 순간 놀랍게도 기절한 휴고스가 신음을 흘리며 깨어나려 했다.
“어?”
황당해하는 딘과 리드만 사이에 끼어든 도현이 주먹으로 휴고스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쳤다.
깨어나려던 휴고스가 조용히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그만 나가시죠.”
도현이 시간을 아끼며 뒤돌아서자 딘과 리드만이 멋쩍은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성소의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그들은 빠르게 대저택 1층 복도를 돌며 이 방 저 방 기웃거렸다.
만약 고대 지하 유적이 대저택 내에 존재한다면, 그 입구는 1층 어딘가일 가능성이 높았다.
평소에는 경비가 보이던 복도도 지금은 텅 비어서, 그들은 마음껏 움직이며 의심스러운 장소와 공간을 확인해 갔다.
그러던 중 그들은 복도 끝에 나타난 디엘르와 그만 딱 마주쳤다.
슬며시 몸을 뒤로 돌리는 그들을 향해 디엘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거기 서세요!”
우뚝 멈춰 선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시녀들을 대동하고 다가온 디엘르에게 공손이 허리를 숙였다.
“날 봤으면서 왜 피하는 거죠?”
디엘르의 낮은 목소리에 리드만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피한 게 아닙니다, 디엘르 님.”
“그럼요?”
“성소에 가서 기도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가만히 리드만과 도현을 응시하던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흰 사제복 아랫단이 온통 피투성이였고, 신발도 염색이라도 한 듯 검붉어져 있었다.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묻어 온 자연스러운 흔적이다.
“부성주에게 들었습니다. 부상당한 그를 치료하고 대저택까지 데리고 온 게 사제님들이라고요.”
“할 소임을 다한 것뿐입니다.”
리드만이 분위기를 잡으며 정중히 대답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별말씀을요. 그럼 저희들은 성소에 가서 이 전쟁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도록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내 옆에 계세요.”
“지금은 기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리드만이 당황하며 말했다.
“성소가 아닌 내 옆에서 해 주세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니까요.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기도는 성소에서 하는 게…….”
리드만이 어떡하든 그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애를 쓸 때 나이 어린 시녀 한 명이 급하게 뛰어왔다.
일전에 팔을 베이고 리드만에게 치료받은, 10대 중반의 소녀였다.
“디엘르 님!”
“무슨 일이냐?”
위엄 있는 얼굴로 뒤돌아선 디엘르에게 어린 시녀가 숨도 돌리지도 못하고 보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부성주님께서 검을 빼 들고 성주님의 친위대들을 위협하고 계십니다.”
“뭐라고? 어디서!”
“성주님이 계시는 지하 입구에서…….”
지하 입구라는 말에 도현의 눈이 반짝였다.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대 지하 유적 입구가 연상된 것이다.
리드만과 딘 역시 도현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시녀의 보고를 받은 디엘르는 굳은 표정으로 리드만을 돌아봤다.
“리드만 사제님, 따라오세요!”
단호하게 명령조로 말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갔고 그 뒤를 시녀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그곳이었으면 좋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도현과 딘, 리드만은 기대감에 찬 얼굴로 앞서 가는 디엘르의 뒤를 쫓았다.
“실로 오랜만이군.”
숲에 나타난 윌벤슨이 감회 깊은 표정으로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대저택을 응시했다.
“주인님, 여기에 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작은 키의 비버가 콧물을 훌쩍이며 물었다.
“와 봤지, 아주 오래전이지만.”
“오래전이라면 언제 말입니까? 3년? 5년?”
“비버.”
“예, 주인님.”
“아주 오래전이라면 네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이라는 뜻이다.”
비버는 털모자를 들어 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한데요. 저랑 주인님이 다크캐슬에 온 건 10년 전인데요. 그럼 저 없이 그 전에 여기에 오셨다는 겁니까?”
“그래, 수없이 많은 배들 중 한 척을 타고 다크캐슬에 왔었지. 어린 나담이 배 난간에서 토악질을 하는 것도 지켜봤고.”
“와아, 정말입니까?”
“그렇다. 이 숲과 저기 보이는 대저택. 그 사이에서 벌어진 몬스터들과의 전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위험하고 무서웠지만, 난 용기를 가지고 스므차가 다크캐슬을 차지하는 데 일조를 했다. 마법사 중 한 명으로서 말이야.”
윌벤슨은 심복인 비버에게도 숨겨 왔던 과거를 얘기해 주었다. 이제 끝이 왔다고 생각하니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싸웁니까?”
“그자는 군신 간의 신의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시킨 일은 곧잘 하지만 이해력이 약간 떨어지는 비버가 어수룩한 표정을 지었다.
“배신을 했다는 뜻이다.”
“나쁜 놈이군요, 주인님을 배신하다니!”
“그래, 아주 나쁜 놈이지. 오만하고 세상에 그 혼자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자. 이 손목을 자른 놈도 바로 그놈이다!”
윌벤슨이 오른손으로 왼손을 힘 있게 잡아당기자, 의수가 쑥 빠져나왔다.
“아니, 정말 나쁜 놈이군요. 주인님 손목도 자르고!”
비버가 못 참겠다는 듯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래서 내가 30년 전, 다크캐슬을 탈출할 때 적절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줬지.”
“어떻게 말입니까?”
윌벤슨은 의수를 다시 끼우고 나무에 기대 놓은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그 당시 어린 나담의 왼손을 이것으로 태워 버렸다.”
윌벤슨이 손바닥을 펴자 이글거리는 화염 구슬이 생성되어 그의 손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아니, 그럼 나담의 왼손이 병신이 된 게 바로 주인님의 솜씨였던 겁니까?”
윌벤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도 남겨 뒀지. 네 아비 스므차 때문에 넌 그 꼴이 된 거라고 말이야. 아마도 나담은 지난 30년간 아버지인 스므차를 증오하며 살았을 거야. 내가 바라던 바이기도 하고.”
“멋진 복수입니다, 주인님. 흐흐흐.”
손뼉을 치며 좋아하던 비버의 뺨을 그가 후려쳤다.
“주둥이 닥쳐라, 이놈! 멋진 복수라니, 아직 복수는 시작도 안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윌벤슨의 시선에 비버가 풀 죽은 얼굴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비버.”
“네, 주인님.”
“가서 칼라치에게 대저택을 공격하라고 해.”
“예!”
힘차게 대답한 비버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 다 끝났어. 해가 뜨기 전, 스므차 너는 죽는다.”
스므차
“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던 디엘르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눈을 감았다. 나이가 많은 그녀는 몇 년 전부터 고통스러운 가슴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가슴의 통증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던 그녀는 안 되겠는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에 조용히 서 있는 도현에게 시선을 두었다.
“로이 사제님.”
“예.”
“가서 부성주를 말려 주세요. 내 몸이 지금 이래서 빨리 가기는 힘들게 됐어요.”
난데없는 그녀의 요구에 도현이 살짝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므차 성주의 친위대를 검으로 위협하고 있다는 나담을 그가 무슨 자격으로 말리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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