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디 임팩트 7권 7화
뒤에서 지켜보던 도현의 두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전 이제 디엘르 님에게 죽은 목숨이에요.”
겁에 질린 리샤가 몸을 떨며 작게 속삭였다.
“리샤.”
“네?”
“누군가 아무 죄 없는 널 죽이려 한다면 가만히 앉아서 죽겠니?”
리샤는 친위대들에게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부성주를 보며 절망에 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살고 싶어요.”
“살고 싶다면, 어떤 수를 쓰든 그 위기를 벗어나려고 노력을 해야 해. 설사 왕이 죽이려 하더라도 말이야.”
“디엘르 님을 거역하라는 말씀인가요?”
리샤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리샤의 물음에 도현은 야속하게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사제님.”
리샤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을 때 도현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은 여러 길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 어느 길을 선택할 지는 본인이 결정할 일이겠지.”
도현은 불꽃이 일어나는 눈빛으로 나담이 머리 높이 들어 올린 검을 노려봤다.
저 검이 내려오는 순간, 늘어선 친위대들의 창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담의 몸을 꿰뚫으려 할 것이다.
“지금 든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예?”
리샤가 눈을 깜빡일 때 도현의 모습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나담의 바로 등 뒤였다.
‘말로 안 되면, 행동으로 보이는 수밖에.’
나담에게 물리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그의 사고방식이 변한 건 리샤와 조금 전 대화를 나눈 직후였다.
중요한 건 충돌이 없게 만드는 것이지, 나담의 의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현의 손이 나담의 뒤통수를 스치듯 지나쳤다.
온통 앞에만 신경 쓰고 있던 나담은 윽 소리를 내며 힘없이 고꾸라졌다.
대사제 휴고스의 뒤통수를 촛대로 후려쳤던 리드만의 과감함이 도현에게 영향을 미친 부분도 적잖이 있었다.
“현명한 자군.”
늙은 노인이 다 된 스므차의 친위대 병사 중 한 명이 도현을 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에는 순간적으로 빠르게 움직인 도현의 움직임에 놀라워하는 빛도 섞여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도현이 기절한 나담을 질질 끌어서 친위대와 거리를 둔 후, 벽에 기대어 놨다.
“사제님!”
설마 도현이 나담을 때릴 줄은 예상도 못 했던 리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다가왔다.
“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라도 고려해야겠지?”
“하지만 디엘르 님이 이런 방식은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은데요.”
“최악은 막았으니까, 뒤는 조금 더 생각해 보자꾸나.”
부드러운 도현의 대답에 리샤가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스므차가 아직도 저곳에서 나오고 않고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인 걸까?’
도현은 친위대가 지키고 있는 복도 쪽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리샤 말에 따르면 복도 끝 쪽에 작은 방이 있는데, 그 곳을 통해야 성주의 지하 수련장이 나온다고 했다.
친위대들은 그 방을 지키기 위해 복도를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수련의 장소일까, 아니면 고대 지하 유적을 감추려는 위장술일까?’
만만치 않아 보이는 친위대들이 지키고 서 있는 복도와 그 너머 공간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기절한 나담에게 시선을 돌렸다.
‘분할 만도 하겠지. 상황이 악화될 대로 악화됐는데도 성주가 보이지 않으니 말이야.’
“사제님, 이제 어떻게 하죠?”
리샤의 물음에 도현은 그들이 뛰어왔던 복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디엘르 님이 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겠지.”
“네에.”
리샤는 벽에 살짝 등을 기댄 채 복도를 지키는 스므차의 친위대들을 힐끔거렸다.
평상시에는 가벼운 옷차림에 창 한 자루만 들고 서 있던 노인들이 지금은 검은 갑옷 뒤로 노인의 모습을 숨긴 채, 당당하게 서 있었다.
“사제님, 성내에서 벌어진 전투를 목격하고 오셨죠?”
“그래.”
“많이 죽었나요?”
“전쟁이니까.”
리샤는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저택은 안전하겠죠? 성주님과 친위대들이 있으니까요.”
도현은 선뜻 단정 지어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말씀이 없으신 걸 보면, 위험한 게 맞나 보네요. 하긴, 부성주님의 친위대들이 한 명도 못 돌아왔으니까요.”
어두운 리샤의 표정에 도현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 할 때 커다란 종소리가 대저택 전체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적들이 쳐들어오나 봐요!”
리샤가 비명처럼 큰 소리로 외치다가 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복도에 디엘르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적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에도 표정 변화 없이 다가와 벽에 기대어 있는 아들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된 거죠?”
“친위대와 충돌 직전이었습니다. 제 말씀을 듣지 않으셨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부성주님을 잠시 기절시켰습니다.”
디엘르가 얼굴을 찌푸리며 도현을 돌아봤다.
“어떻게 말입니까?”
도현은 단련된 손을 들어 보였다.
“신께서 제게 힘을 주셔서 그 힘을 이용했습니다.”
“주먹질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단순히 제가 주먹을 휘둘렀다면 부성주님께서 이렇게 정신을 잃을 정도는 되지 않았겠지요. 신의 손길이었습니다.”
도현의 태연한 대답이 그럴듯했는지 디엘르는 더 이상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도현이 비록 용병 출신이라고는 하나 나담을 주먹 하나로 기절시킬 수 있을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친위대와의 충돌을 막았으니 다행인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로이 사제.”
“별말씀을요.”
디엘르와 얘기를 마친 도현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딘과 리드만에게 걸어가다가 리샤와 눈이 마주치차 빙그레 미소를 보냈고, 리샤도 남들 모르게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건가?”
딘이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을 안 들어서요. 주먹으로 뒤통수를 때렸습니다.”
“잘했군. 지하 입구는?”
“복도 끝 쪽에 방이 있는데, 그곳이 지하 입구입니다. 하지만 리샤 말로는 스므차의 지하 수련장이라더군요.”
“누가 답답하게 지하에 수련장을 만들어 놓을까. 가소로운 위장술이군.”
딘이 낮게 웃음을 흘리며 옆에 서 있는 리드만에게 여유 있게 말했다.
“드디어 찾았군. 보나 마나야. 저곳이 바로 그곳으로 가는 입구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영주님. 이제 어떻게 저곳에 들어가느냐만 남았군요.”
리드만은 복도에 늘어서 있는 수십여 명의 친위대를 보며 탐스러운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스므차가 저 안에 있는 건가?”
딘의 속삭임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태도를 보면 지하에 스므차가 있는 게 거의 확실합니다.”
“그럼 기다려야겠군. 무슨 이유로 엉덩이 무겁게 지하에서 웅크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났으니 뭔가 변화가 있겠지.”
도현은 대저택 입구에서 본 친위대장 호드리오스를 떠올렸다.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던 그가 윌벤슨의 정예 병력을 깨트리면 스므차가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가 보세. 우리를 찾는군.”
리드만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도현은 디엘르에게 다시 다가갔다.
그녀는 기절한 나담을 깨우지 않고 측은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적들이 공격한다는 종소리가 조금 전 들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싸움이 종료될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사제님들은 기도를 시작해 주세요.”
차분한 그녀의 지시에 리드만은 딘과 도현을 돌아본 뒤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한데, 스므차 님은 안 나오시는 건지요?”
“때가 되면 나오실 겁니다.”
잘라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리드만은 더 이상 스므차 얘기는 꺼내지 못하고 딘과 도현을 응시했다.
“자, 기도하세.”
그들은 벽을 보고 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막 그들이 기도를 시작하려는 찰나,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방문이 엄청난 굉음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콰아앙!
복도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소리에 도현과 딘, 리드만은 벌떡 일어났다.
소리의 진원지는 친위대가 지키고 있는 복도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복도로 향한 순간, 문을 부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자 갈기처럼 길게 뻗어 나온 금발과 태양을 삼킨 듯 눈부시게 빛나는 부리부리한 큰 두 눈을 갖춘 거구의 사내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위용을 뿜어내며 긴 복도를 자신의 눈 아래로 두고 섰다.
“성주님을 뵈옵니다!”
수십여 명의 친위대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성주님을 뵈옵니다!”
디엘르를 제외한 시녀들도 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 사람이 스므차!’
도현은 만인을 압도하는 위엄을 풍기는 사자 머리의 노인을 보며 가슴이 크게 한 번 뛰었다.
“로이 사제, 뭐 하는 가?”
딘의 작은 목소리에 도현은 주위를 둘러봤다. 긴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은 스므차와 디엘르, 그리고 오직 그뿐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도현은 서둘러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숨 막히는 침묵이 긴 복도를 내리눌렀다.
모기가 우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적막감에 휩싸인 복도 위에 무거운 스므차의 음성이 더해졌다.
“일어나라.”
그의 지시에 친위대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일제히 창을 들고 일어섰고, 조금 떨어져 있던 시녀들과 도현 일행도 몸을 세웠다.
“조금 전 종소리가 나던데, 적들이 여기까지 왔나?”
“그렇습니다, 성주님.”
“친위대장은?”
“외곽에서 친위대를 이끌고 계십니다.”
“가자.”
친위대 수십여 명이 성주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늦게 나오셨습니다. 부성주가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앞으로 다가온 스므차에게 디엘르가 원망하는 눈빛을 보냈다.
스므차는 별말 없이 정신을 잃고 벽에 기대어 있는 아들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딱한 녀석이군.”
스므차가 나담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눈을 떠라, 나담.”
그가 몇 차례 몸을 흔들자 부성주 나담이 서서히 눈을 떴다.
“아, 아버지.”
“형편없는 놈 같으니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꼬락서니라니.”
스므차는 나담을 뒤로 강하게 밀쳐 냈다. 벽에 세차게 부딪힌 나담이 휘청거렸다.
“정신 차리고 따라와.”
스므차가 뚜벅뚜벅 걸어갔고, 잠시 망설이던 나담은 이를 악문 채 곧 아버지의 등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디엘르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시녀들을 대동해 자연스럽게 스므차 성주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사제님들은 거기서 뭘 하는 거죠? 어서 따라오세요.”
디엘르가 쳐다보고 있자, 눈치를 보며 조용히 복도에 남아 있으려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스므차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쉽군.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데 말일세.”
딘이 텅 빈 복도를 돌아보며 도현에게 속삭였다.
“일단 갔다가 상황을 봐서 되돌아와야겠습니다. 지금은 앞에 스므차가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요.”
도현은 친위대들을 이끌고 걸어가는 스므차 뒷모습을 깊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수십여 명이 그와 스므차 사이에 존재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스므차만 보였다.
‘크다, 내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로만 듣던 30년 전 대륙의 최강자들 중 한 명이라는 스므차의 첫인상은 호드리오스 이상으로 아주 강렬했다.
적발 거한 칼라치는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동공이 파괴된 왼쪽 눈이 욱신거렸다.
검은 안대를 벗은 그는 도현에게 당해 실명한 왼쪽 눈을 손으로 가만히 눌렀다.
욱신거림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도현에게 패한 이후로 찾아오는 심리적인 고통이었다.
그도 모르진 않았지만, 이렇게 실명한 눈을 손으로 만져 주면 잠시 후 그 욱신거림이 사라지곤 했다.
근본적인 치유책은 그에게 패배감과 말할 수 없는 초라함을 선사한 도현을 찾아내 이 고통을 돌려주는 것밖에 없다.
아마 그러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욱신거림이 찾아와 평생 그를 괴롭힐 것 같았다.
그는 검은 안대를 다시 쓴 후, 얼어붙은 땅에 깊숙이 박아 놓은 두 개의 강철 방패를 꺼냈다.
대저택 입구 주변에 늘어서 있는 스므차의 친위대와 호드리오스가 보였다.
“준비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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