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디 임팩트 7권 9화
철퍼덕.
부서진 철판 갑옷과 함께 벽에 반쯤 처박힌 전사의 몸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리저리 뒤틀려 있었다.
뒤따라온 도현은 그 장면을 보며 스므차가 손을 쓰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고 아주 단호한 인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가벼운 동작으로 붉은 갑옷 전사를 죽인 스므차는 뚜벅뚜벅 걸어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수십 년간 그를 위해 싸워 왔던 친위대들이 바로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호드리오스는 어디 있나?”
착 가라앉은 그의 질문에 싸움에 집중하던 친위대원 한 명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호드리오스 님은 전사하셨습니다!”
스므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내가 실수를 했군. 지원해.”
그의 지시에 복도 경비를 섰던 수십여 명의 친위대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싸움에 합류했고, 나담 역시 검을 들고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디엘르를 비롯한 도현과 그 일행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그 전투를 지켜봤다.
“스므차, 오래 기다렸다!”
친위대원의 목을 쳐 버린 칼라치가 웅혼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스므차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앞을 가로막는 붉은 갑옷 전사 몇을 때려죽인 뒤 허공으로 가볍게 몸을 솟구쳤다.
높게 뛰어오른 그는 짧은 시간 동안 지상을 관찰했고, 저 멀리 서 있는 호드리오스를 발견했다.
창이 목을 관통한 비참한 모습이었다.
“자네답게 갔군.”
작게 중얼거린 그는 땅으로 떨어지며 한 붉은 갑옷 전사의 머리를 박살 내 버렸다.
쿠웅.
머리를 짓밟고 선 그는 사자의 갈기처럼 뻗어 나온 긴 금발을 겨울바람에 휘날리며, 다가온 칼라치를 응시했다.
“네놈 짓이냐?”
“그렇다. 호드리오스도 별거 아니더군.”
칼라치의 대답에 스므차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설익은 녀석에게 당하다니, 호드리오스도 나이를 먹었나 보군.”
“나와 싸워 보면 당신도 나이를 먹었다는 걸 느끼게 될 거야.”
“애송아, 어떻게 죽고 싶으냐?”
스므차의 눈빛이 점점 투명해졌다.
“스므차, 너야말로 어떻게 죽고 싶은지 말해 봐라.”
뒤에서 들리는 음산한 목소리에 스므차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감싼 세 명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칼라치와 함께 스므차를 잡기 위해 온 노마법사들이었다.
“재밌는 날이군. 내 이름을 이렇게 쉽게 부르는 자들이 계속 나타나다니.”
“네가 뭐라고 그 이름 하나 못 부르겠나?”
음침하게 웃은 그들은 호리병에 속에 담아 둔 뼛가루를 재빨리 바닥에 뿌렸다.
“스므차, 영광으로 알아라, 역사 속에 사라진 소환사의 전통을 이은 우리들의 손에 죽는 것을.”
그들이 양팔을 활짝 펴고 주문을 외운 순간, 뼛가루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빙글빙글 돌며 눈부신 황금빛을 뿜어냈다.
잠시 후 황금빛이 사라진 공간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회색 피부의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대저택 입구 주변에서 바라보고 있던 도현은 거리가 멀어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황금빛 속에 태어난 중년 사내는 똑똑히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저게 마법인가? 사람을 만들다니. 아니,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좀 그래. 마네킹처럼 감정이 없어 보여.’
“소환술사를 보게 되다니, 놀랍군.”
딘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소환술사요?”
“그렇다네. 죽은 자들의 뼈를 이용해 사악한 주문을 걸어 생전의 모습을 복원한 뒤 일정 시간 동안 이용하는 자들이야. 평생 가도 보기 힘든 자들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신은 저런 짓을 허용하지 않지요.”
리드만이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소환술사들을 노려봤다.
‘죽은 자를 복원해 이용하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도현은 복원된 자가 어떻게 스므차를 상대할지 호기심이 생겨 자세히 살펴봤다.
소환술사가 손짓을 하며 자랑스러운 얼굴로 스므차에게 뭐라고 설명하는 것 같았다.
“스므차, 소환된 자가 누군지 아나?”
“얘기해 봐, 들어 주지.”
스므차는 소환술을 보고도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 점이 소환술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들은 이 뼛가루를 구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기 때문이다.
“백 년 전 죽은 대영주 키플런이다. 놀랍지 않느냐? 흐흐흐.”
대영주 키플런은 당시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 중 한 명으로, 현재에도 그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유명한 존재다.
그리고 그의 특기는 검술이었다.
“고맙군. 책에서 본 그를 이렇게 다시 보게 해 주다니 말이야.”
“널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인물이 필요한 것 같아서 말이야. 자, 그럼 한번 상대해 봐라.”
키가 제일 큰 소환술사가 망토 안에서 검을 꺼내 내던지자, 뼛가루를 통해 복원된 회색 인간 키플런이 자연스럽게 그 검을 잡았다. 그리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칼라치 옆에 섰다.
도현이 보기에 소환술사의 의지에 따라 조종되는 것 같았다.
“준비한 건 이것뿐인가?”
오래 기다렸다는 듯 스므차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흐흐흐, 상대해 봐라, 여유가 생기는지. 칼라치, 공격하게! 키플런은 의식하지 말고!”
소환술사의 말에 칼라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렸다.
‘드디어 이 힘을 마음껏 발휘해 볼 수 있겠군.’
도현에게 패한 그는 윌벤슨의 집에 머물며 폐인처럼 지내다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었다. 버티지 못하면 몸이 재로 변해 사라져 버리는 죽음의 엘바를 복용한 것이다.
성공을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비장했던 그는 죽음의 엘바를 준 윌벤슨이 지옥의 사신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상상도 못 하는 고통 속에서 그는 결국 죽음을 초월하고 몸속에 엘바의 힘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보여 주마! 이 칼라치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그의 의지가 움직이자, 몸속에 잠들어 있는 엘바의 힘이 화산처럼 분출돼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휘황찬란한 보라색 빛에 휘감긴 칼라치는 장검으로 스므차의 머리를 노렸다.
그의 검이 움직이는 궤적에 따라 보라색 빛이 아름답게 이어졌고, 스므차의 눈에 살짝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엘바를 복용한 자군. 소환술사에, 엘바라. 그래서 그렇게 자신이 있었나?”
스므차는 막대한 힘을 내포한 칼라치의 검을 부드럽게 막아 낸 뒤 옆으로 빠르게 검을 두 번 휘둘렀다.
채챙.
화려한 칼라치의 공격과 달리 소리 없이 다가온 키플런의 검이 연속으로 스므차의 검에 막혀 뒤로 튕겨졌다.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스므차의 눈에서 태양처럼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앙.
보라색 인간처럼 변한 칼라치의 몸이 스므차의 주먹에 맞아 멀리 나무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네놈에게는 검도 아깝다.”
“스므차!”
얼굴이 부어오른 칼라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달려와 키플런과 검을 주고받는 스므차의 등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스므차는 움찔하며 뒤로 밀리는가 싶더니, 끝까지 제자리를 지키며 칼라치의 힘을 견뎌 냈다.
“넌 빠져 있어, 키플런과 검을 섞고 싶으니까.”
다시 한 번 스므차의 주먹에 맞은 칼라치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놀랍다. 죽은 자가 어떻게 저렇게 깊이 있는 검을 사용할 수가 있지?’
칼라치의 변화도 놀라웠지만 도현은 그보다 스므차를 상대로 허를 찌르는 기괴한 검술을 펼치고 있는 키플런이 더욱 놀라웠다.
“가세. 기회는 지금뿐이네.”
저들의 싸움에 푹 빠져 있는 도현의 팔을 딘이 툭 치고는 낮게 속삭였다.
도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칼라치가 없는 붉은 갑옷 전사들을 친위대가 근소하게나마 몰아붙이고 있었고, 디엘르는 남편인 스므차의 싸움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까.’
도현은 스므차와 키플런의 현란한 검술을 좀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지하 유적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했다.
“가시죠.”
도현은 딘과 함께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싸움이 빨리 끝나면 어떡합니까?”
리드만이 작은 목소리로 우려를 표하자 딘이 숲 너머 성내를 가리켰다.
“싸움이 여기만 있는 게 아니잖나. 스므차가 저들을 이긴 다 해도 대저택을 떠나 수습해야 할 일이 적지 않을 거야.”
“디엘르는요? 싸움이 끝나면 우리들이 사라진 걸 금방 눈치챌 텐데요.”
“괜찮아. 설마 우리가 지하 유적을 찾으러 갔다고 생각하겠나? 궁금하겠지만 깊게 생각은 안 하겠지.”
“그렇군요.”
“도현, 얼른 가세. 그만 보고.”
“아, 예.”
딘과 리드만이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스므차와 키플런의 싸움을 다시 응시하고 있던 도현이 머쓱한 표정으로 되돌아섰다.
그때 도현은 자신들이 몰래 움직이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훔쳐보는 리샤와 눈이 마주쳤다.
‘어쩌지?’
리샤가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는 순간, 그녀 앞에 있는 디엘르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볼 것 같았다.
딘과 리드만 역시 리샤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리샤는 도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후우, 다행이군. 그만 가세.”
딘과 리드만이 움직이자 도현은 리샤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소리 없이 몸을 날렸다.
석상
스므차의 친위대들이 경비를 섰던 구역에 서둘러 온 도현과 일행은 복도 끝 방으로 향했다. 스므차가 등장하며 부순 문의 잔해들이 복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방을 앞에 두고 딘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혹시 안에 경비들이 숨어 있을 수 있네. 필요하면 과감히 손을 써야 하네.”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스므차가 나왔던 방 안으로 민첩하게 진입했다.
천장에서 내려온 촛불만이 방 안을 밝힐 뿐 안은 무거운 적막감 속에 텅 비어 있었다.
‘깨끗하다.’
도현은 장식품 하나 없는 방 안의 전경을 빠르게 훑어보다가 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스므차가 등장한 이 방 어딘가에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지하로 가는 입구가 존재할 것이다.
딘과 리드만도 흩어져 일일이 손으로 석벽과 바닥을 조사했다.
그러나 쉽게 발견할 것 같았던 지하로 가는 입구는 그들의 애만 태울 뿐 꽁꽁 몸을 숨기고 있었다.
“흠, 거참 이상하군, 있어야 할 게 없다니.”
턱을 매만지던 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영주님, 뭐 하시려고요?”
바닥을 더듬던 리드만이 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시간이 아주 많은 것도 아니고……. 비키게, 이곳을 부수면 지하 입구가 드러나겠지.”
“여기서 힘을 다 사용하시면 나중에 도망칠 때는요?”
“음.”
딘이 미간을 좁혔다. 검에 혼돈의 마나를 심어서 바닥과 벽을 부숴 버리는 행동은 아주 큰 힘이 소모된다. 일순간에 힘이 회복되지는 않는다.
“걱정 말게, 스므차만 아니면 문제없으니까.”
딘이 검을 거꾸로 세우더니 힘껏 바닥에 꽂았다.
그는 불꽃을 만들며 꽂힌 검에 근엄한 얼굴로 혼돈의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검을 통해 바닥 곳곳으로 스며든 혼돈의 마나는 그가 힘을 주는 순간, 폭발을 일으키며 바닥을 뒤엎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마나가 필요했다.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는데 마구 휘날렸고, 그의 강철 검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영주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도현이 급히 제지하자 딘은 힘을 거두며 그를 쳐다봤다.
“왜 그러나? 찾기라도 했나?”
“의심스러운 곳이 있습니다. 그것 먼저 확인했으면 합니다.”
“그래? 그곳이 어딘가?”
“저곳입니다.”
도현은 천장의 촛불을 가리켰다. 약 열 개의 청동 촛대가 원형을 이루며 샹들리에처럼 천장에서 내려와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촛대?”
딘이 흥미롭다는 듯 촛대를 응시했다.
“어떤 식으로 확인해 볼 건가?”
“간단합니다.”
도현은 제자리에서 높게 점프를 한 뒤 천장에 쇠사슬로 매달린 청동 촛대 지지대를 힘껏 잡아당겼다.
구드드드드.
청동 촛대 지지대와 연결된 천장의 쇠사슬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밑으로 늘어졌다.
그 순간, 벽의 한 면이 통째로 위로 올라가며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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