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161화 (161/575)

[161] 디 임팩트 7권 11화

도현은 형형색색의 그림과 글이 그려진 종이를 보며 감탄했다.

수천 년 전의 고대인들의 문명이 지금 그가 활동하고 있는 이쪽 세계의 문명보다 어느 면에선 앞선 느낌이었다.

“뭐 그렇다고 하더군. 마법도 고대의 수준에 비하면 지금이 많이 뒤처져 있다고 하니까 말일세. 도현, 그쪽 상자 열어서 마저 담게.”

딘은 도현의 말에 대꾸하며 꼼꼼하게 책을 챙겼다.

“영주 체면에 말이야, 도둑질하듯 이러는 게 쉽지 않아. 하지만 이왕 손을 댔으니 어쩌겠나, 확실히 다 가지고 가야지. 어느 부분에 폭주와 관련된 해결책이 언급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

서고 안에 청동 상자를 탈탈 털어 내자 양피지와 책, 종이 묶음 등이 가득 담긴 커다란 자루가 네 개나 만들어졌다.

무게도 만만치 않아서 리드만이 자루 한 개를 시험 삼아 어깨에 메어 보고는 옆으로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영주님, 사람 몸무게보다 무겁습니다.”

“걱정 말게, 자네보고 들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까.”

“험, 감사합니다, 영주님.”

“근데 말이야, 자네 아까부터 체력이 약하다고 한 게 설마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연기를 한 건 아니겠지?”

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자 리드만이 도현을 보며 손짓을 했다.

“도현, 자네가 보기에 내가 연기를 한 것 같나? 아니지?”

“네.”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자루 끝을 끈으로 단단히 조여 맸다.

‘이 안에 찾는 게 있어야 될 텐데.’

서고 안의 책을 다 쓸어 담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만, 고대 성주의 무덤에 보관된 책이라면 나름 의미와 가치가 있을 거라는 게 희망을 높여 주고 있었다.

“영주님, 이 안에 어쩌면 고대 마법과 관련된 지식이 들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때 견습 마법사로 활동하다 신전의 사제가 된 리드만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사제가 욕심을 품으면 쓰나?”

딘이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을 닦아 내며 자루 위에 앉았다. 엉덩이에 깔린 게 고대인들의 기록이라는 게 딘을 약간 흥분시키고 있긴 했지만 그는 차분함을 유지했다.

“욕심이 아닙니다. 신은 고대의 지식에 해박한 사제를 좋아하십니다.”

“그놈의 신은 자네 편할 대로 등장하는군. 뭐, 어차피 자네가 이걸 다 읽어 볼 테니 마음대로 하게. 찾고 싶은 지식이 있다면 찾고, 태워 버리고 싶은 게 있으면 태워 버려.”

“한 가지 우려되는 게 있습니다.”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도현이 자루에 손을 얹고서 말했다.

“뭐가 말인가?”

“서고에 있던 책들이 이게 다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부는 스므차 성주가 외부로 가지고 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도현의 말에 딘이 낮게 웃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저택 서재에 그가 고대의 책들을 보관하고 있을까? 30년 전 지하 유적을 폐쇄시켰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이곳을 감추며 혼자서 드나들 정도라면, 그렇게 허술하게 고대의 책들을 방치할 사람이 아니네. 스므차는, 장담컨대 절대 고대의 책들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을 거야.”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스므차의 친위대가 복도 앞을 지키고 있었고, 또 스므차 본인도 실제로 저기 지하 광장에서 수련을 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계속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스므차에게는 통제된 이 장소가 어떻게 보면 가장 안전한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상자를 열어 본 흔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보고 나서 상자에 원위치로 돌려 놨다면, 수천 년 전 고대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그들도 빠짐없이 확인할 수가 있는 셈이다.

“아니면요?”

리드만이 말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그것까지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편하게 말을 한 딘은 자루에서 엉덩이를 뗐다.

“책만 가지고 간다면 아쉬움이 남겠지. 저쪽 석실에 가서 고대인들이 남긴 무구도 하나씩 가지고 나가세.”

도현은 딘을 따라 건너편 석실로 넘어갔다.

그곳엔 고대 다크캐슬의 성주들이 생전에 사용했을 것 같은 무기와 방어구 들이 먼지에 쌓인 채 장식대에 걸려 있었다.

“리드만, 이건 어떤가? 위엄 있어 보이나?”

딘이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황금빛을 띤 갑옷을 들어 보였다.

“그걸 입고 돌아다니시려고요? 가는 길마다 도둑들이 달라붙겠습니다.”

“음, 하긴 좀 그래 보이지?”

딘은 입맛을 다시며 화려한 갑옷을 내려놨다.

“이건 어떤가?”

칙칙한 갑옷 위엔 악마처럼 기괴하게 생긴 몬스터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이 갑옷을 입은 성주는 꽤나 살육을 즐겼을 것 같았다.

“악운이 강하게 서린 갑옷입니다. 버리십시오.”

“그럼 이건?”

“좀 커 보입니다. 대장장이에게 맡겨도 쉽게 줄어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곳의 갑옷들은 다 크잖은가?”

고대 성주들의 체격이 모두 거인처럼 컸는지 장식대에 걸려 있는 갑옷류와 무기들은 하나같이 거대했다. 딘보다 체격이 좋고 키가 큰 도현조차도 갑옷이 커서 착용하기 어려웠고, 검 또한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길고 무거웠다.

“영주님, 그냥 포기하시고 그만 나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지하에서 시간을 길게 보내는 것 같아서, 리드만은 스므차가 나타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쉽군. 이 훌륭한 갑옷들을 놔두고 가야 하다니 말이야.”

딘과 도현은 무겁고 큰 자루를 두 개씩 어깨에 메고 이 성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러니 당장 입지도 못할 부피가 큰 갑옷들을 따로 챙겨서 나가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이거라도 하나 챙겨 가야겠군.”

딘이 무기가 진열된 장식대에서 유일하게 하나 있는 고대인의 단검 하나를 집어서 품에 넣었다.

“자네는 뭘 챙겼나?”

석실에서 나가며 딘이 묻자 도현은 손목을 보여 줬다.

“빈 손목은 왜 보여 주는 건가?”

“아닙니다. 손목 보호대를 찼습니다.”

“그래?”

살짝 놀란 딘이 손가락을 튕겨서 도현의 손목을 가격했다.

티이잉.

청아한 소리가 서고가 있는 석실에 울려 퍼졌다.

“응? 빈 손목이 아니었군.”

딘이 손가락에 전해져 오는 통증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사실은 유리처럼 투명한 손목 보호대를 찼습니다.”

딘이 리드만에게 이런저런 갑옷 등을 보여 주며 어떠냐고 물어볼 때 도현은 이미 마음을 비우고 석실을 가볍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몸보다 훨씬 큰 갑옷과 거대한 검 등은 그가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그의 팔꿈치에 부딪힌 장식대 위의 갑옷이 그만 밑으로 떨어졌다.

다른 갑옷과 달리 변색되고 이곳저곳이 심하게 파괴된 갑옷을 장식대 위에 다시 걸쳐 놓은 도현은 잠시 그 앞을 떠나지 않고 갑옷을 손으로 쓸어내려 갔다.

‘치열하게 싸웠군.’

화려하고 보기 좋았던 다른 갑옷들과 달리 이 갑옷엔 칼날 위를 걸어간 외로운 사내의 느낌이 물씬 묻어났다.

과연 누가 이 갑옷을 입었던 걸까 상상력을 일으키며 파괴된 갑옷을 쓸어내리던 도현은 순간 손가락에 걸리는 어떤 물건을 발견했다.

‘뭐지?’

파괴된 갑옷에 교묘하게 걸려 있어서 직접 손으로 만져 보지 않았다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그 물건은 손목에 채울 수 있게 열렸다 닫혔다 하는 투명한 손목 보호대였다.

손목에 차고 보니 매우 가벼워서 착용감도 느껴지지 않았고, 재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검으로 힘주어 그어 봐도 끄떡없었다.

‘호신용으로는 그만이겠는데.’

철인이 아닌 이상 도현도 검이나 화살을 맞으면 몸에 상처가 생기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팔뚝 길이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이 투명한 손목 보호대라면 적의 웬만한 검이나 화살은 다 튕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한 쌍으로 된 손목 보호대는 아닐까 해서 갑옷과 그 주변을 잘 찾아봤지만, 투명한 손목 보호대는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하나면 어때, 충분해!’

고대인의 손목 보호대를 얻은 도현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딘과 함께 석실을 빠져나온 것이다.

“역시 되는 사람은 따로 있군. 범상치 않은 손목 보호대 같으니까, 잘 관리하게.”

도현의 설명을 다 들은 딘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자아, 그만 나가 볼까?”

딘이 커다란 두 개의 자루를 어깨에 멨고, 도현도 남은 두 개의 자루를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짐이 없는 리드만은 대신에 횃불을 들었다.

고대 다크캐슬 성주들의 시신이 보관된 단층 건축물을 빠져나온 그들은 구름다리를 건너 원형의 지하 광장에 발을 디뎠다.

“지하 광장 주변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습니다, 영주님.”

리드만이 말했다.

“미친 짓이지. 죽은 자들은 그저 작은 무덤 하나면 그만인 것을.”

“영주님이 죽는다면 제가 꼭 작은 무덤 하나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큰 게 좋지. 후세 사람이 날 알아볼 수 있게.”

도현은 딘의 말이 금세 달라지자 미소를 머금었다.

‘밖에 싸움은 어떻게 됐을까? 스므차가 호락호락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는데.’

칼라치와 복원된 인간을 사이에 두고도 스므차는 전혀 밀리는 기색 없이 오히려 압도하고 있었었다.

도현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스므차는 그 싸움에서 승리하고 성내에 침입한 도시 주민과 윌벤슨의 병력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변수는 윌벤슨이다.

그는 칼라치와 100인의 전사, 소환술사만으로 스므차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판단하고 일을 진행시켰다.

친위대장 호드리오스를 칼라치가 죽였다는 점에서 그의 판단이 엉성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스므차의 수준을 그가 오판한 것 같아.’

윌벤슨이 생각하는 강함의 수준을 스므차가 뛰어넘은 게 그에게는 치명적인 실수였던 것 같았다.

‘과연 그는 스므차를 향해 준비한 또 다른 카드가 있을까?’

전쟁의 향배에 대해 잠시 생각하며 걷던 도현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와 동시에 리드만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지하 광장을 가로질러 가던 딘 역시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영주님!”

도현이 굳은 얼굴로 딘을 불렀다.

“나도 감지했네. 느낌이 별로야. 뛰세!”

“예!”

영문을 모르는 리드만도 허겁지겁 뛰었다.

그러나 그들이 채 몇 걸음 뛰기도 전에 지축이 흔들리며 지하 광장이 통째로 가라앉았다.

쿠콰콰콰콰쾅.

손쓸 틈도 없이 땅속으로 가라앉은 원형의 지하 광장이 어느 순간 멈췄다.

도현이 보기에 땅속으로 족히 100미터는 내려온 것 같았다. 엄청난 깊이였다.

리드만은 침을 꿀꺽 삼키며 영주와 도현을 둘러봤다.

“더는 안 내려가는데요?”

“어처구니가 없군. 땅이 이렇게 가라앉다니.”

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도현을 쳐다봤다.

“올라가는 데 애를 먹겠어.”

“네,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던 도현이 이마에 잔뜩 주름을 만들었다.

“물이 내려옵니다.”

“뭐라고?”

“들어 보십시오. 지하 광장 둘레를 돌던 지하수가 지금 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요.”

쏴아아아아.

개울물처럼 졸졸 흐르던 지하수가 아니었다. 막아 놓은 둑이 터진 것처럼, 어디서 나타났는지 거친 물줄기들이 가라앉은 지하 광장의 벽면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땅이 주저앉았을 때보다 딘의 표정이 훨씬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린 것 같군.”

“덫요?”

도현이 딘을 돌아봤다.

“지하 광장을 돌던 지하 수로는 멋으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니었어. 우리와 같은 침입자들에 대비해 이런 함정을 만들고 수장시키려 한 것이지.”

‘정말 그게 가능한 걸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