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디 임팩트 7권 13화
딘의 재촉에 화로에 말리던 옷을 서둘러 입은 리드만은 고개를 젖히며 하품을 크게 하다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 석상 위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힌 리드만이 등을 돌리며 앞서 가는 도현과 딘에게 더듬거리며 외쳤다.
“저, 저기!”
“응? 왜 그러나?”
뒤돌아선 딘과 도현이 리드만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린 순간, 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노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쿠우웅.
작은 진동을 만들며 땅에 착지한 그는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를 풍기며 주위를 둘러봤다.
“누군가 했더니, 네 녀석들이었어.”
“스므차 성주!”
도현과 딘, 리드만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굳어졌다. 스므차는 화로 옆에서 불을 쬐며 낮은 중저음으로 말했다.
“위에서 들었다. 고대 문헌들이 어쨌다고?”
심상치 않은 그의 음성에 그 누구도 그것들이 호수로 변한 저 물속에 잠겨 있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해!”
콰아앙!
스므차가 사람 몸통만 한 화로를 발로 걷어차자, 화로가 박살이 나며 그 안에 담긴 불덩이들이 세 사람을 향해 쏜살처럼 날아갔다.
사방을 뒤덮으며 다가오는 불길들을 도현과 딘이 검을 꺼내 모두 다 막아 냈다.
투두두둑.
세 사람 발밑에 불씨들이 길게 이어져서 은은한 빛을 냈다.
“미안합니다, 스므차 성주. 우리도 필요해서 가지고 나오다가 그만…… 호수로 변한 저곳에 빠졌소. 용서해 주시오.”
딘이 검을 밑으로 내리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용서? 그게 어떤 것인 줄 알고 그리 가벼운 말을 하는 것이냐!”
스므차의 눈이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이 났다.
그는 사실 도현과 일행이 물속에서 벗어나기 전에 이곳에 도착해 석실의 서고를 확인한 상태였다.
굴러다니는 빈 청동 상자의 모습에 아연실색한 그는 분을 참지 못한 상태에서 제발 함정에 빠진 자들이 죽지 말고 살아서 나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나온 자들은 뜻밖에 사제복을 입고 디엘르의 곁에 서 있던 이들이었다.
“한두 권도 아니고, 서고의 모든 책들을 다!”
“면목 없소. 하지만 30년 전에 발견했으니, 성주께서도 읽어 볼 만한 건 다 읽어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영주님, 왜 그런 말씀을!”
스므차의 화를 돋우는 말을 하는 딘의 행동에 리드만이 눈짓을 줬다.
“틀린 말은 아니잖은가? 마음을 비우게. 어차피 어떤 말을 하든 스므차와의 싸움은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딘은 옆에 서 있는 도현을 힐끔 쳐다봤다. 검을 뽑은 도현은 가만히 호흡을 조절하며 스므차를 고요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일전을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도현, 내가 막고 있을 테니, 리드만을 데리고 여기서 나가게.”
다가오는 스므차를 보며 딘이 빠르게 말했다.
“영주님.”
“아직 우리는 그의 적수가 못 돼. 게다가 폭주를 하게 된다면 나와 자네는 서로에게 검을 겨누게 될 수도 있어. 서로를 못 알아보고 싸우게 된다면 그건 최악이 아닌가? 얼른 가게!”
옆에서 딘의 말을 들은 리드만이 낯빛이 변해 말했다.
“전 안 갑니다. 영주님과 함께 남겠습니다. 도현, 자네만 가게.”
“어허, 영주인 내 지시를 듣게.”
“싫습니다.”
리드만이 대답을 하는 순간, 딘이 그의 머리를 가격해 기절시켰다.
“자네는 발이 무척 빠르니, 내가 스므차를 막는 동안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걸세. 리드만을 부탁하네.”
도현은 순간 많은 고민을 하다가 검 끝을 다가오는 스므차의 미간에 겨누었다.
그 날카로운 기세에 다가오던 스므차의 표정이 살짝 변하며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칼라치도, 복원된 키플런도 스므차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는데, 도현의 검은 기세만으로 그를 멈추게 했다.
“영주님, 절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십니까? 제가 과연 스므차에게 질까요?”
“뭐라고?”
“영주님이 생각하시는 저는 오래전 과거의 인물입니다.”
취영산에서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도현의 무위를 딘은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이 싸움은 제가 맡습니다.”
투웅.
도현의 몸이 가볍게 허공을 날았다.
그의 얼굴은 스므차를 상대한다는 두려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스므차와 같은 대검객과 언제 검을 주고받을까! 강자들과의 실전은 언제든 목숨을 잃을 위험이 따르는 법이지. 피하기만 해서는 결코 발전할 수가 없다.’
사악.
도현이 내려치는 검을 스므차가 피하며 검 손잡이를 잡아 갔다.
“이제 보니 진짜는 네놈이었구나.”
스르릉.
스므차의 검이 뽑히며 눈부신 속도로 도현의 심장으로 날아갔다.
채애엥.
“영광입니다, 성주님.”
검신으로 그의 검 끝을 막은 도현이 한 발로 힘을 주며 스므차의 검을 뒤로 밀어냈다.
“전설과 같으신 분의 검을 직접 마주하게 돼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좀 더 정중히 나를 찾아왔어야 했다, 이 도둑놈아!”
스므차는 검에 힘을 주어 도현을 뒤로 튕겨 낸 후, 바람처럼 접근해 수십 번의 검을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에 만들어진 수많은 검의 환영들이 도현의 온 몸을 감싸며 제각각 살아서 날뛰었고, 도현은 지그시 눈을 반개한 채 호검술 전반 1식부터 12식까지 한 번에 펼쳐 내며 그 모든 검들을 다 파괴해 버렸다.
떨어진 딘의 눈에는 도현이 그저 하나의 원을 그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담긴 호검술의 검의는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스므차의 눈에는 그 모든 게 보였다.
“어디 이것도 막아 보아라.”
검을 거꾸로 쥔 스므차의 눈에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으핫!”
나이답지 않게 호쾌한 기합 소리를 낸 스므차가 검을 바닥에 꽂자, 땅이 뒤집어지며 그 안에 누워 있던 황금빛 검이 환상처럼 나타나 검을 들고 서 있는 도현의 머리를 위에서 내리쳤다.
이미 검의 기운을 유형화해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스므차는 그가 만들어 보낸 황금 검을 도현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봤다.
엄청난 마나가 집약돼 유형화된 황금 검은 그만한 힘으로 되받아치지 않는 이상,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막는 건 무엇이든 잘라 버리고 소멸되는 것이기에 검의 기운이 유형화돼서 날아온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 이런 수법도 있구나.’
온 정신을 집중해 스므차를 상대하고 있던 도현은 땅속에 검의 기운을 모은 뒤 순간적으로 검의 모양을 만들어 날리는 놀라운 수법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설프게 막으면 한순간에 끝이 난다.’
황금 검 속에 내포된 막대한 힘을 직감한 도현은 밑에서 위로 부드럽게 검을 휘둘렀다.
검세는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그 검 속에는 도현이 주입한 어마어마한 내공이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
‘잘라 낸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황금 검과 도현의 검이 격돌한 순간, 눈부신 광채가 사방으로 퍼지며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우르르 콰콰콰콰쾅.
“저 검을 정면으로 막다니!”
지켜보던 딘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광채가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도현은 뒤로 약간 비틀거렸다. 제대로 막아 내긴 했지만, 약간의 손해를 본 것이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낸 도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굉장하군요.”
“네놈 이름이 도현이라고?”
“그렇습니다.”
“검술과 마나가 이미 조화를 이뤄서 하나의 벽을 깬 것 같은데, 그만한 자가 어찌해서 치졸하게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느냐.”
도현은 딘을 쳐다봤다. 혼돈의 마나 때문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딘에게 물은 것이다.
“그건 내가 설명하겠소.”
“넌 조용히 해라. 나와 말을 섞을 자격이 없다.”
“난 영주요!”
“오늘 내 손에 죽은 구역장들 놈 중에 영주 아닌 녀석들은 한 명도 없다. 목을 날리기 전에 입 다물고 있어.”
스므차가 다시 황금 검을 날리려는 시늉을 하자 딘이 얌전해졌다.
“말씀드리게.”
이제 와서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딘의 손짓에 도현은 차분히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혼돈의 마나가 일으키는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그렇습니다.”
“사라진 그 수련법을 익히고 있다니, 놀랍군.”
흥미를 보인 스므차는 뒤를 돌아봤다.
호수처럼 변했던 장소의 물이 지하 수로를 통해 외부로 급속도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라앉았던 지하 광장이 서서히 위로 부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땅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다시 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까?”
도현의 물음에 스므차는 검을 거두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스므차가 물이 빠지는 지하 수로로 다급하게 뛰어가자 도현도 그 뒤를 쫓았다.
“우리를 그냥 보내 줄 겁니까!”
딘이 따라가며 물었다. 검을 거둔 스므차의 모습에서 한 가닥 기대를 건 것이다.
“너희들 하기 나름이다.”
스므차는 무겁고 뜨거운 화로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서는 지하수로 양 주변으로 뿌렸다. 불길이 일며 주변이 환해졌다.
“눈을 크게 뜨고 살펴라. 수로를 통해 빠져나가는 고대 문헌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싸우지 않고도 살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딘은 재빨리 기절해 있는 리드만을 메고 와서 지하 수로에 빠트렸다.
“으허!”
리드만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옆을 보니 도현과 리드만이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주님, 뭐 하시는 겁니까? 스므차는요?”
말을 하던 그는 근처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스므차를 목격하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땅이 흔들리는 게 느껴지지? 지하 광장이 다시 솟아오르고 있네. 찼던 물은 다시 이 수로로 빠지고 있고.”
“그런데요?”
“고대 문헌을 빠짐없이 찾으면 스므차 성주가 우릴 살려 줄 것처럼 얘기하더군.”
“그렇습니까? 잘됐네요.”
“그러니까 눈 크게 뜨고 잘 살피라고.”
“알겠습니다, 영주님.”
딘은 도현을 쳐다봤다.
“자네, 대단하더군. 내가 자네를 정말 아주 잘못 본 것 같아.”
“아닙니다, 영주님.”
“그 황금 검은 나도 솔직히 폭주하지 않고는 받기 힘들거든. 대단했네.”
딘은 허벅지까지 찬 물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스므차가 한 입으로 두말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한번 그의 말을 믿고 고대 문헌을 잘 건져 내자고. 자네가 충분히 잘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일단은 싸움은 피하는 게 낫지 않은가?”
“예.”
도현은 담담히 대꾸하며 앞에서 흘러오는 양피지 하나를 건져 냈다. 그의 표정엔 스므차와의 싸움을 중도에 멈춘 아쉬움이 깊게 배어 있었다.
물에 흘러오는 고대 문헌들은 도현이 잘라 버린 자루 안에 있던 것들이고, 나머지 문헌들은 자루 안에 보관된 채 완벽히 제자리를 찾은 지하 광장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자루 안에도 물이 새어 들어가 젖지 않은 고대 문헌은 하나도 없었다.
‘난감한데. 그림과 글 태반이 알아볼 수 없게 됐어.’
땅바닥에 넓게 늘어놓은 고대 문헌은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였다.
도현은 옆을 봤다.
스므차가 횃불을 비추며 늘어놓은 고대 문헌들을 매의 눈빛으로 살피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화를 잔뜩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영주님, 저러다 갑자기 우리에게 검을 휘두를 것 같습니다.”
리드만이 화로의 불을 쬐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최선을 다해 건져 냈으니 그의 판단을 기다려 보자고. 정 안되면, 그땐 어쩔 수 없이 도현과 합세해 끝장을 보는 수밖에.”
딘은 물이 차 질퍽거리는 장화를 벗어서 물을 쏟아 냈다.
“이길 수 있습니까?”
“모르지. 하지만 자네가 기절한 사이에 도현이 보여 준 실력이 아주 감동적이었어.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폭주는요?”
“운명에 맡겨야겠지. 리드만, 가서 슬쩍 고대 문헌들을 둘러보게. 운 좋게 우리가 찾는 게 눈에 띌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글씨가 물에 풀어져서 알아볼 수가 없는데요.”
“다는 아니잖은가? 어서.”
리드만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걸음을 뗐다.
“어디 가십니까?”
이쪽으로 다가오던 도현이 물었다.
“우리가 찾는 게 있는지 한번 살펴보려고.”
“예? 하지만…….”
“영주님의 지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