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디 임팩트 7권 16화
리드만이 당황해 언성을 높였지만 눈치가 보통이 아닌 윌벤슨은 이미 확실하다는 표정이었다.
“청동 촛대 지지대를 잡아당겼더니 통로가 나오던가?”
“어! 당신이 그걸 어떻게!”
리드만이 깜짝 놀라며 반문을 했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지하 유적 때문에 잡혀 왔다는 걸 시인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영주님, 제가 몸이 많이 피곤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아등바등 숨길 이유도 없으니까. 그래, 맞소, 윌벤슨. 지하 유적 때문에 잡혀서 여기로 왔지.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가?”
딘이 턱을 세우며 말했다.
하지만 윌벤슨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옆에 있는 도현을 보며 말했다.
“들어가 봤더니 어떻던가? 거대한 인간 석상이 볼만했지?”
“지하 유적에 대해 잘 알고 있군요. 어떻게 그렇게 들어가 본 것처럼 자세히 알고 있습니까? 촛대의 장치도 알고 말입니다.”
도현은 놀라움을 감추며 물었다.
“모를 수가 없지. 30년 전, 지하 유적을 발견한 사람이 내 스승이셨으니까.”
그의 얘기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스승이라고요?”
“그렇다네. 존경받아 마땅한 대마법사셨지.”
윌벤슨의 눈에는 흠모의 눈빛이 가득했다.
“그런데 의외로군, 스므차가 지하 유적을 노린 도둑을 이렇게 살려 두다니 말이야. 입막음을 하려면 반드시 죽였어야 하는데, 무슨 까닭일까?”
윌벤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도현과 딘, 리드만을 예리하게 둘러봤다.
“이게 다 일곱 신께서 보호해 주신 게 아니겠소?”
딘이 사제처럼 기도하는 시늉을 했다.
“웃기고 있군. 스므차는 필요하면 일곱 신이 현신해도 그 머리를 잘라 버릴 위인이다. 그는 이유가 없으면 절대 칼을 멈추지 않아. 냉정한 자지.”
“살려 준 이유를 우리가 구태여 그에게 따져 물을 건 없지 않소?”
딘은 자세한 설명을 피했다.
“당신 스승 이야기나 해 보시오. 어떻게 30년 전 고대 지하 유적을 당신 스승이 발견했다는 건지.”
“궁금한가?”
“난 원래 남에 일에 관심을 두는 성격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한번 들어 봅시다.”
도현도 궁금해서 윌벤슨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계속 쳐다봤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뜨거웠는지 윌벤슨은 나직하게 웃었다.
“어차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야기를 담아 둬서 뭐할까?”
윌벤슨은 지친 얼굴로 바닥에 누워 어두운 감옥 천장을 올려다봤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대마법사이신 스승님과 난, 30년 전 스므차를 도와 몬스터를 이 성에서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당시 내 마법도 그리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대마법사이신 스승님은 발군의 활약을 벌이셨지, 그분이 있음으로 해서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작고 가늘어서 귀를 기울여야지만이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분은 대저택 내부에 숨겨진 비밀 통로까지 발견하셨지. 그중 하나가 청동 촛대를 움직여 작동하는 벽이었어. 바로 고대 지하 유적의 입구였지.”
도현과 딘, 리드만은 흥미로운 그의 얘기에 빠져들어 갔다.
“난 다른 일 때문에 직접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스므차와 단둘이서 그곳에 들어갔다 나온 스승님께서는 매우 흥분한 얼굴이셨어. 그리고 그날 밤, 고대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며 뛸 뜻이 기뻐하셨지. 아직도 눈에 선해. 늘 위엄 있는 분이 그렇게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모습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작고 가늘었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다음 날 다시 그곳으로 들어간 스승님은 돌아오시지 않았다. 스므차만이 홀로 지하 유적에서 나왔지.”
“어떻게 된 겁니까?”
도현이 저도 모르게 질문을 했다.
“스므차가 죽였네.”
“그가요?”
“고대인이 남긴 물건을 잘못 건드려서 스승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안에서 손을 썼다더군. 거짓말이야.”
누워서 말을 하던 윌벤슨이 상체를 세우며 차가운 눈빛으로 도현을 봤다.
“욕심에 빠진 스므차가 고대인의 지식을 원하는 스승님을 그냥 죽인 거야. 그게 진실이지.”
“스므차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도현이 차분히 말했다.
“그래서 내가 요구를 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내가 안에 들어가서 스승이 뭘 잘못 건드렸는지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을 하는 윌벤슨의 피에 물든 수염이 흥분으로 부르르 떨렸다. 30년 전 일이지만 아직 그는 그 일이 뼈에 사무친 원한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위험한 장소라며 거부하더군. 오히려 경비를 잔뜩 세우고는 그 누구도 못 들어가게 했어. 하지만 자신은 은밀히 그곳을 드나들더군. 가증스러운 놈. 이 손이 보이나?”
윌벤슨이 왼손을 잡아당기자 의수가 쑥 빠지며 손목에 찬 수갑이 흘러내렸다.
“스므차가 자른 것이다. 스승의 죽음 이후, 내가 몰래 들어가려다 잡혀서 이 감옥에 갇힌 뒤에, 스므차가 아량을 베푸는 척하며 직접 자른 것이지.”
윌벤슨은 의수를 다시 손에 끼우며 소름 끼치는 눈빛을 발산했다.
“스므차는 그런 자다. 필요하다면 선의로 도움을 주고 있던 대마법사의 목도 베어 버리는 자.”
“그래서 전쟁을 일으킨 겁니까?”
도현의 말에 윌벤슨이 낮게 웃었다.
“벌써 내 이야기가 퍼진 것인가? 그래, 내가 계획했지. 성을 파괴하고 스므차를 죽인 뒤, 고대 지하 유적에 들어가서 스승의 억울한 죽음을 풀려고 했다. 스승이 그토록 원했던 고대의 지식도 내 것으로 만들고.”
말을 끝맺은 그는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쓸쓸히 몸을 돌렸다.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 스므차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이 꼴이 되다니. 아 칼라치여, 그대를 믿었건만!”
윌벤슨은 쇠사슬을 끌며 다시 구석진 곳으로 돌아갔고, 감옥은 적막감에 휩싸였다.
‘그의 표정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도현은 고민 깊은 얼굴로 복도 건너 윌벤슨의 방을 응시했다.
그의 과거사를 들어 보니, 그가 왜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투자해 성을 공격하려 했는지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고대인이 만든 놀라운 함정을 경험해 본 도현은 실제로 스므차의 말대로 윌벤슨의 스승이 안에서 사고를 겪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스므차의 말을 믿지 않는 윌벤슨의 오해이든 아니든, 분명한 사실은 윌벤슨의 스승이 스므차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는 거야. 윌벤슨의 감정이 좋을 리는 없겠지.’
도현은 일어서서 뒤로 걸어갔다.
두 다리에 연결된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며 그의 발목을 자극했다. 신발도 빼앗겨서 그는 맨발인 상태다.
동상을 피하려면 틈틈이 몸을 움직여 줘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죄수가 됐어.’
죄수복만 안 입었지 수갑과 족쇄가 채워진 그는 죄수가 되었다 것을 피부로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도현이 옆에 와서 앉자, 딘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건너편 윌벤슨의 귀를 의식하는 것 같았다.
“찝찝해.”
“뭐가 말입니까?”
“윌벤슨의 얘기를 듣고 보니 스므차가 한 달이라는 가벼운 벌을 준 게 이상하단 말이지.”
“스므차는 한 입으로 두말할 사람이 아니라면서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윌벤슨이 저러는 건 그만큼 의심이 가는 행동을 스므차가 30년 전에 해서 그러는 게 아니겠나.”
“맞네, 도현. 나도 영주님 말씀처럼 뭔가 꺼림칙해. 여기 감옥을 보게. 단순한 감옥일 거라고 생각했지, 마나를 봉쇄하는 고대의 마법진이 설치된 곳일 줄 그 누가 알았겠나?”
“전혀 예상을 못 했지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여기서는 스므차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우리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게 내 마음을 불안케 하는군.”
딘이 두 팔 사이에 출렁이는 쇠사슬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한 달이 어쩌면 1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리드만이 겁을 주듯 말하자, 딘이 인상을 잔뜩 썼다.
“만약 그렇다면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는 악랄한 수법에 걸렸군.”
“맞습니다, 영주님. 도현의 실력이 대단해 보이니까, 전쟁으로 기력이 다한 스므차가 어쩌면 싸움을 회피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일 수도 있습니다.”
“큰일이군!”
딘이 벌떡 일어나 좁은 감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에 대한 소문이 워낙 대단해서 그를 믿고 순순히 잡혀 준 것인데 말이야.”
“기회를 봐서 탈옥이라도 해야겠습니다.”
리드만도 일어나서 소리를 높였다.
“두 분 다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으십시오.”
도현의 차분한 시선에 딘이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내가 너무 앞서 갔나? 하하하!”
“신성력을 못 쓰게 만드는 마법진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시 흥분한 것 같군. 영주님의 머리 상처를 치료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안타까워서 말일세.”
딘과 리드만이 도현이 깔아 놓은 천 위에 앉았다.
“스므차와 윌벤슨 사이의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윌벤슨의 말만 듣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기도 하지.”
“섣불리 행동하기보다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벼운 행동으로 정말 스므차와 대적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고대 문헌에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걸 그의 입으로 듣게 될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리겠지요.”
“알겠네. 감옥에서 잘 지내보자고. 사실, 마나 없이 여길 탈옥할 수도 없는 거고.”
“걱정 마십시오. 정 위급할 때는 제가 두 분을 모시고 이곳을 빠져나갈 테니까요.”
도현의 눈이 어둠 속에서 별빛처럼 반짝였다.
“어떻게 말인가?”
도현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공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 말하면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또 긴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건 그때 가서 말씀드리죠.”
“대사제께서는 정녕 그들의 목적을 몰랐단 말씀입니까!”
디엘르의 호통에 대사제 휴고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디엘르 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리드만은 진짜 사제입니다. 그러니 제가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요. 그가 그런 불순한 의도로 성에 왔다고는 전혀 짐작도 못 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성주께서는 대사제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 감옥에요?”
휴고스는 미치광이 간수 빌이 장악하고 있는 지하 감옥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 해 전 사형수가 있어서 신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 주기 위해 방문했었는데, 그때 백발의 빌이 재소자를 고문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었다.
“디엘르 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성소의 제단을 등지고 서 있는 디엘르의 발밑에 휴고스가 엎드렸다.
“제 뒷머리를 보십시오. 그놈들에게 맞은 상처입니다. 제가 그놈들과 관련이 있다면 이렇게 심하게 맞았겠습니까?”
“음…….”
디엘르는 대사제의 뒷머리를 내려다봤다. 그의 말대로 심한 상처가 나 있었다.
“일어서세요.”
약간 부드러워진 그녀의 목소리에 대사제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나는 대사제님을 믿습니다.”
“역시 디엘르 님은 세상을 바로 보시는 지혜가 있습니다. 신의 축복입니다!”
울컥한 대사제가 감격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말했다.
며칠 전, 감옥에 갇힌 리드만과 그 일행의 소식을 듣고 그는 불안한 마음에 잠 한숨 못 잔 상태였다.
“지혜라니요. 가짜 사제들도 구분을 못 했는걸요.”
그녀의 자조 섞인 대답에 대사제가 양손을 펼치며 말했다.
“그 또한 디엘르 님의 지혜입니다.”
“지혜라고요? 어째서요?”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건 부성주님의 목숨을 구해 줬기 때문이 아닙니까?”
“바로 봤습니다. 그 이유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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