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디 임팩트 7권 19화
“아, 무료하군!”
좁은 감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던 딘은 도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현은 철창 사이에 두 발을 끼우고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물구나무 선 상태로 두 손가락만을 이용해 수백 번이 넘는 팔굽혀펴기를 하기도 했다.
손발을 쇠사슬이 구속하고 있었지만 그는 움직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놀랄 만한 체력 단련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러니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지.”
“영주님도 같이 하십시오. 감옥에서 뱃살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리드만이 말했다.
“내가 뱃살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나?”
아랫배를 만져 보던 딘은 복도를 타고 은은하게 들리는 먼 비명 소리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또 시작이군.”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비명 소리가 복도를 타고 지하 감옥 제일 깊숙한 곳까지 들려왔다.
공개 처형이 있는 날까지 간수장 빌이 온갖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킨 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윌벤슨, 거기 있소?”
“말해라.”
건너편 감방 안에서 윌벤슨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당신을 고문하지 않는 이유가 뭐 같습니까?”
“제일 맛있는 음식은 아껴 먹는 법이지.”
“빌이 당신을 고문하리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하지, 이번 전쟁으로 그의 과거 동료였던 스므차의 친위대들이 상당히 희생됐으니까. 아마 나에 대한 원한이 제일 깊을걸.”
윌벤슨은 말을 하며 마른기침을 심하게 했다.
“흠, 그럼 조만간 코앞에서 고문받는 비명 소리를 들어야겠군.”
“비명 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난 절대 비명을 지르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단단한 그의 결의가 느껴지는 말투에 딘은 자리에 앉으며 대꾸했다.
“그래 주면 고맙겠소. 듣는 우리들도 마음이 편치는 않으니까 말이오.”
대화가 끝나자 비명 소리와 도현이 운동을 하며 내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적막감을 깼다.
몸의 근육들을 부드럽게 풀어 주는 스트레칭으로 몇 시간 동안 지속된 체력 단련을 마친 도현은 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딘과 리드만 사이에 앉았다.
내공이 아무리 깊어도 몸이 받쳐 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속도와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감옥에서도 정말 열심히군. 죽여야 한다는 그 적수 때문인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시간을 소홀히 보낼 수가 없어서요.”
“영주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현에게 죽여야 하는 적수가 있다니요?”
리드만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아, 내가 말을 안 했나? 자네가 성안에 있을 때, 도현이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네. 아직 자신의 실력으로는 넘지 못할 적이 있어서 자신은 검을 수련하는 길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딘은 여관에서 도현과 나눴던 얘기를 해 줬다.
“그렇군요.”
리드만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현을 봤다.
“상대가 스므차 정도로 강한 사람인가?”
도현이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딘과 리드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설마 스므차보다 강한 사람인가?”
“스므차와 어떤 면으로 비교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제 느낌은 그렇습니다. 그는 적어도 스므차의 아래는 아닐 겁니다.”
도현의 대답에 그들은 마치 공동의 적을 대하는 표정으로 심각하게 걱정을 해 주었다.
“대륙에서 스므차보다 강한 사람이라면 몇 없을 텐데, 그럼 그들 중 한 명이 자네가 죽여야 할 적수라는 건가?”
“제 적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래?”
딘은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거물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니, 놀랍군. 혹시 이름이라도 알 수 있나?”
“태선군입니다.”
“태선군?”
딘과 리드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도현이 말한 것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 분명했다.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다.
“그와는 왜 악연을 맺었나?”
딘이 물었다.
“아버지께서 그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음, 힘들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길이겠군.”
딘과 리드만은 말이 없어졌다.
도현은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미안한 마음에 화제를 돌렸다.
“영주님, 일전에 칼라치가 스므차 성주와 싸울 때 몸에서 났던 보라색 광채 말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아, 그때 말이지. 기억하고말고.”
“혹시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는지 아십니까?”
소환술사가 만든 복원된 인간에 놀라 뒷전으로 밀려나서 그렇지, 도현은 칼라치의 변화도 인상 깊었다.
“아마도 엘바를 흡수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 거네. 그게 엘바의 특징이거든. 보라색 광채.”
“엘바요? 그게 뭡니까?”
“자네, 들어 본 적이 없나?”
“예.”
“웬만하면 다 아는 건데, 이상하군.”
딘은 궁금한 표정으로 그의 입을 주시하는 도현에게 엘바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엘바는 자연의 힘이 응축된 신비로운 물질이야. 여러 형태로 존재하는데, 그걸 복용해서 살아남으면 단숨에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되지. 마나도 순식간에 높아지고.”
도현은 만화책에서 봤던 여러 영약들을 떠올렸다.
‘이곳에도 그런 영약들이 존재하는 건가?’
흥미가 생긴 도현이 질문을 했다.
“살아남는다는 말은 어떤 뜻입니까? 먹고 죽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바로 그러네. 백이면 백! 먹고 다 죽지.”
“예? 그럼 너무 위험한 게 아닙니까.”
도현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맞네. 실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바를 죽음의 엘바라고 부르거나 그냥 ‘신이 던진 독약’이라고도 부르네. 하지만 운이 좋아 그걸 먹고도 살아남는 사람이 역사적으로도 간혹 나타나서 운을 믿고 도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칼라치가 그 운 좋은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는 거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하지만 행여나 자네 앞에 엘바가 나타나도 절대 복용하지 말게. 운은 운일 뿐, 역사적으로 엘바는 독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엘바는 어떻게 구할 수 있는 겁니까?”
“고대 지하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깊은 산속 바위가 깨지며 그 안에서 나오기도 한다네.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지. 워낙 희귀해서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게 엘바이기도 해.”
‘독특한 물질이군. 신기하기도 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먹어야 하다니.’
도현은 맞은편 감방을 응시했다. 칼라치는 그에게 패한 후 구역을 잃고 윌벤슨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는 나 때문에 구역을 잃고 눈도 잃었어. 나에 대한 원한이 엘바를 복용케 한 건 아닐까?’
도현은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영주님, 엘바만 설명하시면 어떡합니까? 다른 것도 설명 해 주셔야죠.”
“입 아파. 자네가 마저 하게.”
딘이 옆으로 누웠다.
“다른 게 또 있습니까?”
도현이 리드만을 보았다.
“불완전한 자연의 힘이 응축된 엘바와 달리, 순수한 자연의 힘이 응축된 게 있지. 바로 씨드라고 불리는 물질일세.”
“씨드요?”
“엘바와 달리 생명의 위험도 없고 복용한 사람의 능력을 끝없이 올려 주지. 엘바가 호수 같은 마나를 선사한다면, 씨드는 바다 같은 마나를 선사하지. 씨드를 복용해 그 힘을 제대로 흡수한다면, 평범한 마법사도 가공할 만한 마나의 양을 이용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지.”
듣는 것만으로도 씨드의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씨드는 전설처럼 존재만이 언급될 뿐 돈을 주고 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역사상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강자들은 거의 모두가 어떤 식으로 든 씨드와 인연을 맺었네.”
“그럼 스므차 성주도 혹시…….”
누워 있던 딘이 손바닥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리드만 대신 답했다.
“알 수 없지. 엘바는 보라색 광채로 그 복용 여부를 확인 할 수가 있지만, 씨드는 겉으로 표현이 되지 않거든. 하지만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던 스므차라면, 그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워.”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소리 없이 등장한 스므차가 뒷짐을 지고 복도에 서 있었다. 도현과 리드만이 가볍게 묵례를 했고, 누워 있던 딘은 벌떡 일어나 철창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주님.”
“나를?”
“예. 이곳에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습니다. 거기다 저기 맞은편에 윌벤슨은 성주님이 믿을 만한 분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스므차는 몸을 반쯤 비틀어서 뒤를 돌아봤다. 윌벤슨이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난 내 말을 지킨다.”
“하하하,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웃지 마. 감옥에서 즐겁게 지내라고 보낸 게 아니니까. 어쨌든 너희들은 도둑이야. 명심해.”
딘의 웃음기를 단번에 재워 버린 그는 옆에 서 있는 도현의 위아래를 가볍게 훑어본 뒤 윌벤슨이 있는 감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주님!”
지하 감옥에 들어오자마자 번개처럼 이동한 그를 허겁지겁 뒤쫓아 온 간수장 빌과 서너 명의 간수들이 스므차 앞에 머리를 깊게 숙였다.
“열게.”
“예!”
빌은 수하들을 시키지 않고 직접 열쇠로 윌벤슨의 감방 문을 열었다.
스므차가 들어오자 윌벤슨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하지만 빌이 휘두른 몽둥이를 얻어맞고 그는 안쪽 벽까지 밀려났다.
“이게 감히 어디서 성주님께!”
빌이 절뚝거리며 다가가 몽둥이로 몇 차례 더 윌벤슨을 두들겨 팼다.
“성주님, 명령만 주십시오! 이놈의 뼈를 추리겠습니다!”
“나가 있게.”
위엄 있는 스므차의 목소리에 눈을 희번덕거리며 윌벤슨의 허리를 발로 짓밟고 있던 빌이 공손히 뒤로 물러났다.
감방 안에 단둘이 되자 스므차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쓰러진 윌벤슨의 턱을 추켜세웠다.
“윌벤슨.”
“이놈, 스므차!”
“손목 하나로는 부족했던 건가, 왜 이런 참극을 일으켰나?”
“몰라서 묻느냐? 넌 내 스승을 죽였다, 네놈 욕심 때문에.”
“아니, 넌 스승을 핑계로 지하 유적의 물건을 탐낸 거야. 스승의 죽음은 네 탐욕을 가린 방패에 불과한 거다.”
“크크크.”
윌벤슨이 낮게 웃었다.
“네 죽은 스승은 내가 아끼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네 목숨 대신 손목 하나만 자른 것이고. 한데, 넌 내 아들의 손을 불구로 만들었어. 그것도 너를 좋아했던 나담을 말이야.”
스므차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윌벤슨의 턱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고통으로 윌벤슨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죽어서 네 스승에게 물어보아라. 과연 내가 네 말도 안 되는 망상 속 이유 때문에 그를 죽였는지.”
으드드득.
턱뼈 일부가 부서진 윌벤슨은 그 충격으로 기절을 했고 힘없이 고개가 처졌다.
툭.
손을 놓은 스므차는 천천히 일어나 감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빌.”
“예, 성주님.”
“오늘부터 저자에게는 물과 음식을 주지 말게.”
“알겠습니다!”
“이 문을 열게.”
스므차가 도현이 갇혀 있는 감옥을 가리켰다.
문이 열리자, 스므차는 도현에게 말했다.
“따라와, 할 말이 있으니까.”
해가 지며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현은 지하 감옥을 나와 숲 속으로 들어가는 성주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발에 채워진 족쇄로 인해 큰 보폭으로 걸을 수가 없었다. 신발도 없어서 눈과 흙이 그대로 발바닥에 밟혔다.
입김을 뿜으며 도현은 출렁이는 족쇄의 쇠사슬로 눈을 쓸듯이 걸었다.
‘무슨 이유로 날 부른 걸까?’
도현은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앞서 걸어가는 성주의 등을 응시했다.
‘이야기라면 이곳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도현은 굳이 대저택 뒤편에 있는 숲으로 자신을 데리고 들어가는 성주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살짝 긴장을 하던 그의 코로 향긋한 고기 냄새가 들어왔다.
불에 고기를 굽는 냄새다.
‘누가 여기서 고기를?’
잠시 뒤 도현은 숲에 있는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고기를 굽고 있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스므차의 친위대들 이었다.
그들은 사전에 지시받은 게 있는지, 도현과 성주가 도착하자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성주를 호위하던 친위대들도 같이 사라졌다.
고기가 구워지는 모닥불 주변에는 도현과 스므차 둘밖에 남지 않았다.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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