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디 임팩트 7권 20화
스므차는 모닥불 앞에 앉으며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영문을 몰라 잠시 서 있던 도현은 추위를 녹여 주는 모닥불 앞에 엉덩이를 댔다.
모닥불에 익어 가는 고기의 기름이 밑으로 뚝뚝 떨어지며 식욕을 자극하는 소리를 냈다.
“젊었을 때는 죽은 호드리오스와 이렇게 숲과 산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기를 함께 뜯었지.”
스므차는 친위대가 놓고 간 단검을 땅에서 뽑아 통째로 구워진 돼지의 고기를 잘라 냈다.
그걸 접시에 담은 그는 도현에게 건넸다.
“먹어.”
“고맙습니다.”
도현은 접시를 받긴 했지만 그 안에 담긴 고기엔 손을 대지 않았다.
다소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위엄 있게 행동하던 그가 손수 고기를 잘라 주자 그 친절함이 어색한 것이다.
“맛있군.”
고기를 맛본 스므차는 손짓을 했다.
“먹으라니까.”
“예.”
도현은 소금으로 간이 밴 고기를 입에 댔다. 잘 구워진 통구이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도현이 먹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스므차는 자신도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오늘 호드리오스의 장례식이 있었다. 불에 태울 시신들이 너무 많아서 한참이나 늦게 치른 셈이지.”
“그러셨군요.”
“50년을 함께한 사이다 보니 그의 죽음이 무덤덤하더군. 그 친구도 날 이해할 거야.”
고기를 썰며 스므차는 무심하게 말했다.
“더 먹지.”
그는 커다랗게 썬 고기 몇 점을 도현의 접시에 담아 줬다.
“하지만 그거 아나? 호드리오스는 칼라치란 녀석에게 그렇게 쉽게 당해서는 안 될 친구였어. 그런데 바보같이 내가 조금 늦게 나왔다고 죽어 있더군.”
스므차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호드리오스 얘기를 꺼내지 않고 묵묵히 고기를 씹었다.
“더 먹겠나?”
“아닙니다.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도현의 대답을 들은 스므차는 고기를 썰던 단검을 땅에 푹 꽂았다.
“혼돈의 마나 때문에 여길 왔다고 했나?”
도현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습니다.”
“폭주 현상을 해결하고 싶어서?”
“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뜻밖의 말에 도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너희들이 훔치려던 고대 문헌 중에 확실히 그 해결 방법이 적혀 있었다. 물로 인해 그 글은 알아볼 수 없게 돼 버렸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 방법을.”
스므차는 모닥불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준다면 나도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주겠다. 해 볼 텐가?”
도현은 경솔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스므차 정도 되는 인물이 거래를 하자고 제안을 할 정도면 분명,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들어 보고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스므차는 모닥불 너머 도현을 지그시 응시했다.
“지하에 있는 거대한 석상 구조물을 기억하겠지?”
“예.”
도현은 지하 광장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수십여 미터 크기의 거대한 인간 석상을 떠올렸다.
“그중 하나는 내부가 비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석상의 내부가 비어 있다는 사실에 도현은 살짝 놀랐다.
“그 내부엔 사악한 존재가 머물고 있다. 너희들이 할 일은 바로 그것을 없애는 것이다.”
“사악한 존재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몬스터입니까?”
“몬스터도 아니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람도 아니다. 혼돈의 마나에서 생성된 사악한 존재일 뿐이지.”
“예?”
혼돈의 마나에서 생겼다는 그의 말에 도현의 눈이 커졌다.
“들어가서 그것을 없애 주면, 너희가 원하는 혼돈의 마나의 폭주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하겠나?”
도현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알 수 없군요. 왜 직접 하시지 않고 저희를 보내시려고 하는 겁니까? 저희들이 할 수 있다면, 성주님도 충분히 가능하실 텐데요.”
“그건 너와 딘이 혼돈의 마나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이라고요?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스므차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려 어두운 숲을 응시했다.
“감옥에서 윌벤슨이 말을 해 줬다니 그자와 나 사이에 일은 들어서 알 것이다.”
“그렇습니다.”
“윌벤슨의 스승은 그 사악한 존재의 영향을 받고 미쳐서 날뛰며 나를 죽이려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내 손으로 죽여야만 했지.”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는 말을 이었다.
“나도 정신이 이상해지려고 해서 서둘러 석상 내부를 빠져 나왔다. 다행히 그놈은 석상 내부의 일정한 공간 밖으로는 나올 수가 없었지. 연구를 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말이야. 고대 문헌에 그 답이 나와 있더군.”
스므차는 몸을 돌려 다시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그놈은 혼돈의 마나에 들어 있는 어두운 부분이 실체화돼서 나타난 존재야. 난 그놈을 없애기 위해 수차례 시도를 했지만, 정신을 유지하며 그놈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 번번이 실패를 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달라. 고대 문헌에 따르면 혼돈의 마나를 소유한 사람은 적어도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 녀석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저희에게?”
“넌 내 검을 받아 낼 만큼 실력이 뛰어나다. 딘이라는 자도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고. 게다가 둘 다 혼돈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 그 사악한 존재를 없애 버리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췄지.”
스므차는 까맣게 타고 있는 고기를 모닥불 위에서 빼내 한쪽으로 던졌다.
뜨거운 고깃덩어리가 밑에 깔린 눈을 빠르게 녹여 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이 입을 뗐다.
“사악한 존재가 왜 석상 내부에 있는 겁니까?”
“그놈이 봉인되어 있는 수정이 있었는데, 윌벤슨의 스승이 잘못 건드려 그놈이 나타났지.”
“만약 저희들이 능력이 미치지 못해 그것을 없애지 못하고 돌아오면요. 그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도 폭주 해결 방법을 알려 주실 겁니까.”
“아니. 값진 보상은 결과가 좋을 때만 주어진다. 실패하면 아무것도 없다.”
“너무하시는군요.”
도현이 낮게 웃었다. 스므차는 혼돈의 마나 때문에 그 사악한 존재에 맞서 충분히 잘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말을 했지만, 정작 안에 들어가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감옥에서 잘 생각해 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스므차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현도 따라서 일어났다.
“성주님, 외람된 질문이지만, 윌벤슨은 석상 내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까?”
“그는 모른다.”
“설명을 해 주셨으면 윌벤슨이 지금과 같은 오해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주제넘게 나서지 마. 모든 일을 아랫사람에게 다 설명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스므차가 모닥불을 꺼 버렸다.
“난, 그 당시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을 모두 설명했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가 괜한 말을 꺼냈군요.”
도현은 앞서 걸어가는 스므차의 등을 보며 다시 맨발로 걸었다.
철렁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고, 흩어져 있던 친위대들이 다시 나타나 성주를 좌우로 호위했다.
무거운 갑옷을 벗고 평상복을 입은 친위대들은 하나같이 나이 먹은 노인들이었다.
‘기운이 많이 없어 보이는군.’
이번 전쟁으로 잃은 동료들의 빈자리를, 친위대들은 애석해하는 것 같았다.
스므차와 헤어져 다시 지하 감옥으로 돌아온 도현은 간수와 함께 복도를 걷다가 헬구스의 감방 안을 힐끔 살폈다.
고문을 받아 피투성이인 헬구스가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흐흐.”
도현과 눈이 마주친 그는 움직일 힘도 없는지 바닥에 얼굴을 대고 웃기만 했다.
헬구스가 있어서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도현은 그의 죽어 가는 얼굴을 오래 지켜볼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내 편에 가까웠던 구역장인데.’
도현은 착잡한 마음으로 자신의 감방으로 향했다.
간수가 문을 잠그고 멀어지자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딘과 리드만이 서둘러 도현에게 물었다.
“스므차가 무슨 말을 하던가?”
도현은 그들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스므차와 숲에서 나눴던 얘기를 해 줬다.
“석상에 그런 괴물이 있었다고?”
리드만이 깜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성주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속이는 것 같지는 않고?”
딘이 턱을 만지며 물었다.
“제가 보기에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해 볼 텐가?”
“스므차가 내민 제안이 너무 달콤합니다. 영주님과 리드만 사제님, 그리고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오로지 폭주의 해결책을 찾기 위함인데, 그걸 보상으로 걸고 있잖습니까.”
“칼자루를 저쪽이 쥐고 있긴 하지.”
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라도 해 보는 것이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도현의 대답에 딘과 리드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남부 대륙에서 출발해 긴 여행 끝에 다크캐슬까지 왔다.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좋아, 그럼 결정됐군. 스므차의 제안을 받아들이세. 나와 자네가 같이 들어가서 그 사악한 존재라는 걸 없애 버리는 거야.”
전쟁으로 많은 병사들이 죽었지만, 성내 주민들 중 일부가 병사로 보충돼 그 공백을 메웠다.
하지만 숙련된 병사들의 수준에는 아직 한참 미치지 못해서 성벽 위에서 아래를 감시하는 그 시선이 날카롭지는 못했다.
그래도 두 눈 크게 뜨고 다시는 성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성벽 경비를 열심히 서고 있었다.
성벽 경비병의 동선을 확인하며 움직이던 어베인과 짐브리오, 로나는 달이 구름에 가려져 순간적으로 어두워진 틈을 타 성벽 아래에 바짝 붙었다.
잠시 숨을 돌린 짐브리오는 대장간에서 훔쳐 온 갈고리를 빙빙 돌리다 휙 위로 집어 던졌다.
신기하게도 갈고리는 큰 소리 내지 않고 성벽에 딱 걸렸다.
갈고리가 제대로 걸렸는지 줄을 팽팽하게 당겨 본 짐브리오는 줄을 이용해 높은 성벽을 귀신같이 타고 올라갔다.
척.
눈 깜짝할 사이에 성벽 위에 오른 그는 좌우를 살피고는 갈고리에 매달린 줄을 크게 한 번 흔들었다.
신호를 받은 로나가 날렵한 솜씨로 올라왔고, 마지막으로 어베인이 성벽 위에 발을 디뎠다.
“저기 경비병이에요.”
로나의 손짓에 짐브리오와 어베인은 각기 성벽 이곳저곳에 몸을 숨겼다.
그들은 네 명의 순찰 경비병들이 횃불을 들고 지나치자, 다시 어둠 속에서 나왔다. 그러곤 성 외벽을 타고 넘어오는 데 도움을 준 갈고리를, 이번엔 성 내벽 쪽에 걸고 그 줄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성벽을 내려가는 계단이 있지만 그곳은 경비병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지키는 장소라 이용할 수가 없었다.
주르르륵.
줄을 잡은 짐브리오가 능숙한 몸놀림으로 미끄러지듯 성 안쪽의 벽을 타고 내려갔다.
20여 미터가 넘는 성벽을 줄 하나를 이용해 간단히 내려온 그의 뒤를 이어 어베인이 내려왔다.
벽에 달라붙어 주변을 살피던 그들은 위를 올려다봤다. 아직 성벽 위에 있는 로나가 갈고리를 밑으로 던져 버린 후 훌쩍 뛰어내렸다.
“저게 겁도 없이.”
신호도 없이 갑자기 뛰어내린 로나의 행동에 짐브리오가 당황하며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잡기 위해 양팔을 내밀었다.
공중에서 회전하며 우아하게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짐브리오가 아슬아슬하게 밑에서 받았다.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뒷걸음질 친 그는 찡그린 얼굴로 로나를 땅에 내려놨다.
“죽고 싶어?”
“경비병이 오고 있었다고요.”
혀를 내민 그녀는 갈고리와 줄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지.”
어베인이 뛰자, 그 뒤를 로나와 짐브리오가 재빨리 따라갔다.
긴 성벽을 따라 어둠 속을 달리던 그들은 신전이 보이자 몸을 더욱 낮추며 발소리를 죽였다.
“아니, 저 미친것들은 잠도 안 자고 왜 저러는 거야?”
한밤중에 사제들이 신전 주변에서 돌을 나르고 있었다.
“보면 몰라요? 보수를 하고 있잖아요.”
“낮에 하면 되지.”
“신앙심이 깊은 가 보죠.”
그들은 신전 뒤편의 사제관을 지나치다가 옆에 사람이 나타나자 얼른 몸을 숙였다.
“잠을 잘 시간을 쪼개서 신전에 와 봉사를 하다니, 일곱 신께서 정말 기뻐하시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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