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디 임팩트 7권 22화
그러나 도현이나 딘, 리드만 어느 누구도 열린 문으로 나오지 않았다.
“얼른 나오게.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니까.”
어베인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나갈 수 없습니다. 사정이 있어서요.”
도현은 자신을 빼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들어온 이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담아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지만, 스쳐 지나간 인연쯤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끝까지 생각하며 탈옥시키기 위해 왔다.
그들의 동료애가 가슴 깊게 전해져 왔다.
“너, 감옥에 있더니 미친 거야?”
짐브리오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안 나오면 강제로 끌어낸다. 너 구해 주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얼른 안 나와!”
덩치 큰 짐브리오가 눈을 부라렸다.
“어서 나와요. 시간이 없다구요.”
로나도 재촉을 했다.
“며칠 뒤에 공개 처형이 있다고 들었네. 알고 있는가?”
어베인이 물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때 죽을 건가?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리고 싶어?”
도현은 어베인 일행을 빠르게 둘러봤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공개 처형은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저는 그 사형 집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뭐라고?”
“한 달간 지하 감옥에 있으라는 선고를 받고 지금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도현의 대답에 어베인 일행은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자네, 전쟁 때문에 잡혀 있던 게 아니었나?”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어베인이 물었다.
“아닙니다. 다른 사정이 있어서요.”
“뭐야, 그럼 괜히 이 고생한 거네.”
짐브리오가 투덜댔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까, 같이 나가요. 감옥에서 고생할 이유가 없잖아요.”
로나가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지금은 나갈 수 없어요.”
“무슨 일인데요?”
“지금은 말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있어요. 미안해요”
도현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로나는 더 묻지 않았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우린 그냥 나가겠네.”
어베인은 길게 시간 끌지 않고 철창문을 다시 닫았다.
“노스리어에 ‘흰 뿔 사슴’이라는 이름을 가진 술집이 있더군. 감옥에서 나오면 그곳으로 오게. 우릴 만날 수 있을 거야.”
이번 전쟁으로 노스리어도 많이 불타고 파괴되었지만, 흰 뿔 사슴 술집은 비교적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 중 하나였었다.
“알겠습니다. 감옥에서 나가면 꼭 들르죠.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나가시는 길에 한 사람만 풀어 주십시오.”
도현은 헬구스가 갇혀 있는 감방 위치와 얼굴 생김새를 빠르게 설명했다.
“그 사람이 누군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을 주었던 구역장입니다. 그를 한 번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러질 못해 마음이 걸려서요.”
“흠, 그래? 알았어. 풀어 주지.”
짐브리오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어쩌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앞에 들어온 자들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서요. 그때는 그냥 나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오늘 절 위해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도현은 위험을 무릅쓰고 와 준 그들을 위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인사는 나중에 술집에서 하게.”
가볍게 웃은 어베인이 짐브리오와 로나를 데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훌륭한 동료들이군. 위험을 무릅쓰고 자넬 구하려 하다니 말이야.”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딘이 말했다.
“저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들이 여기에 와 있었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으니까요.”
도현은 그들이 무사히 성에서 빠져나가기를 기원했다.
“한데 도현, 용병을 하기 전에는 도둑이었나?”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도현은 여러 얘기 하지 않고 간단히 대꾸했다.
“그래서였군.”
“뭐가 말입니까?”
“지하 유적으로 가는 비밀 통로를 찾아낸 것 말일세. 과거 경험을 바탕 삼았던 거야.”
도현은 딘의 농담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영주님, 그렇게 놀리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도 모두 도둑입니다.”
리드만이 말했다.
“난 영주지 도둑이 아닐세.”
“그건 영주님 생각이시고요. 스므차 입장에서는 자신의 물건을 훔치려 한 도둑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도둑인 셈이지요.”
“리드만, 몇 대나 맞고 싶은가? 응?”
딘이 수갑이 채워진 주먹을 머리 위로 올렸다.
윌벤슨의 탈옥 사건이 벌어진 후, 지하 감옥의 분위기는 더욱 흉흉해졌다.
간수장 빌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에 벌어진 탈옥 사건이 마음에 걸려 스므차 성주에게 죄를 벌해 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스므차는 조용히 그를 물리며 없던 일로 했다.
수십여 명의 죄수들에 대한 공개 처형이 있기 하루 전, 빌은 절뚝거리며 죄수들을 방문했다. 마지막까지 고문을 가하며 탈옥을 막지 못한 분함을 해소한 것이다.
“도망간 윌벤슨과 헬구스를 원망해라, 이 망할 놈들아!”
가죽을 꼬아 만든 채찍으로 사정없이 죄수의 등을 후려친 그는 죄수가 기절을 하자 물을 붓고 다시 또 채찍질을 가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죄수를 괴롭힌 빌은 피에 절은 채찍을 둘둘 말아 손에 들고 감방을 나섰다.
“윌벤슨을 미리 손봤어야 했는데.”
빌은 탈옥을 한 윌벤슨을 제대로 고문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고 분했는지 이를 갈았다.
“간수장님.”
“뭔가?”
“끝 방에 있는 도둑들이 간수장님을 찾습니다.”
“나를?”
“예.”
빌은 도현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텅 빈 윌벤슨의 방이 보여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자연히 나오는 목소리가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냐?”
“성주님을 뵙게 해 주십시오.”
도현이 말했다.
“성주님을? 그분이 너희들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분이신 줄 아나? 정신 차려!”
빌이 채찍을 휘둘러 쇠창살을 때렸다. 채찍에 묻어 있던 피들이 파편이 되어 도현과 그 뒤의 딘, 리드만에게 튀었다.
도현은 얼굴에 튄 피를 닦아 내며 차분히 말했다.
“성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간수장님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하면 만나 주시겠다고요.”
“성주님이 네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렇습니다. 며칠 전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빌은 도현이 성주와 함께 밖에 나갔다 온 사실을 떠올렸다.
“성주님은 왜 만나려고 하는 거냐?”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빌은 지그시 도현을 노려보다가 채찍을 휘둘러 바닥을 찰싹 때렸다.
“친위대에게 말은 해 놓으마. 만약 성주님이 안 만나시겠다는 말을 하시면, 그땐 네 등가죽을 벗겨 버리겠다.”
도현이 빌을 통해 성주와의 만남을 청한 다음 날,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수십여 명의 죄수들이 길게 묶여서 단두대로 향했다.
성내가 아닌 도시 거주민이 사는 곳으로 이동된 그들은 거대한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한 명씩 목이 잘려 나갔다.
사람들 틈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에드와 토밀은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서 있는 부성주 나담을 응시했다.
“형, 저 사람이 성주님의 아들이야?”
“응, 아마 그럴 거야. 나도 처음 봐.”
“스승님보다 싸움을 잘할까?”
토밀은 도현에게 검을 배우지 않았지만 형의 스승이니까, 자신에게도 스승이 된다고 생각했다.
“아닐걸. 스승님이 더 강할 거야.”
“하지만 성주님의 아들이잖아.”
“그래도 스승님이 최고야. 알았어?”
에드는 못 박듯 얘기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수천 명이 넘게 모인 광장에서 한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스승님은 오늘 여기에 오시지 않은 걸까?’
혹시나 해서 도현을 찾아보고는 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형, 그런데 스승님은 어떻게 전쟁이 날 줄 아셨을까?”
“너 조용히 못 해!”
깜짝 놀란 에드는 동생의 입을 막고 급히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한적한 곳으로 갔다.
“아이, 숨 막혀!”
토밀이 고개를 흔들며 에드의 손에서 몸부림쳤다. 동생을 놔준 에드는 혼을 내듯 말했다.
“너 그런 말 하면 큰일 난다고 했지! 스승님이 마치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과 한패거리처럼 들리잖아.”
“그럴 수도 있잖아. 그래서 우리에게 그날 밤 집에서 나오지 말고 있으라고 하신 거고.”
야무진 동생의 대답에 에드가 크게 화를 내지도 못하고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거야 그냥 다른 일 때문에 집에 있으라고 하신 걸 수도 있어. 알았어? 그리고 저기 안 보여? 성 사람들이 전쟁에서 잡힌 사람들을 다 죽이고 있잖아. 스승님 얘기가 저들 귀에 들어가면 스승님이 얼마나 곤란하시겠어.”
에드는 손바닥으로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른스럽게 말했다.
“사실이야 어쨌든, 우리는 그분 편이 되어야 해. 그게 아버지를 구해 주시고, 형에게 검을 전수하신 스승님을 위한 바른길이니까. 알겠어?”
“응. 형, 나도 검 전수해 줄 거지?”
“안 돼.”
“왜!”
“넌 아직 어려. 스승님의 허락도 받지 못했고.”
“그냥 알려 줘, 나도 배우고 싶으니까!”
“안 돼. 나중에 스승님이 오시면 그때 정식으로 허락받고 알려 줄게.”
에드는 광장 주변을 살피며 도현이 있는지 계속 찾아다녔고, 토밀은 그런 에드를 쫓아가며 이런저런 일로 귀찮게 했다.
토밀이 발을 밟고 지나치자 광장에서 공개 처형을 구경하던 짐브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그마한 놈이 아주 아프게 밟고 지나가네.”
“그래서 아이에게 화를 낼 거예요?”
로나가 토밀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화는 무슨. 그만 가자고, 도현은 확실히 이번 공개 처형에서 제외된 사람 같으니까.”
혹시나 해서 겸사겸사해 온 그들은 노스리어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무슨 죄목으로 그곳에 갇힌 걸까요? 한 달이면 어떤 죄든 너무 짧은 기간인데.”
“모르지. 나중에 만나면 그때 물어보자고. 그나저나 털로 만든 귀마개가 아주 따뜻해, 흐흐흐.”
짐브리오는 손바닥만 한 큰 귀마개를 손으로 만지며 아주 좋아했다.
빌은 도현의 등가죽을 벗길 수가 없었다. 성주가 직접 지하 감옥을 찾아와 도둑들을 만나고, 그 자리에서 둘을 풀어 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수갑과 족쇄가 풀린 도현과 딘이 성주를 따라 나간 뒤, 빌은 홀로 감옥에 남은 리드만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 거냐?”
도둑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성주의 행동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큰일을 하러 갔습니다.”
“큰일?”
“거룩한 일이지요.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리드만은 도현과 딘이 사악한 존재에게 혹시 해나 당하지 않을까 근심을 하며 무사히 돌아오기를 신께 기도했다.
지하 감옥에서 나온 도현과 딘은 푹신한 침상과 좋은 음식이 있는 대저택에서 하루를 보내고, 갑옷과 무기도 제공받았다.
넓은 방 안에서 가죽 갑옷을 입고 두 자루 외날 검을 허리에 찬 도현은 옆을 봤다. 다소 무거워 보이는 화려한 은색 철판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손에는 강철 장갑을 낀 딘이 장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 괴물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어.”
딘이 현란한 움직임으로 검을 휘둘렀다. 무거운 철판 갑옷을 입고 있는데도 그의 움직임은 물이 흐르듯 부드러웠다.
“도현, 이 검술은 우리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비기네. 보고 배울 점이 있다면 가지고 가게.”
수십 가지의 동작을 연속해서 펼쳐 내던 그는 강철 장화로 바닥을 찍으며 밑에서 위로 검을 쳐올렸다.
장검이 박력 있게 허공을 가르며 올라갔다. 수십 가지의 검 동작이 마지막 검과 함께 마무리되며 주변을 휘감던 찬 기운들이 싹 사라졌다.
“별로지?”
검을 내리고 돌아선 딘이 물었다.
“아닙니다. 굉장했습니다.”
“그런가? 사실 비기라고 했지만 별다른 게 아닐세. 그저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처럼 검을 쉬지 않고 휘둘러 적의 빈틈에 꽂아 넣는 것이지. 자네가 나보다 검술이 위라는 걸 느끼고 있지만, 그래도 다양한 종류의 검술을 경험하는 게 자네에게 나쁘지는 않을 걸세.”
딘의 따뜻한 말에 도현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새겨듣겠습니다.”
“험, 쑥스럽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