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디 임팩트 7권 25화
“당신이나 죄수들 괴롭히지 말고 여생 조용히 보내시오.”
“뭐야!”
빌이 화를 참지 못하고 딘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번쩍.
도현이 언제 손을 썼는지 빌의 몽둥이가 손잡이만 남고 잘렸다.
한때 스므차의 친위대에 있었을 만큼 빌은 한가락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도현의 검이 흐릿하게 지나가는 것만 봤지 똑바로 보지 못했다.
도현을 노려보던 그는 손잡이만 남은 몽둥이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외쳤다.
“가서 늙은 도둑을 데리고 와!”
“그랬었군요.”
지하 감옥을 나와 성문으로 향하던 리드만은 딘과 도현으로부터 폭주를 해결하는 방법을 듣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걱정 마십시오, 영주님. 세상을 떠돌다 보면 이계의 수정을 어딘가에서는 발견할 수가 있겠지요.”
“리드만, 그럴 필요 없네. 긴 여행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세. 그동안 나 때문에 자네가 흘린 눈물과 땀은 내가 다 알아. 하지만 포기할 때가 오면 과감히 포기해야 하는 법이야.”
“영주님.”
“자,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은 나가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이나 마시세.”
딘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며 리드만의 등을 토닥였다.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며 그들이 영주와 사제의 관계가 아니라,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 좋군.’
도현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겪은 일이 많아서인지 이계에서 보낸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홍영 씨도 보고 싶고, 용주도 보고 싶고, 철호 형은 여전히 매를 맞으며 외공을 수련하는지도 궁금하네.’
도현은 왼팔을 내려다봤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집으로 가서 보고 싶은 얼굴들을 볼 수가 있었다.
“도현, 도현.”
“예?”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팔만 내려다보는 건가?”
딘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현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노스리어 상점가는 전쟁 당시 큰 피해를 봤다. 성벽 위에서 날아온 불화살에 불이 옮겨붙기도 했고, 전쟁의 혼란스러운 틈을 노린 약탈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물건을 훔치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중 몬스터 재료를 매입해 본토에 내다 파는 몬스터 재료 상점 주인 말론은 지난번 전쟁으로 손상되고 도둑맞은 물품들로 인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물품들을 어떻게 보충해서 보내지?”
겨울이 오기 전, 우스트랄 등가죽과 다른 몇 가지 재료들을 잔뜩 구입해서 손을 본 다음, 상하지 않게 나무 상자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었다. 사기로 한 상인이 있어서 미리 수량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점에 불이 나서 보관 중이던 몬스터 재료들이 손상됐고, 상당량은 약탈까지 당했다.
상인과 거래를 하기로 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데 어디서 몬스터 재료를 구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겨울이 아니라면 몬스터 사냥꾼들에게 웃돈을 주고 자신에게만 집중적으로 팔라고 해서 수량을 채울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직 겨울이다. 몬스터 사냥꾼들이 몸을 사리며 움직이지 않는 시기였다.
그는 불이 났던 상점을 보수하는 일꾼들을 보며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거닐었다.
스므차의 병사들을 믿고 위험해도 다크캐슬에 들어와 상점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처럼 또 전쟁이 터지면 그땐 포기하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큰돈이 되는데 말이야. 몬스터 재료들을 어디서 구하지……. 응? 저 사람은!’
말론은 자신의 가게에서 물건을 팔았던 도현을 알아보고는 즉시 달려갔다.
그는 도현에게 우스트랄 등가죽을 사기도 했고, 하피닉스라는 몬스터의 뿔을 사기도 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그 난리 속에서도 무사하셨군요.”
중년의 말론이 길을 막으며 알은체를 했다.
성에서 나와 일행과 함께 노스리어에 있는 여관으로 향하던 도현은 몬스터 재료 상점의 주인을 알아봤다.
“예, 안녕하세요.”
도현은 인사를 하며 그를 쳐다보다가 우연히 말론의 상점이 불에 탄 흔적을 발견했다. 일꾼들이 보수를 한창 하고 있지만 불에 그슬린 석벽은 그대로였다.
“피해를 당하셨나 보군요.”
“예, 좀 많이 봤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저어,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제게요?”
“잠시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시오, 우린 귀 막고 있을 테니.”
딘이 손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라서…….”
상점 주인이 난처해하자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딘과 리드만을 보며 말했다.
“영주님, 저기 보이는 여관에 가 계시면 제가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누군가, 이 사람은?”
“몬스터 재료 상점의 주인입니다.”
“흠, 그래?”
딘은 멀뚱히 서 있는 아랫배 나온 중년의 말론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가세, 리드만.”
딘과 리드만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말론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점으로 갈까요?”
“예, 이쪽으로.”
말론은 공손한 자세로 도현을 수리 중인 상점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왜 이렇게 저자세지? 내게 잘 보일 일이 뭐가 있다고?’
도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상점 안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 때문에 절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게 다름이 아니라 말이지요, 혹시 겨울에도 몬스터 사냥을 하시는지 해서요.”
“예? 몬스터 사냥요?”
도현은 탁자 너머 둥근 얼굴의 말론을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당분간 할 생각이 없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말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혹시 평소보다 비싼 가격으로 매입을 해 준다면, 겨울 사냥을 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도현은 말끝을 흐렸다. 이제 그는 성에서 볼일은 다 본 상태였다. 폭주 해결책도 알게 되었고.
이계의 수정은 어떻게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미 반쯤 폭주 해결책에 대한 마음을 접은 상태였다.
다만 극강의 경지에 오르면 해결된다는 말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더욱더 수련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눈 덮인 북쪽 몬스터 지역으로 들어가 검을 수련하고 몬스터를 잡아 내공을 쌓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몬스터를 잡아도 재료용이 아닌, 내공을 많이 올려 주는 그런 몬스터 위주로 사냥할 거라서 상점 주인에게는 확실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겨울 사냥 얘기를 꺼내는 겁니까? 겨울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물론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보십시오. 전쟁 통에 상점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불에 타고, 도둑이 훔쳐 가고.”
말론이 울상을 지으며 도현에게 머리를 숙였다.
“어렵겠지만 부탁 좀 드립니다. 정해진 기한 내에 보내 줄 물건들이 있는데,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내가 쌓아 온 신용은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본토로 돌아가도 전 더 이상 장사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음.”
도현은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을 했다.
사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한겨울에도 몬스터 재료를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만 내면 되니까.
다만 그걸 챙겨 놨다가 도시로 돌아와 그때그때마다 파는 게 번거로울 뿐.
‘작은 수고로움이 쌓이면 금화가 상자에 가득 쌓이겠지.’
그는 뼛속까지 무도인이지만, 그렇다하여 무소유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우선해야 할 일들과 중요한 일들이 매번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을 뿐.
그는 아직도 기억했다. 건물을 사려고 했을 때 돈이 없어 심적으로 힘들었던 그 순간들을.
‘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그가 이계에서 머무는 시간이 어느 순간 끝날지 모른다. 여건이 될 때 수련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돈을 모을 수 있다면 모으는 게 좋다.
“필요한 재료가 뭔지 들어 볼까요?”
도현의 말에 상점 주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한 번에 여러 장의 우스트랄 등가죽을 팔고, 그 잡기 어려운 하피닉스의 뿔까지 두 개나 구해 온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뒤에 여러 사냥꾼들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슬쩍 물어보니 혼자 사냥하는 눈치였다.
그가 판단하기에 도현은 진짜 실력 있는 몬스터 사냥꾼인 셈이다.
“고맙습니다! 아주 높은 가격으로 물건들을 매입해 드리죠!”
상점 주인은 즉시 급하게 필요한 것들과 그 수량들을 적어 도현에게 내밀었다.
종이를 한번 훑어본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은 못 하지만, 노력해 보죠.”
여관에 짐을 푼 그들은 술집으로 갔다. 모두 술을 좋아해 열 사람이 마실 술을 도현과 딘, 리드만이 짧은 시간에 몽땅 해치워 버렸다.
“자네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딘의 질문에 도현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여기서 한동안 머물려고 합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랑 함께 가세. 남부 대륙에 내가 빼앗긴 영지가 있는데, 가서 그놈들 다 쫓아내고 우리 함께 즐기면서 살자고. 미인이 아주 많아, 그곳에.”
딘이 엉큼한 시선을 보내며 눈짓을 하자 도현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저도 헤어지기 싫지만 아버지 복수를 위해 제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하아, 가슴이 아프군, 자네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까.”
딘이 아쉬운 눈빛으로 도현의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근데 난 이해가 안 돼. 왜 이곳인가? 우리랑 같이 남부 대륙에 가도 자네는 수련을 계속할 수 있는데.”
“아이 영주님, 도현이 아까 말을 했잖습니까, 그의 혼돈의 마나 수련법은 몬스터를 잡아서 그 기운의 일부를 빨아들이는 특이한 것이라고요.”
술에 취했는지 리드만이 혀가 꼬이는 말투로 딘에게 작게 말했다.
“어? 그랬었나?”
딘이 씩 웃으며 도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하네. 내가 술이 좀 과하게 들어갔나 봐.”
“괜찮습니다, 영주님.”
도현은 술을 비운 후, 취기 가득한 영주 딘과 리드만 사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가 없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거창한 술자리일 수도 있다.
그걸 알기에 도현은 이들과 좀 더 긴 술자리를 갖으며 마음속에 이들의 모습을 담아 두고 싶었다.
사진기라도 가지고 올 수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현은 감정이 뭉클해져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남모르게 훔쳤다.
“자네, 우나?”
“예? 하하하.”
도현은 급히 웃으며 손짓을 했다.
“울다니요. 제가 왜 웁니까?”
“그래? 나는 지금 눈물이 나는데.”
딘이 진지한 눈빛으로 도현을 응시했다.
“내 평생 여기 리드만을 제외하고는 깊은 정을 줘 본 적이 없네. 관심도 주지 않았고. 그런데 자네와 생사고락을 같이하다 보니 어느새 자네가 여기 리드만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들어와 있더군.”
딘은 술을 비우고 말을 이었다.
“리드만도 굉장히 아쉬워해. 신이 우리를 만나게 한 건 다 그 이유가 있어서라며 말이야.”
리드만은 말이 없었다. 늙은 그는 그저 술을 묵묵히 마실 뿐이었다.
“묻겠네. 우리와 함께 남부 대륙에 가서 세상을 즐겁게 살 생각은 없는가?”
“영주님.”
도현은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의 음성 속에 담긴 진심을 읽어서다.
“할 수 없지. 더 이상 말하면 자네를 너무 괴롭히는 일 같으니까 말이야. 자, 얼굴 펴고 즐겁게 다시 술을 마시세. 인생이란, 결국 이렇게 해도 헤어지고 저렇게 해도 헤어지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다 다시 만나는 법이지요.”
도현이 술잔을 올리며 대꾸했다.
“바로 그거네! 우리 다시 만나면 되는 거야, 하하하!”
그들은 술잔을 세게 부딪치며 새벽이 오도록 마지막까지 술집에서 자리를 지켰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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