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디 임팩트 8권 5화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어베인은 남은 술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아침 일찍 선착장으로 가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들 있어.”
“대장, 어디 가는 겁니까?”
“내 돈을 딴 녀석과 마지막으로 도박장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지.”
“그래요? 같이 갑시다. 내가 응원을 해 줄 테니까.”
그들이 나가자 집 안에는 도현과 로나 단둘만 남게 되었다.
촛불에 비친 로나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도현은 뭔가 얘깃거리를 찾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상하게 아무 얘기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내일 떠나면 정말 몬스터 지역에서 살 거예요?”
“그럴 겁니다.”
“잠을 잘 때 몬스터가 다가와 당신을 먹어 치울 수도 있어요.”
“조심해야죠.”
“마치 남의 얘기하듯 하네요?”
“사실, 북쪽 몬스터 지역에서 두 달 정도 생활한 적이 있어요.”
“그래요? 왜 말을 안 했어요?”
로나는 눈을 반짝이며 도현을 응시했다. 그녀는 도현의 얘기를 듣고 싶은 듯, 손으로 턱을 괬다.
“말해 봐요. 우리가 오기 전 다크캐슬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사막을 건널 때 이디언이라는 여마법사와 악연을 맺은 적이 있어요.”
도현은 인간 도살자라는 악명이 붙은 사건의 발단부터 그녀에게 담담히 얘기해 주었다. 몇 마디 말로 끝낼 수 있는 부분도 도현은 최대한 장황하게 설명을 하며 길고 길게 말을 풀어 갔다.
그녀가 자신의 얘기를 듣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도현은 내일 떠나는 그녀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나마 그녀의 마음을 받아 주지 못하는 자신의 미안함을 풀고자 했고,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나는 술병의 술을 모두 비우며 점점 몽롱해지는 시선으로 도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밤이 깊어 끝이 났고, 그때쯤 로나는 이미 술에 취해 잠이 든 상태였다.
긴 금발에 파묻혀 탁자에 기대 잠이 든 로나를 도현은 안아서 그녀의 침상에 눕혔다.
잠이 든 그녀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돌아선 도현이 방을 나가려 할 때 뒤에서 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있어요. 몬스터에게 죽지 말고.”
“…….”
대답 없이 서 있던 도현이 방문을 닫으며 작게 말했다.
“잘 자요.”
어베인과 짐브리오, 로나는 이른 아침에 떠났다.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떠났지만, 홀로 남은 도현은 왠지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딘과 리드만이 떠났고, 어베인 일행도 떠났다.
이제 그는 다시 혼자다.
텅 빈 집 안을 한동안 둘러보던 도현은 물을 끼얹어 벽난로의 불을 꺼트렸다.
감옥에 갇혀 있던 자신을 제일 걱정해 주었다는 로나가 선대와 달리 오래 살기를 기원하며, 그는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초대형 우스트랄을 잡기 위해 도현은 여러 우스트랄 숲을 확인해 가며 사냥을 했다.
하지만 초대형 우스트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쉬운 마음을 접어 두고 북쪽 깊숙이 들어가서 내공을 높이기 위한 몬스터 사냥에 집중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갖가지 몬스터들이 쏟아졌고, 그들을 잡으며 도현은 한 발 한 발 전진해 갔다.
그렇게 한 달가량을 보낸 도현은 더는 깊이 들어가지 않고 고민을 했다.
루드가 과거에 그려 준 몬스터 분포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지역으로 들어온 지 여러 날이었다.
내심 초대형 우스트랄 급의 몬스터와 조우하는 행운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인상적인 몬스터가 더는 등장하지 않았다.
도현은 산 정상에서 앞을 응시했다.
흐린 하늘 아래 보이는 정면은 여전히 눈 쌓인 숲과 들판, 산 들이 존재할 뿐이었다.
저 너머 미지의 땅엔 어쩌면 초대형 우스트랄보다 훨씬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담할 수 없었고, 그것을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타투의 에너지가 이미 상당히 소모됐을 거야.”
미국 시애틀에서 얻은 스톤은 네팔의 돌탑에서 발견한 것보다도 크기가 살짝 작았다.
조 박사 말대로 단순히 스톤의 크기에 따라 그 에너지가 결정된다면, 그에게 남은 시간은 이곳 시간으로 어림잡아 한 달에서 두 달 사이.
결코 시간이 많이 남은 게 아니었다.
이제는 그가 전부터 가 보려고 작정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가 온 것이다.
“쌍둥이 폭포로 간다.”
도현은 지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쌍둥이 폭포는 지하에 있는 산에서 떨어지는 두 개의 폭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초대형 우스트랄보다 강할 거라고 루드가 침을 튀기며 말을 한 슈빅타이런과 그 이상의 강한 녀석들이 우글거린다는 쌍둥이 폭포는, 자칫하면 도현조차도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나 많은 내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포기 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했다.
가방을 멘 도현이 동쪽 산등성을 타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듯 눈 덮인 산을 타고 내려간 도현은 평지가 나오자 신법을 발휘해 빠르게 달렸다.
남들이 걸어서 며칠은 걸릴 거리를 단 하루 만에 돌파한 도현은 대지를 가르며 깊게 갈라진 지형에 도착했다.
“이곳이군.”
마치 대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진 것처럼 틈이 벌어진 땅속은 매우 깊었다.
루드의 설명에 따르면 쌍둥이 폭포는 땅이 갈라진 곳으로 들어가서,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온다고 했다.
협곡처럼 갈라진 땅으로 내려갈 만한 길을 찾아 한동안 걷던 도현은 밑으로 내려갈 만한 길이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직접 암벽을 타고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도현이 경사가 90도에 가까운 수직 절벽을 타고 조심스럽게 100여 미터쯤 내려갔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새 떼가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난감한 상황에 더욱 빨리 밑으로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절벽에 매달려 있는 그는 굶주린 새 떼에게는 훌륭한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독수리보다 몸집이 큰 새들은 날카로운 부리로 도현의 머리를 쪼고 발톱으로는 도현의 다리 살점을 뜯어내려 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할 수 없지.”
한 손으로만 절벽에 매달린 도현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검을 뽑아 번개처럼 휘둘렀다.
검광이 번뜩이며 순식간에 여러 마리의 새들이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 행동이 새들의 화를 돋웠는지 허공으로 높게 날아오른 새들이 잠시 후 수십여 마리의 응원군을 데리고 와서는 도현을 향해 수직 하강하며 폭탄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늘을 새까맣게 만들며 덤비는 새들의 위세에 도현은 굳은 얼굴로 그들을 상대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직도 땅까지는 한참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아무리 그라 해도 몸이 성치 못할 것 같았다.
“크윽.”
절벽에 매달린 채 한 손으로만 싸우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그의 검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 지역으로 들어온 새들이 도현의 손등을 사정없이 부리로 쪼았다.
암석을 잡고 있는 손등의 살이 파이며 피가 솟구쳤다.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녀석들의 부리는 돌도 파헤칠 만큼 날카롭기 그지없어서 장갑은 있으나 마나였다.
“너무 그렇게 덤비지 말라고!”
이를 악문 도현은 몸을 지탱하는 손마저 순간적으로 놓으며 양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영악하게 도현의 검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덤비던 새들이 괴성을 지르며 죽어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 마리가 넘는 새들을 죽인 도현은 검을 회수해 허리에 차고는 떨어지는 몸의 균형을 잡으며 울퉁불퉁 튀어나온 암석에 손을 댔다.
단련된 손에 내공을 가득 주입해 충격을 줄였지만, 고통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잡았다!’
10여 미터 이상을 떨어지다가 간신히 암석을 잡은 도현은 손바닥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는 고통을 참으며 허공을 올려다봤다.
새들이 그의 공격에 놀랐는지 날갯짓을 하며 더는 덤비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대로 있으라고.”
도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른 동작으로 절벽을 타고 내려갔고, 얼마 뒤 갈라진 땅의 속살에 발을 디딜 수가 있었다.
도현이 땅으로 완전히 내려가자 새들은 포기했는지, 허공을 빙빙 돌다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후우, 위험했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공격을 받은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방 안에서 상처에 바르면 좋다는 갈색 약을 꺼낸 도현은 부상당한 손등에 발라 주고 천을 휘감았다.
호심공을 수련한 덕택에 상처들의 자연 회복력이 뛰어났지만, 있는 약을 쓰면 그 효과가 배가 됐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시키는 건 중요했다.
강한 고수도 자신의 몸 상태를 과신하며 돌보지 않는다면, 언제고 큰 화를 당할 수 있다.
강해질수록 기본적인 것부터 챙기는 게 필요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도현은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곳곳에 죽은 짐승의 뼈가 많이 보였다. 아마도 긴 세월 동안 한두 마리씩 빠져 죽은 게 쌓이다 보니 이렇게 많아진 것 같았다.
도현은 위를 올려다봤다.
좌우로 갈라진 땅의 틈도 점점 넓어져 이제는 그 폭이 대략 50미터는 넘어 보였고, 그 폭은 도현이 걷는 시간에 비례해 계속 넓어졌다.
“이쪽에 내려오는 길이 있었군.”
한참을 걷다 보니 그가 내려온 반대편 암벽 방향으로 돌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만든 길이 나왔다.
고대에 만들어진 길 같았다.
다크캐슬에서 쌍둥이 폭포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이 길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삭막한 느낌의 땅속 길은 눈과 바위만 존재할 뿐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 어느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느낌이 묘해. 마치 저승으로 가는 길 같다.’
해가 지고 피부를 얼리는 찬 바람이 불었고, 도현은 묵묵히 어둠 속을 뚫으며 쌍둥이 폭포로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가방 안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생생히 빛나며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빛나게 하는 걸까?’
과학적인 설명 따윈 필요 없었다. 그저 별이라는 것이 그에게 던져 주는 그 차갑고 무한한 아름다움이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위에서 내려올 수 있는 길이 또 있다.’
오른쪽 암벽 쪽에 가까이 붙어서 걷던 도현은 높은 암벽에 만들어진 또 다른 길을 어둠 속에서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발자국 같은데.’
달빛이 비치는 눈 위에 사람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흔적들이 그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눈 위에 생긴 발자국을 조사한 도현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턱을 매만졌다.
‘한두 사람이 아니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내려왔어.’
발자국이 오늘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 전에 생긴 것인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위험한 쌍둥이 폭포를 한겨울에 찾아온 사람들이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무엇 때문일까. 샤빌의 뿔 때문에 온 건가?’
마법사들이 비싸게 산다는 샤빌의 뿔은 쌍둥이 폭포에서 간혹 가다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돈을 보고 찾아오는 무리들이 계속 존재해 왔다.
“가는 길에 만날지도 모르지.”
얼마간 걷던 도현은 아래쪽으로 향한 경사로를 마주했다. 급경사는 아니었지만 눈이 쌓인 길이라서 쉽게 넘어질 수도 있다.
앞서 간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미끄러진 여러 흔적을 쫓으며 도현은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나 깊이 들어가는지 어둠은 점점 깊어지고 달빛은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간 도현은 경사로가 끝나고 다시 평탄한 길이 이어지자 잠시 휴식을 취하며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봤다.
지면으로부터 수천 미터는 내려온 듯, 암벽이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아 보였다.
“굉장하다. 땅이 이렇게 깊이 갈라져 있다니.”
지하 수천 미터 깊이로 생성된 협곡의 길은 담이 약한 사람은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할 만큼 답답함과 불안감을 심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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