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디 임팩트 8권 9화
시간을 지체하면 뒤에서 다가오는 용암에 몸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린다.
몇 차례 기침을 한 도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거목에서 내려와 산짐승들이 연이어 추락하고 있는 폭포로 달려갔다.
콰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이에 폭포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고, 도현은 발밑까지 다가온 불길을 피해 폭포 밑으로 뛰어내렸다.
수백 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도현은 아래로 추락하는 산짐승들의 몸을 발끝으로 차며 그 반동으로 조금씩 속도를 늦추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폭포 밑이다!’
수많은 산짐승들의 사체가 둥둥 떠다니는 폭포 아래에 도착한 도현이 큰 포말을 일으키며 물속 깊이 들어갔다.
첨벙.
다이빙 선수처럼 입수 전 두 손을 모으고 충격을 최소화한 도현은 그럼에도 머리와 어깨 부위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폭포 수심이 매우 깊다는 것이다.
폭포 바닥을 손으로 찍고 수면 위로 떠오른 도현은 위에서 떨어지는 산짐승들을 피해 물 밖으로 나왔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내쉰 그는 폭포수가 흐르는 물길을 따라 다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뒤 허벅지까지 오는 강이 보였고, 도현은 그 강을 건너 마침내 그가 찾던 출구에 도착했다.
그 출구는 다름 아닌 지하 협곡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일전에 그가 걸어왔던 길이기도 했다.
도현은 물에 젖은 속옷을 찢어 입과 코 주변을 가린 후, 뒤들 돌아봤다.
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폭포 주변까지 다 삼키고 그가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초목이 가득했던 거대한 지하의 산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
도현은 숲을 통과해 지하 협곡을 내달렸다.
흘러내린 용암은 도현이 지나쳐 간 숲이며 협곡을 태우고는 계속 전진해 가다가 서서히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간밤의 화산 폭발은 짧고 굵게 끝났지만 그 영향으로 한 겨울에도 꽃이 피고 나무들이 번성했던 지하의 산은 생명체가 더는 살지 못하는 죽음의 산으로 변했다. 화산재는 일부 지상으로 올라와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화산 폭발이 더 길게 이어졌다면, 화산재는 멀리 다크캐슬까지 도달해 도시를 화산재 아래 가둬 놨을지도 모른다.
화산 폭발 현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도현은 화산재를 피해 다크캐슬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가 지하의 산에서 몬스터를 잡고 수련하는 동안, 지상은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던 눈도 거의 다 녹고, 흙이 보이고 식물이 자랐다.
화산재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작은 강가에 도착한 도현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강물에 뛰어들었다.
귓구멍까지 차지한 화산재를 닦아 내고 온몸을 깨끗이 씻어 낸 도현은 뭍으로 나와 그제야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용암을 분출하다니.”
도현은 멀쩡하던 산이 폭발한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튿날 도현은 몬스터를 잡아 그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화산 폭발 현장에서 옷과 갑옷을 잃은 그는 구멍이 숭숭 난 바지를 가려 줄 뭔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도시에 이런 차림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
나중에 노스리어에서 새 옷을 사면 되지만, 그 전까지는 일단 아쉬운 대로 몬스터 가죽으로 민감한 부위가 보이는 곳을 가렸다.
치마처럼 밑으로 내려오는 가죽을 허리에 두른 그는 들판을 가로질러 이동하다 달려오는 열 필가량의 말을 발견했다.
‘저 사람들은?’
도현은 말 위에 탄 노인들이 눈에 익었다. 그들은 스므차의 친위대였다.
“누군가 했더니 자네로군.”
도현을 알아본 친위대 중 한 명이 점잖은 어투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도현의 정중한 인사에 말 위에 타고 있던 노인들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고대 지하 유적에 숨어든 도둑이었지만, 그들이 모시고 있는 스므차는 도현을 단순한 도둑으로 보지 않고 나름 대우를 해 주었다.
“옷차림이 괴이하군. 그거 몬스터 가죽이 아닌가?”
말 위에서 내린 노인이 도현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바지에 구멍이 나서요.”
“그렇군.”
노인은 도현의 머리카락과 수염에 불에 탄 흔적이 보이자 껄껄 웃었다.
“행색이 왜 그런가? 꼭 불난 집에서 뛰쳐나온 사람처럼.”
“그렇게 됐습니다.”
도현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겨울이 끝나서 몬스터들이 이제 활발히 활동할 시기네. 조심하게.”
“주의하지요.”
“또 보세.”
말에 올라 동료들과 다시 길을 떠나려던 노인이 말고삐를 잡으며 물었다.
“아, 잠깐만. 한데 자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인가?”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지하 협곡에서 오는 길입니다.”
“지하 협곡이라면…… 쌍둥이 폭포를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노인이 서둘러 말에서 내려 도현 앞에 섰다.
“얼마 전에 땅의 흔들림이 있었네. 성의 건물들이 흔들릴 정도였지. 산에서 관측을 해 보니 쌍둥이 폭포가 있는 지하 협곡 주변이 회색 먼지로 가득하다고 하더군.”
“회색 먼지는 화산재입니다.”
“화산재?”
노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하에 존재하던 산이 폭발을 일으켜 화산재를 만들고, 용암을 분출했습니다.”
“설마 했는데 역시 그런 거였군.”
“쌍둥이 폭포로 가시는 길이었습니까?”
“그렇다네. 우리들은 명을 받고 지금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사차 가고 있는 길이었네.”
노인은 말을 하면서 도현의 불에 탄 옷과 머리카락 등을 다시 살폈다.
조금 전은 웃으며 넘겼지만, 지금은 불에 그슬린 흔적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폭발 당시 산에 있었나 보군.”
“네.”
“그때 일을 들어 볼 수 있을까?”
도현은 친위대를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땅이 흔들리며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장한 폭발이 산 정상에서 일어났습니다. 화산재와 뜨거운 돌들이 산을 뒤덮고, 붉은 용암이 산을 점령하며 살아 있는 모든 걸 파괴했습니다. 산짐승과 그곳에 사는 몬스터들이 울부짖으며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산불이 도처에 나서 그것도 쉽지 않았지요.”
도현은 산 정상에서 처음부터 모든 걸 지켜봤지만, 곧이곧대로 말을 하면 그가 그런 아수라장에서 살아 나온 게 오히려 거짓말처럼 느껴질까 봐 산 아래쪽에서 잠을 자다가 지진과 함께 산 정상이 폭발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 설명이 대단히 세밀하고 역동적이어서 열 명가량의 친위대들은 그날 밤 화산 폭발 현장에 들어와 있는 듯 깊이 몰입되었다.
전쟁과 전투에 수없이 참여했던 늙은 친위대들이었지만 화산 폭발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도현의 설명이 신기하고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화산이 또 폭발할 것 같은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폭발했으니 더 이상 안전한 산이라고는 보기 어렵겠지요.”
“음, 고맙네, 설명해 줘서.”
고개를 끄덕이던 노인은 뭔가를 떠올리며 도현을 응시했다.
“쌍둥이 폭포에는 슈빅타이런이 살아서 굉장히 위험한 곳인데, 무슨 일로 간 건가? 샤빌의 뿔 때문에 간 것인가?”
“슈빅타이런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가 봤습니다.”
“농담을 하는군.”
낮게 웃으며 말에 올라탄 노인은 동료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네는 이 친구에게 들은 얘기를 곧장 성에 가서 보고하게. 우리들은 쌍둥이 폭포로 가겠네.”
“알겠네.”
지시를 받은 친위대 중 한 명이 말을 돌려 왔던 길로 빠르게 달려갔다.
“자네 행색만 보더라도 그날 밤 얼마나 험한 일을 겪었는지 대충 알 수 있겠군. 받게, 이건 내 선물이네.”
노인은 가방에서 천으로 된 바지 하나를 꺼내 도현에게 내밀었다.
“조금 작을지는 모르지만 거추장스러운 몬스터 가죽보다는 나을 거야.”
“감사합니다.”
도현은 기쁜 얼굴로 바지를 받았다.
“잘 가게.”
말 머리를 돌린 그들이 출발하려 할 때, 도현이 급히 물었다.
“지금 다크캐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성주님을 만나 뵙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성주님을?”
노인이 턱에 난 염소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동료들은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글쎄.”
“어렵겠습니까?”
“부성주님을 먼저 만나 보게.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또 보세.”
말을 아끼며 멀어져 가는 친위대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조금 전 얻은 바지로 갈아입었다.
허리에 두른 몬스터 가죽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접객실에 걸려 있는 스므차 성주의 초상화를 감상하고 있던 도현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부성주 나담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안녕하셨습니까, 부성주님.”
나담에게 인사를 하는 도현의 얼굴은 면도를 해서 아주 말끔했다. 다크캐슬에 도착해 새로 옷을 사고 여관에서 머리와 수염을 손봤다.
부성주를 만나는데 지저분한 행색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했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지난 석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몬스터 지역을 돌아다니며 길게 기른 수염이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그동안 잘 지냈나?”
붉은 카펫을 따라 걸어온 나담이 도현의 앞에 서서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예, 잘 지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네를 위해 성내에 집을 준비하라고 하셨네. 그래서 나는 자네가 성에 머물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내게 연락도 없이 그냥 성을 떠났더군.”
“죄송합니다.”
“어떤가, 지금이라도 내 친위대장이 되어 볼 생각은?”
“제안은 감사하지만 과분한…….”
“됐네. 그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나담은 손짓으로 도현의 말을 막은 후 접객실 창가에 있는 화려한 의자에 앉았다.
접객실에 있는 의자는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성의 주인 스므차를 위한 의자였지만, 지금은 그의 아들인 나담의 차지였다.
“지하의 산이 용암을 분출할 때 현장에 있었다고?”
나담은 의자에 앉자마자 곧장 쌍둥이 폭포에서의 일을 먼저 물었다.
“그렇습니다, 부성주님.”
도현은 스므차의 친위대에게 해 주었던 말을 비슷하게 반복했다.
“불길한 일이 벌어졌어. 지진과 화산이라니.”
부성주는 턱을 매만지며 한동안 생각에 빠져 있다가 천천히 도현을 응시했다.
“오늘 날 찾아온 이유는?”
“성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아버지를? 무엇 때문에?”
도현은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성주와 대결을 하고 싶어서 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바람일 뿐이다. 왕족 출신이자 현재 다크캐슬을 지배하는 스므차는 그와는 신분 차이가 났고, 싸워 줄 의무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말을 꺼내는 게 쉽지 않았다. 차라리 스므차가 앞에 있다면 검객으로서 당당히 검을 겨뤄 보고 싶다고 요구하겠지만, 눈앞에 인물은 그가 아닌 아들 나담이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말을 꺼내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왜 말을 못 하고 서 있나? 나를 무시하는 건가?”
“아닙니다, 부성주님.”
당황하는 도현을 향해 나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말해 보게. 난 도둑질하러 들어온 자네를 내 친위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한 사람일세. 물론,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말이야. 우리 어머니, 자네도 잘 알지? 그분은 사제라는 신분으로 위장한 자네를 여전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시거든. 아무튼 이곳에서 자네를 나만큼 아끼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야.”
넉넉한 미소를 짓는 나담에게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성주님을 뵙고 싶은 이유는 그분에게 검으로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뭐라고?”
놀란 나담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말뜻은 아버지와 싸우고 싶다는 거 아닌가?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해도 말이야. 그렇지?”
“결론은 그렇습니다. 성주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요.”
도현은 공손히 대답을 했다.
“미쳤군. 아버지가 어떤 분이라는 걸 잊은 건가?”
중년의 나담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도현을 지그시 응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