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디 임팩트 8권 10화
“자네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아직은 무리야. 그만 물러가게.”
“부탁드립니다, 부성주님. 말씀이라도 한번 전해 주십시오.”
도현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번거로운 절차 없이 성주를 찾아 대저택을 활보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주와 마주쳤을 때 실력을 겨루는 장이 되기보다는 적과 적으로서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성주님께서 응하시지 않는다면 그때는 깨끗이 물러나겠습니다, 부성주님. 그러니 말씀이라도 전해 주십시오.”
“답답한 친구로군.”
나담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에 뒷짐을 지고 섰다.
“자네가 혼돈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그러셨군요.”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네. 사악한 존재가 있던 석상의 비밀도. 말하기 부끄럽지만, 자네가 감옥에 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지하 유적에 발을 디뎌 봤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와 싸우겠다는 생각은 단념하게. 그분이 지하 유적에 침입한 자네를 살려 준 이유는 사악한 존재를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아서 일뿐. 이번에 자네가 도전해 왔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시면, 그때에는 단번에 자네를 없애 버릴 분이시네.”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단순한 고집인가, 아니면 정말 자신이 있는 건가?”
나담은 창가에서 돌아서서 도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진실되게 말해 보게. 어느 쪽인가?”
“도전을 할 충분한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좋아, 증명해 보게.”
나담은 차고 있던 검을 빼 허공에 던졌다. 검을 맡겨 두고 대저택으로 들어온 도현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나담의 검을 부드럽게 잡고서는 3층 창가에서 뛰어내렸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창가와 접해 있는 대저택 뒤편에 착지한 도현이 넓은 공터에 검을 꽂았다.
그 순간 공터가 폭발하며 땅이 뒤집어졌고, 그 속에서 도현이 만든 황금 검이 찬란하게 빛나며 전방의 숲을 향해 날아갔다.
“아버지의 황금 검!”
3층 창가에서 내려다보던 나담이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아버지로부터 검을 배우며 오래전 한 번 목격한 황금 검을 도현이 완벽히 재현해 보이고 있었다.
콰콰쾅쾅쾅.
황금 검은 열 그루가 넘는 나무들을 단번에 부순 뒤 사라졌다.
큰 소리에 병사들이 몰려오자 창가에서 나담이 외쳤다.
“별일 아니다. 물러나라!”
“유난히 긴 겨울이 갔어.”
도현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간 나담은 파릇파릇 올라오는 숲의 새싹들을 둘러봤다.
“자네 솜씨 잘 봤네. 큰소리칠 만한 솜씨였어.”
도현은 조용히 들고 있는 검을 내밀었다.
“성주님께 제가 만나고 싶다는 말씀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자네가 증명해 주었으니 나도 뭔가는 해야겠지.”
나담은 도현이 내미는 자신의 검을 받아서 허리에 찼다.
“감사합니다, 부성주님.”
“아버지께 자네가 도전했다는 사실을 전하겠네. 그게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버지는 이곳에 안 계시네. 벌써 오래전에 다크캐슬을 떠나 본토로 가셨어.”
“성주님이 말입니까?”
스므차가 없다는 말에 도현은 놀라면서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 돌아오십니까?”
“알 수 없네. 아버지께서 무슨 이유로 본토로 가셨는지 나도 정확히 모르니까.”
나담이 대답을 하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거짓말 같은가?”
“아닙니다. 다만, 들판에서 만난 친위대들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그들은 오직 성주님의 명만을 받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내 지시도 받네. 아버지께서 성을 비우며 친위대들을 내게 넘기셨거든. 자네가 만난 그들은 내 지시를 받고 지하 협곡을 조사하러 가던 길이였네.”
“그렇군요.”
친위대 노인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성주를 만나고 싶으면 먼저 부성주에게 가 보라고 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스므차는 어디를 간 것일까? 꼭 만나서 검을 한번 겨뤄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말게. 기다리다 보면 돌아오실 테니까.”
바위에서 일어난 나담이 도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한데 아버지에게 왜 도전을 하는 건가? 아버지를 이겨서 명예를 얻고 싶은 건가, 아니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해 보이려는 이유인가?”
“명예심 따윈 관심 없습니다. 그저 위대한 검객과 만나 제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싶은 마음뿐이니까요.”
“순수한 검사의 마음이라는 것인가?”
나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므차의 아들은 내가 아닌 자네가 더 어울리겠군. 자네라면 아버지의 기대를 충분히 뛰어넘는 강자가 될 테니까.”
“왜 그런 말씀을?”
“나는 외모만 아버지를 닮았을 뿐 타고난 자질이 부족하다네. 거기에다가 빌어먹을 손까지 이 모양이 되어서 날 더 애먹여.”
윌벤슨이 화상을 입힌 왼손을 들어 보이며 나담은 어딘지 뒤틀린 웃음을 흘렸다.
“윌벤슨을 감옥에서 그냥 죽였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 자는 배를 탈취해 이곳을 떠나 버렸어.”
눈에 살기를 띠며 나직하게 웃던 그는 도현을 돌아봤다.
“자네, 어디서 머물고 있나?”
“특별한 곳은 없습니다. 지금은 여관에 머물고 있지요.”
“아까도 언급했지만, 성내에 자네가 머물 거처를 진작 내가 마련해 두었네. 오늘부터 그곳에 머물게.”
“하지만 전.”
“내 말대로 하게. 자네를 내 곁에 붙들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편하게 지내라고. 그곳에서 머물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만나 보게. 자네 뜻대로 아버지가 도전을 받아 주실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야.”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타투의 에너지가 다될 것이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까지 여관이 아닌 성내의 집에서 머물며 스므차가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집으로 안내를 한 병사가 골목길로 사라지자 도현은 전면을 응시했다.
성내에 밀집된 주거지역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현의 거처는 아담한 2층짜리 집이었다. 이 석조 건물은 오래된 고대 건축물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지붕만 새것으로 바꾼 것이었다.
갈색 빛깔을 띤 뾰족한 나무 지붕을 올려다보던 도현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겉에서 보던 깔끔했던 모습과는 달리 안에는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다.
도현이 원래 살 집이었지만, 그가 석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오지 앉자 그 자리를 거미와 먼지가 차지한 것이다.
“청소 먼저 해야겠네.”
며칠이나 더 이쪽 세상에 머물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상태로 살 수는 없었다.
1층의 빈방과 주방을 거쳐 2층으로 올라간 도현은 값비싼 유리로 된 창문을 열어젖혔다.
깔끔하게 구역 정리가 된 많은 집들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길게 이어져 있었다.
지난번 전쟁으로 파괴된 성내의 건물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쪽 지역은 그것을 피해 간 것 같았다.
창문을 닫고 1층으로 내려온 그는 성 밖으로 나가서 노스리어 여관에 있는 짐을 싸들고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성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신분 징표가 있었기 때문에 성문을 경비하는 병사들로부터 도현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청소 도구를 사 가야 되겠지?”
집에 이런저런 식기류는 기본적으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아까 볼 때 청소 도구는 하나도 없었다.
성안의 시장에 들러 빗자루와 커다란 물통 등을 산 도현은 아직 익숙지 않은 자신의 집을 찾아서 골목을 몇 번 돈 다음 어두컴컴할 때 자신의 집 앞에 도착했다.
“어서 빨리 서둘러! 어두워졌잖아!”
“소리치지 말고 너나 빨리 움직이지그래?”
두 소녀가 티격태격하며 집을 청소하고 있었다.
“리샤.”
“어? 오셨어요?”
디엘르의 시녀였던 리샤가 두 무릎을 꿇고 바닥을 청소하다가 얼른 일어나 도현의 손에 든 짐을 받아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여기서?”
“부성주님의 지시를 받고 왔어요. 사제님을…… 아니, 주인님을 모시라고 해서요.”
“주인님?”
도현이 깜짝 놀라며 리샤와 그 뒤에 서 있는 주근깨 소녀를 바라봤다.
“인사드려. 내가 전에 말씀드린 분이셔.”
“안녕하세요, 주인님. 전 쿠린이라고 합니다. 특기는 음식을 만드는 겁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대저택 주방에서 잡일을 하며 열심히 요리를 배우다가…….”
옆에서 듣고 있던 리샤가 쿠린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쿠린은 웬만한 요리는 다 배워서 훌륭한 요리 실력을 갖추고 있어요. 주인님이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쿠린?”
“응? 어, 어 그렇지.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주인님.”
두 소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문 앞에서 말문이 막혀 있는 도현을 응시했다.
“내가 주인님이라고?”
“네!”
두 소녀가 동시에 크게 대답했다.
“착각한 거 아니야? 리샤 너는 디엘르 님의 시녀고, 그리고 옆에 쿠린이라고 했지? 너도 대저택에서 일하던 아이인데 어떻게 내가 주인이라는 거지? 부성주님이 날 잠시 도우라고 한 거겠지? 집이 엉망이라서 말이야. 그렇지?”
“아닌데요.”
리샤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라고?”
“저는 디엘르 님의 시녀였지만 얼마 전부터는 부성주님의 침소를 정리하는 시녀가 됐어요. 그러다가 오늘 주인님에게 가라는 부성주님의 지시를 받았죠. 옆에 있는 이 애도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앞으로 주인님이 사시는 데 힘드시지 않게 집 청소와 빨래를 하고 음식을 만들 거예요. 물론 음식은 쿠린이 만들겠지만요. 그러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리샤와 쿠린이 앞에 손을 모으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얼마 동안 내가 너희들 주인이라는 거지?”
“평생요.”
“뭐라고?”
당황한 도현은 물걸레와 빗자루를 들고 서 있는 리샤와 쿠린을 둘러봤다.
부성주가 무슨 속셈으로 사람을 보내 줬는지 모르겠지만 그 자체로 부담이 되었다.
“고맙지만 이럴 필요 없단다. 내가 부성주님을 만나서 얘기할 테니까, 너희들은 대저택으로 돌아가.”
도현의 말에 두 소녀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저희를 보내시려고요?”
“주인님, 열심히 일할게요.”
“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람이야. 언제 훌쩍 떠날지도 모르고. 너희들을 보살펴 줄 수가 없다고. 대저택이 너희에게는 더 나을 수 있어.”
“저희를 보살펴 주실 필요 없어요. 주인님이 떠나시면 그땐 저희를…… 자유롭게 보내 주시면 되니까요.”
리샤가 도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사제님이, 아니 주인님이 일전에 제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요. 전 지금 그러고 있는 거예요.”
도현은 소매를 걷어붙인 리샤의 팔을 내려다봤다. 리드만이 치료를 훌륭하게 해 줬지만 긴 흉터는 남아 있었다. 디엘르가 리드만의 치료의 힘을 시험한다며 죄 없는 리샤의 팔에 상처를 냈던 흔적이었다.
“대저택은 숨이 막히는 공간이에요. 디엘르 님은 일곱 신께 기도 응답을 받았다며 며칠 전에도 시녀 한 명을 거꾸로 매달아 매질을 하고 죽이기까지 했어요.”
“음…….”
도현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주인님, 이제 저희는 대저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부성주님이 저희를 주인님께 보냈으니까요. 제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곳으로 저희를 보내지 말아 주세요.”
두 소녀가 도현의 발밑에 엎드려 애원을 했다.
한동안 말없이 두 소녀를 내려다보던 도현은 한쪽 무릎을 꿇고 눈물로 범벅이 된 리샤와 쿠린을 일으켜 세웠다.
“그만 울어, 대저택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테니까.”
“정말요!”
“고맙습니다,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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