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디 임팩트 8권 11화
두 소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집을 청소하기 바빴다.
“주인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청소가 끝나는 대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야 쿠린, 청소는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너는 빨리 음식을 준비해.”
“응? 어, 그래야겠다.”
주근깨 가득한 귀여운 쿠린은 허둥대며 주방으로 뛰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큰일 났어!”
“왜 그래?”
“요리할 수 있는 재료가 하나도 없어. 사 와야 돼.”
“아, 그렇지.”
리샤와 쿠린은 도현을 동시에 쳐다봤다.
“주인님, 돈이 필요합니다.”
“돈…… 줘야지, 돈.”
도현은 아직도 두 소녀의 주인이 됐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금화를 꺼내 리샤 손에 쥐여 줬다.
‘그냥 ‘오늘부터 너희들은 자유다.’라고 말하고 풀어 줄까?’
하지만 갈 곳 없어 보이는 10대 중반의 소녀들이었다.
도현은 꺄르르 웃으며 자유롭게 시장을 향해 달려가는 리샤와 쿠린의 뒷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저택을 나온 게 기쁘긴 기쁜가 보군.”
쿠린이 준비한 저녁은 한밤중이 돼서야 맛을 볼 수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쿠린이 긴장한 얼굴로 식탁에 앉은 도현의 눈치를 봤다.
촛불이 켜진 식탁 위에는 음식이 담긴 여러 접시가 놓여 있었다.
방금 전 조리가 끝난 것들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수프와 양념이 곁들여진 소고기가 그윽한 냄새를 풍겼다.
도현이 준 금화를 아끼지 않고 시장에서 최고급 재료만을 사 온 쿠린이 대저택 요리실에서 배운 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한 것이다.
“너희들도 이리 와서 앉아. 같이 먹자.”
도현의 말에 곁에서 시중을 들려고 서 있던 리샤와 음식을 준비한 쿠린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희는 나중에 먹어도 됩니다.”
“앉으래도.”
도현이 거듭 말했지만 그녀들은 눈치만 봤고, 도현은 벌떡 일어나 리샤와 쿠린을 공깃돌처럼 가볍게 들어서 의자에 일일이 앉혔다.
“여기는 대저택도 아니고 우리들밖에 없다. 편하게 행동해.”
“하지만 저희들은.”
“나와 같이 있으려면 내가 불편해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지?”
리샤와 쿠린의 말을 막은 도현은 주방에 있는 접시들과 남은 음식들을 몽땅 가지고 와서 그녀들 앞에 내려놨다.
“앞으로 같이 먹는 거다. 알았지?”
도현이 진심으로 말한다는 것을 깨달은 리샤와 쿠린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디 보자, 쿠린의 요리 솜씨가 어떤지 볼까?”
도현은 그녀들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이어서 표정 변화 없이 그는 스테이크처럼 구워진 소고기를 입에 넣고 잠시 맛을 음미하다가 이름도 알 수 없는 야채와 달짝지근한 콩 조림도 입에 넣었다.
말없이 음식을 먹는 그의 행동에 쿠린과 리샤는 긴장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할 뿐 꼼짝할 수 없었다.
“음, 맛있는데.”
도현이 웃자 그제야 쿠린과 리샤가 긴장을 풀었다.
“정말 맛있다. 훌륭해. 어서 먹어. 너희들도 배고플 테니까.”
“감사합니다, 주인님.”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먹던 리샤와 쿠린이 어느 순간부터는 편안하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둘 다 여기서 태어났니?”
도현이 식탁 위의 술을 따르며 물었다.
“성은 아니고 성 밖에서 태어났어요.”
“성 밖이라면?”
“저희 부모님들은 도망자 출신들이세요.”
리샤가 조용히 대꾸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지금 부모님은?”
“저희 둘 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굶어 죽어 가던 저희들을 구역장이 성안의 상인에게 팔았고요. 그러다 다시 대저택으로 들어갔죠.”
리샤는 쿠린보다는 말을 조금 더 편안하게 했다. 아무래도 도현과 대저택에서 만난 인연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쿠린과 전 그때부터 알던 사이예요.”
“우린 자매와 같아요.”
쿠린이 수줍게 웃었다.
“내가 보기에도 둘은 서로가 힘이 되어 주는 존재 같다.”
도현은 술을 한 모금 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리샤와 쿠린도 음식을 먹다 말고 따라서 일어났다.
“신경 쓰지 말고 저녁 마저 먹어. 괜찮으니까.”
두 소녀를 주방에 남겨 놓은 도현은 1층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쿠린이 저녁을 만드는 동안 리샤는 그가 방으로 사용할 공간을 깨끗이 청소하고 침대까지 정리해 놨다.
“이렇게 가는 건가?”
도현은 타투를 내려다봤다.
황금색 타투가 점점 희미해져 갔고, 그럴수록 팔에 통증이 심해져 왔다.
스므차를 기다리며 며칠이라도 이 집에서 머물 생각이었던 도현은 아쉬움 속에 방을 조용히 나와 주방 쪽을 응시했다.
리샤와 쿠린이 밝은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잘 있어, 얘들아.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현은 타투에 손가락을 댔다.
‘이 세계는 내가 오기 전부터 존재하던 세상.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건너오면서부터 이곳의 시간은 나의 움직임에 따라 멈추고 다시 움직이곤 한다. 내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곳은 시간이 멈춘 공간이 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곳의 시간은 그의 존재 유무와는 관계없이 다시금 흘러갈지도.
찌이이이잉.
게이트가 열렸고, 도현은 리샤와 쿠린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군고구마
지하 도장 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관장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1시를 넘어 가고 있었다.
가죽 갑옷과 칼을 풀어 철제 캐비닛에 넣은 도현은 샤워를 한 후, 5층 도장으로 올라갔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5층 도장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안에 들어가서 잠시 도장 안을 둘러보던 도현은 관원 명부가 적혀 있는 출석부를 펼쳐 봤다.
이호선, 김유진, 호태식, 세 명의 관원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입가에 작게 미소를 지은 도현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이계에서 여러 달을 보내고 왔지만 이곳의 시간은 겨우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3월을 코앞에 둔 2월 말의 날씨는 여전히 코가 시릴 만큼 추웠다.
‘모두들 잘 있었겠지?’
도현은 보고 싶은 얼굴들을 한 명씩 떠올리며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빌라는 주민들이 신경을 써도 특유의 낡은 느낌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아버지와 함께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홍영과 함께 산다.
주머니에 열쇠가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초인종을 눌렀다. 홍영이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아침까지 그녀가 깨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보고 싶은 걸 몇 달을 참았다. 문을 열어 달라는 핑계로 그녀 얼굴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그러나 초인종을 누르고 그는 곧장 후회했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몇 시간만 기다리면 될 텐데.’
도현은 자책하며 열쇠로 문을 열려다 움찔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도현 씨.”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내려트린 홍영이 놀란 눈으로 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지냈어요? 미안해요. 잠자는데 깨워서. 내가 실수로…….”
도현은 잠을 자다 일어난 듯한 그녀 모습에 미안한 얼굴로 더듬거리다가 뒤로 휘청거렸다.
홍영이 성난 파도처럼 달려들어 그의 품에 안긴 것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요 며칠 정말 걱정이 됐거든요.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악몽을 꿔서.”
“홍영 씨.”
도현은 품에 안긴 그녀의 등을 말없이 어루만져 주었다. 가슴을 통해 그녀의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게 느껴졌다.
길고 긴 포옹을 끝낸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미소를 짓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아니면 라면이라도.”
주방으로 간 홍영이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이계에서 오래 있다 온 도현이 한국 음식에 갈증이 났을 건 당연해서 그녀는 새벽이지만 도현이 원하면 바로 음식을 해 줄 생각이었다.
“괜찮아요.”
“괜찮긴요. 얼굴에 살이 하나도 안 보여요. 어서 한 가지 말해요. 아니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홍영이 냉장고 문을 연 채 흘겨보자 도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된장찌개 부탁할까요?”
“조금만 기다려요. 아주 맛있게 해서 줄게요.”
도현이 무사히 이계에서 돌아온 사실에 그녀는 기뻐하며 빠르게 된장찌개를 만들어 갔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그녀의 뒷모습에 도현은 이계에서 끝까지 풀지 않았던 마지막 긴장의 끈을 툭 놓아 버렸다.
주방 식탁에 된장찌개와 몇 가지 반찬을 준비한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도현이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고 만 것이다.
방에서 이불을 가지고 온 그녀는 도현의 몸을 덮어 준 뒤, 그 앞에 앉아 도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고 말았다.
자세는 불편했지만 잠이 든 그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도장으로 출근하던 용주는 길가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을 발견했다.
“아저씨, 아침에 이게 팔려요? 다들 출근하기 바쁜데요. 저녁에 군고구마 냄새를 솔솔 피우며 장사를 시작하셔야죠.”
“허리를 다쳐서 겨우내 누워 있다가 푼돈이나 벌어 보려고 나온 거요. 아침이든 저녁이든 조금이라도 더 팔려면 어쩔 수 없지 않소.”
몸이 불편해 보이는 나이 많은 아저씨를 빤히 바라보던 용주는 혀를 찼다.
“겨울 다 가는데 큰일이네. 봄이 늦게 왔으면 좋겠어요. 그렇죠?”
“뭐, 그거야 하늘이 알아서 하겠지. 솔직히 군고구마로 떼돈 벌려고 하는 욕심도 없고. 그런데 살 거요 말 거요?”
말을 길게 시키는 용주에게 50대 군고구마 장수가 물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어서 별생각이 없네요. 많이 파세요.”
용주가 넙죽 인사를 하고 지나치자 군고구마 장수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사 주지도 않을 거면서 말은 많아 가지고.”
불쾌한 표정으로 고구마를 뒤적거리던 군고구마 장수는 옆을 힐끔 살폈다.
조금 전 말을 걸었던 용주가 서 있었다.
“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다시 온 거요?”
“많이 사면 싸게 줍니까?”
“사시려고?”
군고구마 장수가 친절한 미소를 보냈다.
겨울 코트를 입은 용주가 지갑에서 3만 원을 꺼냈다.
“맛있는 놈으로 골라 주세요.”
용주는 양손에 군고구마 봉지를 여러 개 들고 지하 도장으로 들어갔다.
“홍영 씨, 군고구마 먹어요. 따끈따끈한 게 맛이 아주 좋아요!”
문을 열고 들어가며 외치던 용주는 검정 도복을 입은 도현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야, 백도현!”
“군고구마가 그렇게 맛있어?”
“그래 자식아, 한번 맛봐라.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쏙 나올 테니까.”
가까이 다가온 용주는 봉지 안에서 군고구마를 꺼내 내밀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게 방금 불에서 꺼낸 것이었다.
“맛있네.”
조금 맛을 본 도현은 용주의 위아래를 살폈다. 한 달 전과 비교해서 눈빛이 표가 나도록 깊어졌고, 몸은 가벼워 보였다.
“홍영 씨에게 들었다. 이제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네 도움이 컸지 뭐. 일부는 철호 형 때문이기도 하고.”
호심공을 통해 축기를 이룬 용주는 단전에 미미하게 쌓인 내공을 사용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도현이 이계로 넘어가기 전에, 험벨을 사냥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내공 활용법을 전수해 주었지만, 깨닫는 건 용주의 몫이었다. 그런데 용주가 도현도 곁에 없는 상황에서 내공 활용법을 최근에 깨달은 것이다.
“홍영 씨, 이리 와서 맛 좀 봐요.”
용주는 관장실에서 나온 홍영에게 여러 봉지의 군고구마를 다 넘겨주었다.
“왜 이렇게 많이 샀어요?”
“그냥요.”
“잘 먹을게요.”
홍영은 빙그레 웃으며 관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용주는 도현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내공, 그거 정말 무섭더라. 사람을 아주 초인으로 만들어 주던데. 미약한 내공만으로도 평상시 내가 낼 수 없는 속도와 파워를 만들어 냈어. 내공을 발휘해 펼치는 호검술도 놀라웠고.”
멀리는 태선군의 힘을 경험했고, 가까이는 도현이 펼치는 내공의 능력을 목격하면서 내공이란 게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그 힘의 일부를 경험해 보니 그 느낌이 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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