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188화 (188/575)

[188] 디 임팩트 8권 13화

김성국은 회의실 한쪽에 앉아 있는 김탁훈을 힐끔 쳐다봤다. 아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지만, 상대방이 콕 집어서 얘기하는데 또 핑계를 대며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시죠.”

그날 저녁 김탁훈은 섭상이 보낸 차를 타고 그의 대저택을 방문했다.

차는 긴 정원을 지나 유럽식으로 지어진 3층짜리 건물 입구에 섰다.

곱고 아름다운 여인들의 영접을 받으며 그는 붉은 천이 깔린 복도를 지나 화려하기 그지없는 방으로 안내됐다.

“앞으로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소.”

“별말씀을요.”

상해 지사장 시절 중국어를 틈틈이 배워 뒀던 김탁훈은 유창하지는 않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중국어를 할 줄 알았다.

섭상과 같이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 그는 섭상이 건네는 독한 술을 여러 잔 마셨고, 취기에 몸을 바로 세우기 어려웠다.

“술이 너무 독했나 보군.”

섭상은 흔들리는 김탁훈의 몸을 바로 세워 주며 시중을 들던 꽃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김탁훈을 맡겼다.

“사형, 저자에게 과분할 정도로 잘해 주시는군요.”

주성하가 김탁훈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자가 아니었으면 김성국은 절대 제주도 땅을 팔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 별장을 짓고 노후를 보내겠다고 공공연하게 소문을 냈던 인물이니까.”

제주도에 큰 투자를 하고 있는 섭상은 김성국에 대해 나름 조사를 해 놓았었다.

“아들이 나선 일이 실패하지 않게 그가 제주도 땅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는 말씀이군요.”

“후계자라는 건 그런 것이다. 아끼는 후계자를 위해서는 양보를 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 김성국은 몸소 그것을 실천한 것이다. 아들이자 후계자를 위해서.”

어깨가 딱 벌어지고 두 다리가 매우 긴 섭상은 중후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둘째 사형, 하면 우리 사부님께서는 언제쯤 우리 제자들을 위해서 희생을 하실까요?”

주성하의 물음에 섭상이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주성하에게 집어 던졌다.

가슴이 움푹 들어간 주성하가 저만치 날아가 벽에 몸을 부딪쳤다.

“넌 다 좋은데 그 가벼운 입이 문제야.”

“죄송합니다, 사형.”

주성하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돌아와 쓰러진 의자를 세우고 그 위에 앉았다.

“성하야.”

섭상이 다정스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주성하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예, 사형.”

“네 위로 몇 명의 사형과 사저 들이 있느냐?”

“사형을 포함해 모두 아홉입니다.”

“너는 젊다. 사부님이 희생을 하신다 하여 네게 문주의 자리가 돌아갈 성싶으냐?”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비수 같은 차가움이 담겨 있었다.

“감히 저는 문주 자리를 넘보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저는 둘째 사형이 사부의 뒤를 이어 문주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랄뿐이지요.”

“속일 필요 없다. 사내가 야망을 품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다만, 주제 파악은 해야겠지. 오래 살고 싶으면 말이야.”

섭상이 주성하에게 술을 따라 줬다.

“대사형의 소지품은 다 조사해 봤느냐?”

술을 마신 주성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원신공과 관련된 건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등은?”

“같이 목욕을 하며 등을 살폈지만, 오원신공을 익혔을 시에 만들어진다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아주 깨끗했습니다.”

“흠, 나의 기우였나?”

석연찮은 얼굴로 섭상은 술잔을 비웠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사형.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한 가지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주성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섭상의 말을 기다렸다.

“김탁훈이 조금 전 술에 취해 이상한 말을 떠들어 댔다.”

“이상한 말요?”

“혼내 주고 싶은 자가 있는데, 싸움을 잘해서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고 하더군. 내일 그가 깨어나면 무슨 일인지 들어 보고, 조용히 그를 도와줘.”

“예? 제가 말입니까?”

주성하는 입이 나왔다. 그는 당당한 검선문의 제자였다. 일반인들 싸움에 끼어들어 주먹이나 칼을 휘두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일반인과 싸우는 것 자체가 자신의 격을 떨어트리는 일로 여기고 있었다.

“그자가 어떤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굳이 사형께서 관심을 두실 필요가…….”

“한국에 기반이 약해. 검선문의 명을 따라 줄 자들이 없다는 뜻이다. 그자를 엮어 두면 필요할 때마다 아주 요긴하게 써먹을 수가 있어. 부친의 뒤를 이어 회사를 물려받으면 사회적 지위도 올라갈 테고. 미래를 보고 도움을 줘.”

주성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를 도와주겠습니다.”

도현은 그가 보는 앞에서 호검술 1초식을 반복해서 선보이는 이호선 피디와 김유진 작가, 그리고 호태식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모두 아홉 동작으로 나뉘는 호검술 1초식은 보법으로 하체를 단단히 받쳐 준 다음 산천초목을 떨게 만드는 호랑이의 기세를 흉내 낸다. 기선 제압용 초식이었다.

동작이 크고 호방해서 단체로 칼을 휘두르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멋지고 힘차다.

‘용주가 잘 가르쳤어. 치고 나갈 때 쭉 치고 나가고, 막을 때는 확실히 칼을 내려서 막고 있어.’

목검을 든 지 얼마 안 되는 초보자들이 만드는 검세에 빙그레 미소를 지은 도현은 옆에 서 있는 용주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자세가 잘 잡혔는데?”

“사범이 훌륭하니까.”

용주가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저 정도면 이제 1초식을 아홉 개 동작으로 구분하지 않고 한 호흡에 펼치는 교육으로 넘어가도 되겠어.”

“그렇지? 그럼 지금부터 다음 교육으로 넘어갈까?”

용주의 물음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교육이 끝나고 이호선 피디와 김유진 작가, 호태식은 홍영이 준비한 간단한 다과를 먹으며 한 달간 수련을 다녀왔다는 도현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기 바빴다.

“대체 어디서 수련을 하시고 오는 거예요?”

“산요.”

김유진의 질문에 도현이 간단히 대답했다.

“성의 있게 대답을 해 주십시오.”

호태식의 용기 있는 말에 과자를 먹던 이호선과 김유진이 동조하며 박수를 쳤다.

“미안합니다. 개인적인 수련 장소는 밝힐 만한 곳이 아니라서요. 그냥 산이라고만 알고 계세요.”

도현이 웃으며 말을 했다.

“힘든 수련이었나 봐요. 얼굴 살이 많이 빠졌어요. 물론, 샤프한 턱 선이 더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요.”

“그래 보이나요?”

김유진의 칭찬에 도현이 턱을 한번 매만졌다.

농담 섞인 가벼운 말들이 오가면서 그들 관계는 조금씩 더 친밀해지고 있었다.

“당분간 해외 촬영이 잡혀 있어서요. 내일부터 다음 주까지는 도장에 올 수가 없어요.”

옷을 갈아입고 도장 밖으로 나가던 이호선과 김유진이 말했다.

방송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해외 촬영 잘 다녀오세요.”

도현과 용주의 인사에 그들은 웃으며 도장을 나갔다. 뒤에서 기다리던 호태식도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저도 일이 있어서 내일부터 며칠간은 못 나올 것 같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용주가 말했다.

“누님이 굿판을 벌이시는데, 가서 며칠 도와줘야 하거든요.”

“아, 그래요? 그럼 다녀오셔야죠. 가서 잡귀들 몽땅 보내 버리고 오십시오.”

용주는 쿨하게 손짓을 했다.

“잘 다녀오세요.”

“예, 그럼.”

호태식까지 도장을 나가자, 5층 도장은 도현과 용주, 홍영만이 남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다 도장을 그만두려는 건 아니겠지?”

농담을 한 용주가 벽시계를 봤다.

“오늘은 철호 형이 늦네. 너 보면 깜짝 놀라라고 일부러 전화도 안 했는데.”

“오겠지.”

도현은 5층 창가에서 건물 아래를 내려다봤다. 먼지 쌓인 작업복 차림의 철호가 뜀걸음으로 도장을 향해 오고 있었다.

공사장 일이 지체되는 바람에 그는 고시원에서 옷도 못 갈아입고 일하던 차림 그대로 온 것이다.

“백도현, 왔구나!”

5층 도장에 도착한 그는 도현을 얼싸안았다. 아직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데도 작업복 차림의 장철호의 몸에서는 땀 냄새가 가득 났다.

“고생하시네요, 형.”

“고생은 자식아, 남들도 다 이렇게 먹고살려고 힘들게 일하는데. 그리고 고생은 나보다는 네가 더하고 왔겠지. 이거 봐라, 이거 봐. 얼굴이 아주 그냥 해골이네. 남자가 얼굴에 살이 너무 없어도 보기 안 좋아. 나가자, 고기에 소주 한잔하자. 너희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도현은 땀 냄새 가득한 장철호를 차분히 보며 말했다.

“형, 막노동은 그만하시고 운동에만 전념하시면 어때요? 제가 그 정도는 도와 드릴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노 땡큐다.”

“형, 지금도 운동할 시간 없어서 일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뛰어왔잖아요. 취미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목표가 있다면 동생의 도움도 받으세요. 형이 과거 일 때문에 도움받기 미안해서 혼자서 뭔가를 해 보려는 마음, 나나 용주나 충분히 이해해요. 그러니까 이제는 그만하고 도장으로 들어와요.”

“도현이 말이 맞아요. 저녁에 와서 밤늦게까지 수련하고 다시 고시원 가서 막노동하러 가고. 곁에서 보기 마음 편치 않았어요.”

용주가 목검으로 바닥을 툭툭 찍으며 말했다.

“오빠, 도현 씨 집에서 함께 살아요.”

“야, 너희들 왜 그래?”

장철호는 그를 포위하듯 감싼 동생들을 보며 당황했다.

“너희들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난 하루아침에 뭔가를 이룰 생각이 없는 사람이야. 과거에 그래서 큰 실수를 하기도 했고. 이제는 길게 보면서 살 거라고. 운동도 마찬가지고. 하루에 1시간을 하든 3시간을 하든 내가 만족하는 삶 속에서 하는 게 중요하지, 태릉선수촌에서 스파르타식으로 할 생각이 없다고. 막노동도 삶이 있어. 친구들도 있고. 무거운 짐과 시름하면서 점차 내 몸이 완성된다는 걸 요즘은 부쩍 느끼고 있고. 이게 내 삶이야. 그러니까 너희들이야말로 날 위한다면 그만 닥치고 고기나 먹으러 가자. 난 지금 운동보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니까.”

말을 끝낸 장철호는 오른손으로 도현의 어깨를 감쌌다.

“잘 왔다. 걱정 많이 했어.”

“형…… 지금 오른팔을 사용한 겁니까?”

도현은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서 인상을 찡그리던 장철호가 웃는 낯으로 어깨높이까지 오른팔을 올리자 놀라 물었다.

“그래, 인마. 용주나 홍영이처럼 내공은 안 생겼지만 꾸준히 호심공을 수련했더니 어깨의 통증이 많이 사라져서 이렇게 힘도 주고 팔을 높이 올릴 수도 있게 됐다고, 하하하!”

호탕하게 웃던 그는 오른팔을 허공에 마구 휘젓다가 통증이 오자 얼른 팔을 내렸다.

“험, 물론 완전히 나은 건 아니다. 이제 시작 정도야. 하지만 네 말대로 1퍼센트 가능성이 이렇게 빛을 발하게 되어서 난 정말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

“잘됐어요, 형. 정말 잘됐어요.”

도현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장철호의 오른손을 꽉 잡았다.

“축하해요, 형!”

“고맙다.”

장철호는 코가 시큰했다. 며칠 전부터 다쳤던 어깨가 자연치료가 되어 회복이 이뤄지고 있었다.

기뻤지만 도현이 이계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그 기쁨을 억눌렀고, 용주나 홍영에게도 숨겼다.

그런데 이제 도현이 돌아왔으니 이 기쁨을 마음껏 터트리고 싶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홍영과 말없이 박수를 치는 용주, 수저들 힘도 없었던 오른손을 꽉 움켜쥔 도현, 세 명을 둘러보는 장철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 어렸다.

“사랑한다, 이놈들아!”

아침에 눈을 뜬 김탁훈은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뭐 그리 독한 술이 있는 거야.”

섭 회장 앞에서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던 장면이 떠올랐고, 김탁훈은 부끄러운 마음에 어떻게 다시 그를 봐야 할지 난감해졌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어젯밤 함께 보냈던 미녀는 온데간데없이 침대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김탁훈은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열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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