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디 임팩트 8권 17화
“연락만 주시면 제가 바로 달려가서 말씀드렸을 텐데, 귀하신 아가씨께서 직접 이곳까지 오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병석에 계신 아버지는 매년 생신 때마다 찾아오는 마사키 님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검을 전수받고 독립해 나간 제자들 중 끝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마사키 님을 제외하고는요.”
“별말씀을.”
마사키는 료코의 칭찬에 입이 벌어졌다.
“자, 이제 들어 볼까요? 한국에 가서 누구에게 패했는지?”
“어때? 이 정도면 그 마빡이 자식 이길 수준은 되지?”
용주의 도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내공을 펼쳐 가며 도현과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을 한 용주는 지친 기색 없이 서 있는 도현에게 물었다.
스르릉.
진검을 거둔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을 활용하면 스기하라 마사키는 이길 수 있어. 하지만 내공 없이 싸운다면 반반.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 용주 네가 이길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이길 수도 있어.”
“야야, 너무 짜게 평가하는 거 아니냐? 작년에 그 자식에게 머리가 깨진 뒤에 내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을 해 왔는데.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집에서 잠을 잘 때도 검을 끌어안고 잔다. 엄마에게 미친놈 소리 들으면서도 말이야.”
“좋아. 내공 없이 싸울 때는 6 대 4.”
“자식이 7 대 3 해 줘. 기분이라도 좋게.”
“안 돼.”
“냉정한 자식.”
투덜대던 용주는 관장실에서 나온 홍영이 휴대폰을 건네주자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최 사장님. 예? 아침에 주문한 거요? 예, 맞아요. 목검 백 자루. 주문 잘못 들어간 거 아니에요. 사용할 데가 있으니까 주문한 거죠. 앞으로도 많이 주문할 것 같아요. 예, 수고하세요.”
거래하는 스포츠 용품 업체 사장의 전화였다. 며칠간 장철호로 인해 도장에 있는 목검이란 목검은 죄다 망가졌다.
외공이 효과를 보이자 장철호는 매 맞는 걸 즐겼고, 용주는 그 모습에 변태 같다고 놀려 댔다.
“도현아, 돈 없으면 외공 수련도 못 하겠다. 등에 생긴 반탄력 때문에 이러는데, 나중에 여러 군데가 그렇다고 생각해 봐라. 목검이 하루에 몇 자루씩 사라지겠냐?”
“어쩌겠어. 산에서 나무를 잘라 올 수도 없고.”
도현이 빙그레 웃었다.
“반탄력이 생성된 곳은 건너뛰면 안 되나?”
“생성된 거지 그곳이 완성됐다고 보기는 어려워. 당분간 힘 조절을 잘하면서 지금과 같이 똑같이 순서대로 해야 돼.”
“두 사람 얘기 끝났으면 영국에서 온 이메일 좀 볼래요?”
“영국요?”
도현과 용주는 관장실에 들어가 홍영이 띄어 놓은 노트북 화면을 봤다.
영어로 쓰인 이메일을 더듬더듬 읽어 내려가던 용주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고 하는 거야? 스톤이 어쩌고 하는 것 같은데.”
“숀이란 사람이 보낸 거예요. 우리가 찾는 스톤에 그려진 문양과 비슷한 문양을 증조할아버지가 찍은 사진 속에서 봤다는 얘기예요.”
홍영의 설명에 용주의 눈이 커졌다.
“어디에서 찍은 사진인데요?”
이번에는 도현이 대답했다.
“그 얘기는 없어. 증조할아버지가 탐험가인데, 그 옛날에 찍어 둔 기록사진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스톤의 문양과 흡사한 걸 봤다는 거야.”
“에이 감질맛 나게 뭐 하는 짓이야. 확실히 얘기를 해 주든가.”
용주가 노트북 모니터를 노려봤다.
“근데 왜 이메일을 보낸 거지? 그래서 뭐 어쨌다고?”
“흥미롭다고. 왜 찾는지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 주면, 자신도 증조할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공개할 수도 있다고.”
도현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장난치는 거 아니야? 조금 생뚱맞은데?”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도현 씨, 어쩌죠? 이런 유의 메일은 오늘 처음 받았어요. 엉뚱한 수석을 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요.”
도현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스톤과 관련해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흘려 넘기기에는 꺼림칙했다.
그렇지만 차원 이동 때문에 스톤을 구한다고 사실대로 얘기해 줄 수는 없다.
“홍영 씨, 답장을 보내 주세요. 스톤의 특이한 문양에 때문에 관상용으로 수집을 하는 거라고요.”
“알겠어요.”
홍영이 그 자리에서 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요즘 별의별 사기꾼들 많다더라. 이러다 돈 요구하는 거 아닌가 몰라. 정보 알려 주겠다고.”
“적은 돈이라면 날리는 셈 치고 보내 주지 뭐.”
“착하네, 도현이. 에라이, 자식아.”
용주의 주먹이 도현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집 지하에 있는 연공실에서 검술을 수련하고 올라온 주성하는 샤워를 하고 나와 이메일을 확인했다.
김탁훈이 보낸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연락이 없어 잘됐다 싶었는데, 결국은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귀찮았지만 섭 사형의 지시니 어쩔 수 없었다.
“어떤 녀석인지 한번 볼까.”
별생각 없이 김탁훈이 보낸 이메일의 내용을 확인하던 주성하는 이메일에 첨부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자가 김탁훈이 말한 자였어?”
주성하는 기예잡술서 때문에 한바탕 싸움을 벌였던 사내가 사진 속에 담겨 있자 황당해했다.
그는 이 사내가 휘두른 부엌칼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재등장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백도현. 이게 너의 이름이었군.”
주성하는 여자를 보고 웃고 있는 사진 속 백도현을 지그시 노려봤다.
“곤란하게 됐군.”
검선문의 제자로 콧대가 높은 주성하였지만, 홍콩의 한 아파트 안에서 백도현에게 크게 덴 기억이 있는 그는 일대일로 붙어서 백도현을 압도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반격을 당해 한국에서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필 이자라니.”
주성하는 심란한 눈빛으로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김탁훈에게 자신만만하게 얘기를 해 두어서 손을 쓰지 않기도 뭐하고, 손을 쓰자니 필승의 자신이 없었다.
섭 사형에게 못 하겠다고 말도 못 한다. 이유를 말하려면 기예잡술서 때문에 벌어진 일을 끄집어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섭 사형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다.
섭 사형이 노리는 양피지를 그가 꿀꺽했기 때문이다.
“병신 같은 김탁훈. 백도현에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용하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신 주성하는 넓은 거실 안을 이리저리 거닐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백도현의 배경 먼저 조사해야겠어. 처리를 어떻게 할 건지는 그 뒤에 결정을 하고.”
작은 검술 도장을 운영하는 자가 내공과 검술 실력이 그토록 뛰어날 수는 없다.
그가 검선문의 제자이듯, 백도현은 한국의 비밀스러운 문파의 제자일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일이 커진다. 섭상 몰래 기예잡술서를 차지한 사실도 표면화될 수가 있었다.
“누구를 시켜서 조사하지?”
한국에 섭 사형이 관리하는 작은 조직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내 부하들을 보낼까? 아니야. 한국말도 못하는 녀석들을 보내서 뭘 알아보겠어. 현지인이 필요해.”
한동안 더 고민을 하던 주성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어나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국인 해결사가 필요해. 연결 좀 해 줘야겠어.”
병원에서 퇴원한 서지철은 재활 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 자식 때문이야. 백도현, 빌어먹을 자식.”
교통사고로 뼈가 부러지고 머리를 크게 다친 그는 수영장을 나와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다가 호태식의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했냐?”
-잘 계시나 해서요.
“잘 있으니까 전화질하지 마라. 이젠 네 목소리 듣기도 싫으니까.”
-왜 그러세요, 형님. 섭섭하게.
“섭섭한 건 나야, 이 자식아. 백도현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날 배신해 놓고.”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입니다. 제가 몇 번을 얘기했잖아요, 백 관장은 위험한 사람이니까 건들지 말라구요. 보세요, 결국 형님만 상처 입고 끝났잖아요.
“끝나긴 누가 끝나?”
-의뢰 포기했다면서요. 돈도 반은 돌려주고.
“의뢰는 끝났지만, 내 개인적인 은원 관계는 청산되지 않았다.”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시지 마세요. 그러다 진짜 죽어요.
“수류탄 앞에서도 녀석이 버틸 수 있을까? 흐흐흐.”
-미사일을 쏴도 백 관장은 살아 나올 인물입니다. 엉뚱한 소리 하시지 말고요, 얼른 몸이나 회복하세요. 형님, 저 지금 누나 굿판 끝나서 정리 좀 해 줘야 하거든요.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전화가 뚝 끊겼다.
“이 자식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전화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네.”
투덜대던 그는 의뢰인을 연결시켜 주는 사무실에서 전화가 오자 눈을 반짝였다.
“오랜만이야, 미스 홍. 나야 잘 있지. 응? 다쳤다는 소식들었다고? 언제 적 얘기야. 벌써 나 몸 회복했다고.”
서지철은 무릎이 아파서 길가의 벤치에 앉았다.
“일할 수 있냐고? 하하하, 그럼. 베테랑이 가벼운 교통사고에 무너지나? 응응 그래, 알았어. 여기 밖이니까, 내가 조용한 곳에 가서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그는 그의 발밑에 와서 오줌을 싸고 있는 개를 걷어찼다.
“이놈의 똥개 새끼가! 몸도 안 좋은데 어디다 오줌을 싸고 지랄이야.”
“어머머, 이 아저씨 봐! 지금 우리 삼돌이 때린 거예요?”
아파트 단지에서 개를 산책시키려 나온 아줌마가 눈을 치켜떴다.
“사람 발에 오줌 싸는데 그럼 장승처럼 서 있을까?”
“피하면 되잖아요.”
“이 아줌마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오줌 질질 싸는 개 새끼 데리고 다니면서.”
“뭐, 뭐예요? 말 다 했어요?”
“내가 아줌마 다리에 오줌을 싸 볼까?”
“이 아저씨 미쳤나 봐?”
“더 미치는 꼴 보기 싫으면 개 오줌 싸는 법이나 똑바로 가르치고 다녀요. 에이, 신발 다 젖어졌네.”
서지철은 질퍽거리는 운동화를 신고 자신의 아파트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서지철은 소파에 앉으며 미스 홍에게 전화를 걸었다.
“홍콩에서 의뢰라고?”
-네, 홍콩 쪽 사무실에서 직접 우리에게 연락이 왔어요. 중국어나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요. 서 매니저님, 중국어 하실 수 있잖아요.
“잘은 못 하지.”
-의사소통만 되면 되죠. 맡으실 거예요?
“큰일이야?”
-그런 일 요즘 사무실에서 안 맡아요.
“알았어. 그쪽 의뢰 맡을게.”
전화를 끊은 서지철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래, 태식이 말이 맞을지도 몰라. 백도현과 나는 뭔가 상극인 것 같아. 잊어버리고 다시 출발하자.”
서지철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편안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아직도 저러고 있네? 몇 시간째야?’
퇴근을 하려 지하 도장에 내려온 용주는 관장실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도현은 낮부터 밤늦은 지금까지 벽을 보며 꿈쩍도 않고 있었다.
전설의 달마대사가 현신한 듯했다.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않고 지하 도장 구석진 곳의 벽을 보며 앉아 있는 도현의 모습이 꼭 고뇌하는 구도자 같았다.
“홍영 씨, 영국의 그 숀이란 사람한테서 이메일 답장 왔어요?”
용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요.”
도현의 뒷모습을 턱을 괴고 보고 있던 홍영이 대답했다.
“흠, 벌써 3일이나 지났는데,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장난친 게 분명하군.”
“조금 더 기다려 봤다가 다시 메일을 보내려고요. 철호 오빠는요?”
“내려올 거예요. 근데 홍영 씨, 분위기 보니까 도현이 저 녀석 밤새워 저러고 있을 것 같아요.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서 잠자요.”
“봐서요.”
홍영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때 지하 도장 문이 조용히 열렸다.
장철호였다. 그는 벽을 보고 앉아 있는 도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소리를 줄이며 관장실로 들어갔다.
“기절한 거 아니지?”
그의 농담에 용주와 홍영이 웃었다.
“홍영아, 들어가. 도현이 깨기 기다리지 말고.”
“알았어요, 오빠.”
“간다.”
철호와 용주는 지하 도장을 나갔고, 홍영은 다시 턱을 괴고 도현의 등을 바라봤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넘어 새벽이 되었다.
하품을 작게 한 그녀는 도복 차림으로 조용히 관장실을 나와 도현의 근처에 살포시 앉았다.
졸음이 밀려왔지만 그녀는 꿋꿋이 버티며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벽을 보고 앉아 있는 한 쌍의 남녀는 새벽 고요함을 만끽하며 더욱더 깊은 자기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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