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디 임팩트 8권 18화
그리고 아침이 돌아왔다.
벽을 보고 앉아 있는 도현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는데 펄럭이다가 다시 원상태가 됐다.
조용히 눈을 뜬 도현은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홍영이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은 홍영을 부드럽게 안아서 도장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는 거예요?”
잠에서 깼는지 홍영이 물었다.
“집요. 아침 먹어야죠.”
“이런 차림으로 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요.”
도복을 입은 그들을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힐끔거리며 지나쳤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예요.”
“바보. 내려 줘요, 걸어가게.”
“다 왔어요. 그냥 이대로 가요.”
홍영은 싫지 않은지 도현의 품에 그대로 안겨 있었다.
“도현 씨, 옥룡산에 가는 거 말이에요. 괜찮겠어요?”
그녀는 태선군을 살펴보고 오겠다는 도현의 말에 걱정이 됐다. 혹여나 태선군을 보고 참지 못해 싸움을 걸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걱정 말아요. 당장 싸우려고 가는 게 아니니까.”
“같이 가자고 하면 싫다고 하겠죠?”
“같이 가요.”
“정말요?”
“상해까지 만요. 홍영 씨는 어머님과 있고, 나는 옥룡산으로 가고.”
홍영은 도현의 말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녀는 따라가서 그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오빠, 여긴 왜 또 온 거야?”
“공사가 잘되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
박세중은 현장 책임자에게 알은척을 하며 이세희와 함께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안전모를 착용하고 있었다.
“설마 그 사람에게 시비 걸려고 온 건 아니겠지?”
“그 사람이라니?”
박세중이 공사 현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물었다.
“장철호라는 사람. 그때 오빠 너무 무섭더라. 나한테도 막 함부로 하고.”
“미안하다고 했잖아.”
박세중은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시비 걸려고 온 거 아니지?”
“아니라니까.”
약간 짜증 섞인 대답을 한 박세중은 건물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봤다. 일하는 사람들 앞을 지나가며 슬쩍 얼굴을 확인한 그는 이세희 눈치가 보였는지 턱짓을 했다.
“그만 가자.”
“엘리베이터 타고 가. 다리 아픈데.”
“야, 일하는 사람들 타고 다니잖아. 내려가는데 얼마나 다리 아프다고. 그냥 가.”
“피이.”
계단을 통해 내려가던 그들은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장철호와 마주쳤다.
장철호는 박세중을 힐끔 보더니 말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야, 장철호.”
박세중이 장철호를 불렀다.
“오빠, 왜 또 그래.”
이세희는 지난번 일이 떠올라 약간 불안했는지 박세중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박세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는 장철호를 따라가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말했지. 사람을 보면 알은척을 하라고.”
장철호가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봤다.
“안녕.”
가볍게 한마디 한 장철호는 이세희에게도 눈인사를 보낸 뒤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안녕? 그거 헬로우냐? 야, 이 개새끼야! 거기 안 서!”
“오빠!”
“놔 봐 좀!”
훌쩍 계단 난간을 짚고 위로 점프한 박세중은 장철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 두 눈을 보고 제대로 알은척을 하라고.”
“바쁘다. 위에 나 기다리는 사람 있어.”
“나도 한가한 사람 아니야, 이 새끼야.”
“여긴 또 왜 왔냐.”
“여기 내 건물이거든! 내가 오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라고. 니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장철호는 턱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래, 미안하다, 여기 네 건물이었지. 반갑다. 이제 좀 올라가자.”
박세중은 안전모 밑으로 보이는 장철호의 눈을 잠시 노려보다가 천천히 길을 비켜 줬다.
장철호가 스쳐 지나갈 때 박세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고살기가 그렇게 어려워졌냐? 어깨도 아작 난 새끼가 여기서 힘을 쓰게. 돈 필요하면 말해 새끼야. 아픈 어깨 더 병신 되지 말고. 시발 새끼가 존 내 열 받게 여기서 일하고 지랄이야. 가자, 세희야.”
장철호는 고개만 살짝 돌려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박세중을 쳐다봤다.
“야, 박세중!”
“뭐 인마!”
“나 여기서 일하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른 데 가냐?”
“그래.”
“잘 살아, 개새끼야. 내 눈에 띄지 말고.”
박세중이 여자 친구와 사라지자 장철호는 오른 주먹으로 허공을 강타했다.
파공성이 날 만큼 오른팔에 힘이 실렸다.
수저들 힘도 남지 않은 오른손과 고통뿐인 오른쪽 어깨가 서서히 회복되면서 예전의 힘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너 이 개새끼, 오른팔 멀쩡하네!”
장철호 연락처라도 받아 놓을까 싶어서 조용히 올라온 박세중이 힘 있는 펀치를 목격하고는 놀라 외쳤다.
당황한 장철호가 얼른 오른팔에 힘을 풀고 아픈 척을 했다.
“참고 한번 해 본 거야.”
“어디서 구라질이야. 이 새끼 이거 날 아주 매장시키려고 그때 쇼한 거 아니야? 나 때문에 오른쪽 어깨 완전히 나가서 다시는 케이지에 못 돌아올 것처럼 연막 쳐 놓고.”
“오해다. 그런 일 없어. 나 일하러 간다.”
“거기 서, 새끼야.”
장철호를 따라잡은 박세중이 주먹으로 장철호의 등짝을 때렸다.
그 순간 장철호가 의식적으로 등에 힘을 주었다.
퍼억 소리와 함께 박세중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러났다. 손이 찌릿하니 욱신거렸다.
“뭐야 시발. 등에 철판이라도 숨겼어? 왜 이렇게 아파.”
손을 풀어 주며 박세중이 인상을 썼다.
“여자만 너무 만나지 말고 운동에 집중해라. 주먹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
장철호는 서둘러 위로 올라갔고 뒤에 남은 박세중은 소리를 쳤다.
“너 오른쪽 어깨 괜찮지! 대답해!”
장철호가 대답해 주지 않고 사라지자 씩씩거리던 그는 다시 올라가려 했다.
그때 이세희가 밑에서 올라오며 말했다.
“오빠! 오빠 차 견인하려고 해! 얼른 와 봐!”
“젠장.”
장철호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던 박세중은 서둘러 차를 세워 둔 곳으로 달려갔다.
일이 끝나고 홍 반장의 승합차에 타려던 장철호는 뒤에서 그의 팔을 잡아끄는 힘에 엉거주춤 뒤로 끌려갔다.
“말해. 어깨 괜찮으냐고 자식아.”
“아직도 여기 있었냐?”
장철호는 박세중이 기다리고 있자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냐고!”
“요즘 약간 좋아지고 있을 뿐이야.”
“저녁 먹으면서 얘기 좀 하자.”
장철호는 망설이다가 운전석의 홍 반장에게 인사를 했다.
“반장님, 전 따로 가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별일 없는 거지?”
“그럼요. 내일 뵙겠습니다.”
“그러세.”
홍 반장과 인부들이 탄 승합차가 떠나자 장철호가 뒤돌아섰다.
“나 바쁜 사람이야. 딱 한 시간만 시간 내주지.”
“뭐 하는데 바빠, 일 끝난 잡부가?”
“나의 하루는 지금부터야.”
“자기 팀 코치로 와 달라고 했다고요?”
도현이 부서진 목검의 잔해를 치우며 물었다.
“응.”
“뭐라고 하셨어요?”
“싫다고 했어. 그랬더니 마구 욕하고 식당을 나가더라고. 막노동이나 평생 하라면서. 싸가지없는 새끼, 막노동이 어디가 어때서.”
장철호는 말을 하면서 벗어 놓은 도복을 입었다. 온몸이 도현의 매질로 붉었다.
“이 이야기는 용주에게 하지 마라. 내가 박세중 때문에 어깨가 이 모양이 됐다고 박세중 욕 엄청 하거든.”
“박세중이 어쨌다고요?”
밖에서 군고구마를 사온 용주가 5층 도장 문을 열고 들어오며 물었다.
“무슨 박세중?”
장철호가 시치미를 뗐다.
“박세중 얘기 했잖아요.”
“안 했어.”
“이상하네. 들은 것 같은데.”
“그게 그 고구마냐? 맛있다는?”
장철호가 화제를 돌렸다.
“네. 그 아저씨 며칠 안 보이더니 다시 또 나왔네요. 내려가요. 홍영 씨랑 함께 먹자구요. 도현아, 가자.”
밤 11시가 다 된 시각에 군고구마 파티를 벌이기 위해 그들은 지하 도장으로 우르르 몰려 내려갔다.
“상해는 언제 갈 거냐?”
아직 태선군의 존재를 모르는 장철호는 도현이 홍영과 함께 홍영의 어머니 집이 있는 상해로 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모레 가려고 했는데요, 며칠 더 기다렸다 가야 될 것 같아요.”
“왜?”
“홍영 씨 어머님이 지금 친척 집에 계시다고 하셔서요. 집으로 돌아오실 때 시간 맞춰서 가려고요.”
“이번에 가면 홍영이 어머님께 결혼 승낙을 받고 와. 언제까지 그렇게 너희들끼리 살 수는 없잖아.”
“철호 형은. 누가 들으면 도현이가 지금 홍영 씨하고 한방에서 살림 차리고 사는 줄 알겠어요. 각방 쓰는데. 아니지, 둘 사이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지.”
장철호와 용주가 도현을 도둑놈 쳐다보듯 바라봤고, 도현은 억울한 표정으로 지하 도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관장실에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던 홍영은 그들이 들어오자 소리쳤다.
“영국에서 답신이 왔어요!”
그들은 군고구마 봉지를 흔들며 서둘러 관장실로 들어갔다.
“뭐래요?”
용주가 물었다.
“아직 안 봤어요. 지금 막 들어온 이메일이거든요.”
홍영은 대답을 하며 영국의 숀이 보낸 이메일을 클릭했다.
스톤의 문양이 특이해서 관상용으로 구한다니, 성의 없는 대답이로군요. 그 정도 관심으로 스톤을 구한다면 굳이 내가 당신의 수집욕에 동참할 이유가 없겠습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기록사진과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그 정도로 가치가 없는 것들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당신들이 영국으로와 증조할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 듣겠다면, 그땐 고려해 보겠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 영국까지 올 비행기 티켓의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이니까요. 어떻습니까, 영국으로 오시겠습니까?
홍영은 영어 실력이 부족한 용주와 장철호를 위해서 마치 자신이 말을 하는 것처럼 해석을 해 주었다.
다 들은 용주는 팔짱을 꼈다.
“수상해, 영국으로 오라니. 고도로 지능화된 장난 아닐까? 호기심을 계속 유발시켜서 영국까지 가게 한 뒤, 결국은 연락도 안 되는 그런 장난. 철호 형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난 모르겠다. 굳이 이런 장난을 칠까 싶기도 하고.”
장철호는 군고구마를 하나 꺼내 껍질을 벗긴 다음 홍영의 손에 쥐여 줬다.
“먹어.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이지. 너희들도 일단 먹어. 식으면 군고구마가 아니지.”
장철호의 재촉에 도현도 군고구마를 하나 집었다.
‘영국이라…….’
군고구마를 먹으며 글의 내용을 생각하던 도현은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들 웃으며 군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그래, 먹을 땐 즐겁게 먹자.’
그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모두에게 한 잔씩 돌린 다음, 군고구마 봉지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이메일 얘기는 하지 않고 먹는 데 집중했다.
“배부르다.”
장철호가 맛있게 잘 먹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고, 홍영과 용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손에서 군고구마가 사라지자 그때가 돼서야 도현이 입을 열었다.
“홍영 씨, 숀에게 영국으로 갈 수 있다고 글을 보내세요. 언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도 물어보고요. 전화번호를 알려 주면 고맙겠다는 말도 함께요.”
“가 보려고 결정한 거예요?”
홍영은 도현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속는 셈 치고 한번 가 보려고요. 어쩌면 정말 스톤과 관련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게 바로 이 자식 수법이라니까. 넌 벌써 걸려든 거야, 인마.”
용주가 휴지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사내라면 아쉬움을 남기면 안 되지. 필요하면 가 봐.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장철호는 도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보내요.”
홍영이 말을 하며 이메일 전송 버튼을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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