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디 임팩트 8권 19화
만화
택시에서 내린 료코는 길 건너 호검술 도장 간판이 붙은 건물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백도현 관장.’
스기하라 마사키는 굴욕적인 패배를 안긴 백도현을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심장이 차가운 검객이라고 표현했다.
다소 화려한 수식어를 붙였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당시 스기하라 마사키는 진검을 휘두르는 백도현을 그렇게 평가했다.
-아가씨, 그자의 검은, 부끄럽지만 제가 감히 넘볼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정해진 검식을 사용하는 자가 아닙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수많은 실전을 겪은 사람처럼, 그의 검은 차갑고 비정했습니다. 제가 죽음의 공포를 느껴 주저앉았을 만큼요.
스기하라 마사키는 마음속 깊은 이야기까지 숨기지 않고 료코에게 얘기했고, 그녀는 담담히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집으로 돌아가 부친에게 전해 주었다.
병석의 부친은 스기하라 마사키의 설욕을 당부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따윈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기감을 깨치고 나름 검술의 일가를 이룰 만큼 실력이 뛰어난 스기하라 마사키였지만, 그녀의 위치에서 보면 어린아이가 막대기를 들고 검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스기하라 마사키와 싸워서 이긴 백도현도 그녀는 사실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흥미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병석의 부친이 부탁했기에 한국에 온 것이다.
‘내공이 없는 자들의 검은 그저 아이들의 검일뿐.’
물론 스승인 태선군은 무예가 극에 달하면 내공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경지에 오른다고 그녀에게 가르쳤다.
세상의 기운을 모두 끌어 쓰는 경지라는데, 검선문 천 년 역사에 그 경지에 오른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라 했다.
오원신공을 창안한 검선문의 7대 문주 이연백.
열 명의 사형제들 중 아홉째의 위치에 있는 료코는 실력으로만 따지면 가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비범한 솜씨를 가졌다.
그런 그녀이기에 한국의 작은 검술 도장의 백도현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한동안 건물을 응시하던 그녀는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숄더백에 넣어 둔 휴대폰이 소리를 내자 걸음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네.”
-구 사저, 왼쪽을 보시오.
료쿄는 휴대폰을 귀에 댄 상태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검정색 선글라스에 정장 차림인 주성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주성하에게 다가갔다.
“사제가 여긴 웬일이지?”
“나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구 사저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주성하는 일본으로 간다던 료코가 한국에 와 있자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집안일 때문에. 넌?”
“섭 사형이 시킨 일이 있어서요.”
“한국에서?”
“예,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주성하가 자세한 얘기를 회피하자 료쿄는 더 묻지 않았다.
“근데 무슨 집안일이기에 여기까지 온 겁니까?”
“별일 아니야.”
“아니긴요. 부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에 일본에 간 사람이 한국에 와 있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신경 꺼.”
차가운 그녀의 대답에 주성하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구 사저의 그런 차가움이 난 좋습니다.”
“일 봐. 난 갈 테니까.”
그녀가 돌아서려 하자 주성하가 서둘러 말했다.
“오늘 저녁때 좀 봅시다. 중요한 문제로 상의할 게 있으니까.”
“지금 말해.”
“길거리에서 말할 일이 아니라서 그래요.”
“내가 전화할게.”
“꼭 전화 주십시오. 중요한 이야기니까.”
주성하는 걸어가는 료쿄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긴 왜 왔지? 이곳은 그놈이 있는 덴데.”
한국인 해결사를 만나기 위해 오전에 한국에 온 그는 서울에 온 김에 주소 속 호검술 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왔다가 료쿄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뒤에서 료쿄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주성하는 그녀가 호검술 도장이 있는 건물 방향으로 향하자 이상한 기분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구 사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지금 호검술 도장에 가는 겁니까?”
-맞아, 그곳으로 가는 거야.
“거긴 왜요?”
-집안일이라고 했잖아.
“호검술 도장과 한집안입니까?”
-헛소리하려거든 끊어.
“구 사저 그게 아니라 섭 사형이 내린 지시 중에 그곳과 관련된 일이 있어서 물어본 겁니다.”
-여기가?
“네, 그러니 대답해 주십시오.”
-별일 아니야. 집안의 검술을 배운 자가 있는데, 그자가 여기 관장에게 패했어. 아버지의 부탁으로 그자를 손봐 주려고 온 거고.
“그럼 지금 백도현 관장과 싸우기 위해 가는 거였습니까?”
-그래.
“곤란한데요. 돌아오시죠, 구 사저. 그자는 그런 식으로 상대하면 안 됩니다.”
-무슨 소리지?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김탁훈이란 자의 부탁을 받고 백도현을 처리하기로 했다고?”
“예. 그러니 구 사저가 이 시점에 그 도장을 드나드는 건 별로 안 좋을 것 같습니다. 차후에 백도현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구 사저가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주성하는 커피숍 직원이 놓고 간 커피를 한 모금 하며 조용히 말했다.
“의심을 왜 받지? 난 도장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정식으로 대련을 벌일 건데. 그리고 백도현은 내가 한국에 없을 때 처리하면 되잖아.”
“그는 그렇게 가볍게 볼 자가 아닙니다.”
“그자를 잘 알아?”
“구 사저, 나를 얼마만큼 믿습니까?”
돌연 주성하가 분위기를 잡으며 묻자 료쿄는 소리 내어 웃다가 커피를 입에 댔다.
말없이 커피를 몇 모금 마신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주 사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구 사저와 나는 열 명의 제자 들 중 제일 말석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부님과 사형들 눈치 때문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제대로 못 하며 살고 있죠.”
“그래서?”
“나는 눈치와 머리가 있고, 구 사저는 나이 많은 사형제들을 압도하는 뛰어난 무공 실력이 있습니다. 우리 둘이 손을 잡으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지요.”
“왜 그런 힘을 발휘해야 하지?”
“몰라서 묻습니까? 사부님 사후를 생각해 보십시오. 섭 사형이 문주직을 계승하면 우리는 노예처럼 부림을 받게 될 것이고, 대사형인 청선이 문주가 되면 우리들은 전대 제자들이 해 왔던 것처럼 옥룡산에서 뼈를 묻어야 합니다. 다른 사형제들이 문주가 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평생 머리 위에 올려 두고 늙어 죽을 생각입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주성하는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우리가 힘을 합한다 하여 사형들을 제치고 문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못 될 이유는 없지요.”
호탕하게 외치는 주성하의 행동에도 료쿄는 표정 변화 없이 앉아 있었다.
“문주는 결국 힘이다. 사형들을 누를 힘이 내게는 없어.”
“나와 함께 그 힘 만들면 되는 겁니다.”
“무슨 수로.”
“원 말 명 초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절대 고수 담기량의 거처를 찾아내는 겁니다.”
“담기량의 거처를!”
주성하의 어떤 말에도 놀라지 않았던 료쿄가 이번만큼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선문에는 과거 무예 고수들의 행적이 담긴 기록물이 잘 보존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료쿄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는 담기량이 혼란스럽던 원 말 명 초를 관통하는 당대 제일 고수로 묘사되어 있었다.
주원장을 죽여 주면 나라의 반을 나눠 주겠다고 제안한 원나라 황제의 일화가 적혀 있기까지 했으니, 그의 능력은 비범을 넘어 천하를 덮을 정도였다.
“못 다루는 무기가 없었지만 특히 검술은 당할 자가 없다고 했지요.”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책을 봤으니까. 그런데 담기량의 거처를 찾아낸다니, 홀연히 사라졌다는 그의 거처를 어떻게 찾아낸다는 거지?”
주성하는 료쿄가 관심을 보이자 시간을 끌며 그녀의 시선을 즐기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사라지기 전, 늑대처럼 외로웠던 강호의 시간 동안 유일한 지기가 되어 준 한 명의 친구에게 자신의 거처를 알려 줬습니다. 담기량의 친구는 그의 거처를 한 장의 지도로 만들어 기예잡술서라는 책 속에 감춰 뒀죠. 수백 년이 흘러 그 책은 가치를 모르는 도굴꾼들에 의해서 발견됐고,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지요.”
주성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담기량의 거처로 갈 수 있는 지도가 네 손에 있다는 거야?”
“그렇죠. 바로 이 주성하의 품 안에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믿기 어려워.”
“예?”
“너처럼 머리 굴리는 녀석이 내게 왜 이런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는 거지? 지도를 이미 차지했다면서.”
료쿄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내 마음을 모르는 겁니까? 난 오래전부터 구 사저라면 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내가 섭 사형에게 기예잡술서 안에서 찾은 지도를 주지 않은 이유도 다 그 때문입니다. 구 사저와 함께 담기량의 거처를 찾아내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많은 것들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요.”
“섭 사형이라니?”
“사실 기예잡술서를 찾아보라고 내게 은밀히 지시를 내린 사람이 다름 아닌 섭 사형이에요.”
“겁도 없이 섭 사형을 속이고 있구나.”
“걱정 마세요. 섭 사형이 내게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내가 진짜 기예잡술서를 발견하리라고는 거의 기대를 안 하는 눈치였으니까요.”
“지도는 지금 어디 있지?”
“홍콩의 안전한 금고 속에 있습니다. 지도를 보고 대충 담기량의 거처로 의심되는 곳을 몇 군데 찾아내긴 했는데, 섭 사형의 눈을 피해서 내가 그 일에만 매달릴 수도 없고, 사부님도 종종 나를 찾으시니.”
료쿄의 눈치를 보던 주성하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구 사저는 사형제들이 경계를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뭘 해도 그러려니 하겠죠. 나 대신 담기량의 거처를 찾으십시오. 결과는 함께 나누고요. 그리고 힘을 모아 검선문의 공동 문주가 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난 구 사저를 믿고 이 모든 걸 얘기했어요. 이제 구 사저는 나를 믿습니까?”
“내가 믿는 건 검뿐이다.”
“너무하는군요. 난 구 사저에게 해가 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어찌 믿지 못합니까?”
주성하가 서운함을 담아 말했다.
“내 말 다 끝나지 않았어. 끝까지 들어.”
료쿄는 주성하의 두 눈을 직시하며 다시 처음부터 말했다.
“내가 믿는 건 검뿐이다. 하지만…… 너도 조금은 믿어 보겠다.”
얼음같이 차가운 료쿄의 눈가에 웃음기가 떠오르자, 주성하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사저. 우리 둘이 뭉치면 두려울 게 없어요.”
“근데 백도현은 어떻게 된 거지?”
“아, 예. 그자는…….”
주성하는 홍콩에서 백도현과 부딪쳤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내가 나서서 그를 은밀히 죽여 주겠다.”
서늘한 눈빛으로 료쿄가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사저도 아시겠지만 제가 사형제들 중 제일 실력이 뒤처진다 해도 그게 어디 보통 실력입니까?”
주성하는 빈 커피 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며 말했다.
“우리와 같은 무공의 맥을 이어 오고 있는 무맥이 한국에도 없으란 법은 없지요. 백도현 뒤에 그런 존재들이 있다면 우리가 피곤해질 수가 있습니다. 일단 조사를 좀 해 본 뒤, 그의 처리를 결정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섭 사형의 지시로 김탁훈이란 자의 부탁을 받은 건데,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섭 사형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김탁훈이 생각 있는 자면 감히 베스트엠의 회장인 섭 사형에게 대놓고 불평하지는 못할 겁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호의를 베푼다고 말해 뒀으니까요.”
“알았어. 백도현 일은 네가 처리해. 힘이 필요하면 내게 말하고. 나는 일본으로 돌아간다.”
주성하와 한배를 타기로 한 이상 마사키 일로 백도현을 만나는 건 포기해야만 했다.
둘은 커피숍을 나와 도로가에서 택시를 잡기 위해 섰다.
“구 사저, 홍콩엔 언제 올 겁니까?”
“아버지 병세가 점차 호전되고 있어. 조만간 갈 수 있을 거야. 다시 연락할게. 아, 백도현 사진, 가지고 있는 것 있어?”
“궁금하세요, 어떻게 생겼는지?”
“그래.”
주성하는 사각 가방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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