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195화 (195/575)

[195] 디 임팩트 8권 20화

사진을 한동안 들여다보던 료쿄는 택시가 오자 들고 있던 사진을 주성하에게 돌려줬다.

스기하라 마사키가 그린 그림 속 인물과는 너무도 차이가 났다.

“잘생겼네.”

택시를 타고 그녀가 사라지자 주성하는 불쾌한 얼굴로 백도현의 사진을 구겨서 구둣발로 짓밟았다.

홍영은 내공이 실린 검을 허공에 뿌리듯 휘둘렀다. 검의 잔상이 부채꼴로 빠르게 퍼졌다가 사라졌다.

용주처럼 호심공을 통해 축기뿐만 아니라 내공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 그녀는 몇 차례 더 내공을 이용해 검을 휘두르다가 기운이 바닥나자 검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했다.

돌아선 그녀는 도장 벽에 기대 편안한 자세로 뭔가를 그리고 있는 도현에게 다가갔다.

“뭐 해요?”

“만화 그리고 있어요.”

“만화요?”

홍영은 도현처럼 도장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고개를 살짝 옆으로 뺐다.

도현이 스케치북에 칸을 그어 그린 그림이 보였다.

“사막이네요?”

“네, 도적 떼들을 돌파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어요.”

그녀가 보는 가운데 도현은 선 굵은 터치로 이계에서 경험했던 사막의 도적 떼들과 싸우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그려 갔다.

세밀하진 않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이 단번에 시선을 잡아끌었다.

눈앞에서 그려지는 도현의 빠른 그림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와서 홍영에게 칼을 휘두를 것 같았다.

‘대단해. 전엔 화선지에다 그린 여러 난초들에게서 감정들이 느껴졌는데, 이젠 이런 만화에서조차도 느껴져.’

수백 명의 사막 도적 떼들의 포위망을 뚫고 주인공 일행이 탈출을 하자 홍영은 박수를 쳤다.

“드디어 탈출을 했어요!”

“재밌어요?”

“네에! 여기 이 여자가 그때 말했던 그 여자죠? 안개 도시로 가려고 용병들을 모집했던.”

“맞아요.”

도현은 잠시 펜을 놓았다.

긴 머리를 위로 올린 아름다운 릴리아가 금방이라도 살아 나올 것 같았다.

“너무 예쁘게 그려 준 거 아니에요?”

홍영이 새침하게 물었다.

“홍영 씨가 더 예뻐요.”

“그래요?”

홍영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 이런 걸 그리는 거예요?”

“아버지랑 어렸을 때 만화책 보고 함께 즐기던 적이 있었거든요. 누군가는 그때의 아버지와 나처럼 내가 그린 그림들을 보고 즐거워했으면 해서요.”

“만화책 낼 거예요?”

“안 될 거 없죠. 그동안 내가 겪은 이계에서의 일들을 조금씩 손봐서 그리면 될 것 같은데요.”

홍영은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안 됐지만, 모든 걸 떠나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스케치북 속의 사막 도적 떼 신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재미도 있고.

“더 그려 봐요. 그다음은 어떻게 됐어요?”

“우울한 이야기인데.”

도현은 석양 속에 릴리아와 호위대들이 죽은 동료를 사막에 묻고 숙연한 얼굴로 땅에 입맞춤을 하는 장면을 그려 갔다.

상상 속 그림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바로 곁에서 지켜봤던 사실을 스케치북에 옮긴 도현은 검에 마음을 담아 휘두르듯 펜에 감정을 실어 눈가의 주름까지 표현해 냈다.

조금 전 사막 도적떼 신에서 봤던 선 굵은 터치와는 전혀 다른 세밀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는 감성적인 그림이었다.

죽은 동료를 떠나보내는 불과 몇 컷의 그림이었지만, 도현이 표현한 감정의 극한을 맛본 홍영은 눈물을 글썽였다.

“이 사람, 그때 정말 죽은 거죠?”

도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도현 씨, 그림 함부로 그리면 안 되겠어요. 사람 감정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면 어떻게 해요?”

“큰일이네요. 여기 보이는 호위대들…… 곧 있으면 다 죽어요.”

“뭐라구요! 죽이지 마요! 살려요!”

홍영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살려요?”

“네, 굳이 다 죽일 이유는 없잖아요. 이계에서는 여기 이 여자를 살리기 위해서 그들이 그렇게 죽어 갔지만, 도현 씨가 그들을 부활시킬 수 있잖아요, 도현 씨의 만화 속에서.”

“아, 알았어요. 안 죽일 테니까, 흥분하지 말아요.”

도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홍영을 진정시켰다.

“내가 아주 멋지게 호위대들이 활약하는 장면으로 사막 신을 마무리할게요.”

“정말이죠?”

“조금만 기다려요.”

도현은 스케치북의 다음 장을 넘겨 마음속으로 몇몇 컷의 구도를 잡은 다음 펜을 가져갔다.

그가 막 만화를 그리려 할 때, 그의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조용한 지하 도장에 울려 퍼졌다.

펜을 놓고 일어선 도현은 관장실에 들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도현이 다소 무거운 얼굴로 돌아오자 홍영이 걱정하며 물었다.

“안 좋은 전화였어요?”

“아버지 지인이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어머, 그래요?”

“부산 충덕관의 김인호 관장님이신데, 작년 아버지 장례식 때도 오셔서 나를 많이 위로해 주셨거든요. 사과 베기를 할 수 있을 거라며 이호선 피디에게 추천하신 분도 바로 이분이세요.”

비록 얼굴을 가리고 도장을 공개하지 않아서 김인호 관장에게 한 소리 듣기는 했지만, 방송을 보고 도현의 실력에 감탄했다며 칭찬을 해 주기도 한 분이다.

“홍영 씨, 빈소에 가 봐야겠어요.”

“같이 갈까요?”

“아니에요. 혼자 다녀올게요.”

집에서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은 도현은 저녁을 건너뛰고 바로 서울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KTX 기차표를 샀다.

기차를 기다리며 도현은 아버지 장례식 이후로 한 번도 찾아보지 못한 김인호 관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물론, 아버지 복수를 위해 이계를 오가며 나름 바쁘게 살아왔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밤을 같이 세어 주고 발인까지 함께해 준 분에게, 단순히 전화만 할 게 아니라 한 번쯤은 찾아갔어야 하는 건 아닌지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왔다.

말없이 검은 구두에 반사되는 기차역의 전등을 응시하던 도현은 시간이 되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서지철은 호텔 객실 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성하가 문을 열었다.

“미스터 서?”

주성하가 물었고, 서지철은 가볍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서지철의 위아래를 훑어보던 주성하는 객실 안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술?”

“의뢰인과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서지철이 선글라스를 벗어 정장 상의에 넣으며 말했다.

“해결사 경력이 몇 년이나 됩니까?”

주성하가 위스키를 마시며 물었다.

“10년이 좀 넘었습니다.”

“의뢰받은 일 중 실패한 건 있습니까?”

“…….”

서지철은 없다고 말을 하려다가 백도현이 떠올라서 머뭇거렸다.

“실패했나 보군요.”

“실패는 아니고, 교통사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한 사소한 일이 하나 있긴 합니다.”

“몸이 어디 불편합니까? 앉은 자세가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데.”

주성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흐음…….”

주성하는 위스키를 한 잔 더 마셨다.

“중국어가 조금 서툰 것 같은데, 내가 하는 말을 다 이해 하는 거 맞습니까?”

“하하하하!”

서지철이 목젖이 보일만큼 크게 웃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만 가 보겠습니다.”

“앉으세요.”

주성하가 만류를 하자 서지철은 헛기침을 하며 도로 앉았다.

“당신이 해 줄 일은 한 사람을 조사하는 겁니다.”

“뒷조사 말입니까?”

“그래요. 그런 셈이죠.”

주성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있던 사각 가방을 들고 왔다.

딸깍.

가방을 연 그는 안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조사해야 할 대상의 기본적인 신원이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 이상이에요. 이자가 어떻게 성장했고, 만나는 자들은 누구고, 수상한 점은 없는지 샅샅이 조사해서 내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가지고 오세요.”

“굉장히 난해한 요구를 하시는 겁니다. 콕 찍어서 하나를 요구하시면 모를까, 전반적으로 조사하라면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원한다고 하면, 내가 그 기준을 어디에 두고 움직이겠습니까?”

주성하는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손짓을 했다.

“일단 서류나 확인해 보세요. 내가 자세히 설명해 줄 부분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서지철은 서류 봉투를 열어 터프하게 내용물을 테이블 바닥에 쏟아 냈다.

사진 몇 장과 종이 한 장이 전부였다.

뒤집혀 있는 사진들을 한 장씩 돌리던 서지철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여유롭던 얼굴의 미소도 사라졌다.

‘백도현! 이 자식이 왜 또 여기에!’

순간 스트레스로 목덜미가 뻣뻣해진 그는 표정을 관리하려 애를 써야만 했다.

종이에는 도현의 기본적인 인적 사항과 호검술 도장의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두 번 볼 것도 없이 백도현이 뒷조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사진을 보고 왜 놀랍니까?”

주성하가 냉장고에서 작은 위스키병을 하나 더 꺼내며 물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자와 얼굴이 비슷해서 순간 놀라서 그랬습니다.”

“그래요? 잘됐군요. 그 적개심을 연료 삼아서 조사를 철저히 하면 되겠습니다.”

“술 한 잔 주시겠습니까?”

“의뢰인과는 술 안 마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사진을 보니 술이 당기는군요.”

서지철은 주성하가 따라 준 위스키를 한입에 삼켰다.

“그자는 검도 관장인데 보통 놈이 아니에요. 가까이 다가가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금방 깨달을 만큼 민감하고 싸움도 아주 잘하는 녀석이니까, 섣불리 다가가지 말고 원거리에서 녀석을 조사해야 할 겁니다.”

“잘 아시는군요.”

“잘 알아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 말씀해 보십시오.”

서지철은 도현의 사진을 봉투에 집어넣었다.

밤 10시가 넘어 부산역에 도착한 도현은 택시를 타고 빈소가 차려진 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 지역의 많은 무도인들이 찾아와 부산에서 이름을 날리던 종합 무술인 김인호 관장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을 지나쳐 향을 꽂고 절을 한 도현은  김인호 관장의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조용히 빈소를 나왔다.

사람이 많아서 안에 오래 있을 상황도 아니었다.

병원 장례식장 밖 나무 벤치에 앉은 도현은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백 관장.”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도현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아니, 한 선배님.”

도현이 살짝 놀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한석호가 몇 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서 그를 보고 서 있었다.

벤치로 다가온 한석호가 도현을 보며 말했다.

“지나가는데 자네를 닮은 사람이 있어서 처음엔 긴가민가했네. 반갑네. 그동안 잘 있었나?”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선배님은 어떠십니까?”

도현은 한석호의 잘린 귀 부분과 총알을 맞은 허벅지 부위를 살폈다.

홍콩 병원에서 헤어질 때 한석호는 몸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지만, 후유증이 없나 물어본 것이다.

“괜찮아.”

나무 벤치에 앉은 한석호는 도현의 옷차림을 보며 물었다.

“누구 장례식에라도 찾아온 건가?”

“네, 아버지 친구분이 돌아가셔서요. 선배님은 여기에 무슨 일로.”

도현이 벤치에 앉으며 물었다.

“인사동 사진전을 같이 열었던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지병으로 죽었어. 외국에 있었다면 모른 척했겠지만, 한국에 있으니 한번 찾아와 봐야지.”

한석호도 조문을 온 것이었다.

“내공은 어떤가? 여전히 늘지 않고 있지?”

한석호는 홍콩에서 자신에게 내공 문제를 상의한 도현에게 지나가는 어투로 슬쩍 물었다.

“그게 말입니다.”

“아네, 쉽지 않지. 새로운 단전을 열어 주는 깨달음이 그렇게 쉽게 오겠는가? 조급해하지 말고 길게 보고 가게. 10년, 20년을 보고 말이야. 자넨 아직 젊지 않은가.”

도현은 이미 깨달음을 얻었고, 그로 인해 무공이 급상승하며 새로운 단전이 열렸다는 사실을 말해 주려고 했다.

하지만 한석호가 지레짐작하며 말을 길게 이어 가자 잠시 입을 다물고 그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조급함은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네. 조급함은 욕심에 기인한 것, 마음을 내려놓고 살아 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야. 하아,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 나이가 들수록 조급함만 늘어 가니 말일세.”

“저어, 한 선배님.”

“말하게.”

도현은 벤치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가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사람들이 다 지나가자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새로운 단전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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