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디 임팩트 8권 21화
“뭐가 생겼다고?”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단전이 생겼습니다. 막혔던 내공도 다시 늘고 있고요.”
“뭐야!”
한석호가 놀란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났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다시 말해 보게.”
도현은 같은 말을 해 주었고 한석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진정한 고수가 되는 길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닐 텐데.”
도현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지만 한석호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보여 주게, 깨달음을 얻어서 변화된 자네의 힘을 말이야.”
“여기서 말입니까?”
도현은 고민을 하다가 사람들이 없는 곳을 향해 손바닥을 앞으로 밀었다. 멀리 화단에 흙들이 허공으로 1미터나 솟구쳤다.
“장풍!”
한석호는 장풍을 처음 목격했다.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선배님. 병원이니까요.”
“허허.”
한석호는 도현의 높은 경지에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늦었지만 축하하네. 같은 무도인으로서 부러울 따름이야.”
“감사합니다, 선배님. 홍콩에서 제가 가야 할 길을 확인해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제자리에 있었을 겁니다.”
“겸손할 필요 없네. 지금 보니까, 자넨 내가 없어도 스스로 발전했을 인물이야.”
한석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제자인 다혜 때문에 도현과 처음 검을 나눴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도현과 지금의 도현은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대체 반년 사이에 그는 어떤 수련 과정을 거친 걸까?’
홍콩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 줬을 때도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놀라웠는데, 지금은 더 대단해져서 나타났다.
수십 년을 매달려도 깨달음을 얻지 못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단전에 만족하며 사라져 갔던 과거 속 무인들의 이야기들을 고서를 통해 알고 있는 그로서는, 단시간에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단전을 생성한 도현이 기특하면서도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군. 자네에게 깨달음은 어떻게 다가왔는가?”
간단한 질문이지만 도현의 대답은 아주 길었다. 한밤중 병원의 나무 벤치에서 한석호는 옛 서적과 자료 들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앞서 간 인물의 산 증언을 들었다.
그것은 도현이 취영산에서 지냈던 며칠간의 기록이었고 일상적인 것들의 이야기들이었지만, 한석호는 그 이야기들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도현이 성장하는 모습을 이야기 속에서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님, 기예잡술서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도현은 내친김에 기예잡술서의 외공이 효과가 있었다는 말도 해 주었다.
“음…… 놀라운 일이로군. 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다니. 홍콩의 그 복면인은 기예잡술서를 노리고 온 것이었나?”
책 내용보다 책 자체에 숨겨진 무언가를 복면인이 노렸을 거라고 추측해 왔던 한석호는 이마에 주름을 가득 만들었다.
도현의 말대로라면 복면인은 순수하게 책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한번 배워 보시겠습니까?”
“이 사람이 농담하나? 이 나이에 매질을 당하면서 외공을 배우라고?”
질겁한 한석호는 손을 저었다.
“자네, 서울에 언제 올라가나?”
“기차를 타고 와서요. 내일 아침에 올라가려고요.”
“그럼 내 차를 타고 함께 올라가세.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좀 하고. 괜찮겠나?”
“예.”
“잠시 기다리게. 빈소에 들렀다 오겠네.”
한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례식장으로 걸어갔다.
“아니, 자는 사람을 불러내 놓고 혼자만 술을 마시면 어떡해요?”
호태식은 실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물 마시듯 들이켜는 서지철을 말렸다.
“놔, 이 자식아! 술 먹고 죽을 거니까!”
“얘도 아니고, 유치하게. 이모, 여기 대접 좀 주세요.”
호태식은 소주 한 병을 대접에 가득 담은 뒤 한 번에 다 마셔 버렸다.
“내가 먼저 취해 버려야지, 안 그러면 형님 주사를 내가 다 받아 줘야 하니까.”
“태식아, 나 돌아 버리겠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 망할 자식이 다시 내 인생에 끼어들었어!”
“누가요?”
서지철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백도현.”
“백 관장요? 에이, 또 무슨 소리야 그게.”
“나 정말 백도현을 잊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려고 했다. 너도 알지? 내가 전화했잖아.”
“알죠. 형님의 큰 결단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오늘 홍콩에서 온 고객을 만났다.”
“그런데요?”
호태식이 빈 술잔을 흔드는 서지철에게 술을 따라 주며 물었다.
“백도현 뒷조사를 해 달래.”
“예에?”
깜짝 놀란 호태식이 술기운에 눈이 붉어진 서지철을 응시했다.
“어이가 없지? 나도 그랬다 처음에. 아니, 새로운 일이라고 받은 게 왜 또 그 자식이냐고, 젠장.”
서지철이 술잔을 비우며 크게 인상을 썼다.
“진짜예요? 진짜 홍콩에서 온 고객이 백 관장 뒷조사를 의뢰했다고요?”
“그래, 인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네 누나에게 내일 우리 집으로 와서 굿 좀 해 달라고 해. 악운 좀 풀어 달라고.”
서지철은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디 가요, 얘기하다 말고?”
“내일부터 백 관장 조사하려면 잠을 좀 자 둬야지.”
서지철은 계산대로 가 돈을 준 뒤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뒤를 호태식이 쫓아갔다.
“형님, 안 한다고 했어야죠. 그 일을 왜 맡아요?”
“오기가 생기더라고. 또 백도현이냐 하면서. 그래서 그냥 받았지. 택시, 택시!”
택시는 술에 취해 심하게 비틀거리는 서지철을 그냥 지나쳤다.
“태워 주면 따따블로 주려고 했는데, 그냥 가네.”
“형님, 잠시 앉아서 얘기 좀 하고 가요.”
“놔, 인마. 넌 같은 소리 할 거 아니야. 하지만 난 이미 하겠다고 했어. 베테랑 해결사의 자존심이 있지.”
“얘기 좀 하자니까!”
“택시! 택시!”
호태식은 도로로 뛰어들려는 서지철을 뒤에서 잡아 끌어냈다.
“놔, 인마! 갈 거야!”
넘어진 서지철이 일어나려 했지만 호태식이 주짓수로 그를 제압했다.
철근 같은 호태식의 강한 팔뚝에 목이 걸려 켁켁거리던 서지철이 손바닥으로 바닥을 쳤다.
그 모습을 본 호태식이 몸의 힘을 빼며 서지철을 풀어 줬다.
거리에 누워 헉헉거리던 서지철은 호태식이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편의점으로 간 그들은 컵라면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형수님은 연락 없어요?”
“보내 주는 돈은 꼬박꼬박 받으면서 안부 전화도 없다.”
서지철은 이혼한 전처에게 딸의 양육비로 매달 거액의 돈을 보내 주고 있었다.
“아라는 얼굴 언제 봤어요?”
“작년 봄에. 그것도 5,000만 원을 보내 주니까, 그제야 애 데리고 한번 나오더라. 이혼하니까 아주 남남이야.”
서지철은 컵라면의 국물을 다 마신 후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형님, 백 관장 일요.”
“백도현과 직접 부딪치는 일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냥 뒷조사하는 거니까.”
“뒷조사 끝나면 그다음 행동은 뭘까요?”
“내가 그것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지. 나머진 그 중국 놈이 알아서 할 문제니까.”
호태식은 서지철이 먹은 컵라면과 자신이 먹은 컵라면을 정리하며 말했다.
“형님, 저 이제 호검술 도장 관원이에요.”
생수를 마시던 서지철이 움찔했다.
“무슨 뜻이야?”
“목검으로 호검술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더라고요.”
“그래서?”
“백 관장 잘못되면 어디서 검을 배우겠어요.”
호태식은 진지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누나가 그래요. 요즘 제 얼굴이 보기 좋아졌다고요. 굿판에서 귀신들이 내 얼굴 보면 다 도망간데요.”
“퇴마사 해라, 미친놈.”
“형님, 백 관장 괜찮은 사람이에요. 나보다 나이는 여러 살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면도 많고요. 그러니까 조용히 있는 사람 건들지 맙시다. 그러다 칼 맞아 죽어요.”
“나는 뒷조사한다니까, 싸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서지철이 목소리를 높이다가 편의점 직원을 힐끔 쳐다봤다. 목소리를 낮춘 서지철이 말을 이었다.
“백도현이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거, 너 눈치 못 챘냐?”
“뭐가 수상해요?”
“어디서 돈이 나서 세 들어 살던 그 건물을 샀겠냐? 그 녀석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무려 20년간 그 건물 지하에서 근근이 도장을 운영했다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부자였나 보죠.”
“그것뿐이냐, 하루가 멀다 하고 사라져.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짧으면 열흘, 길면 한 달.”
“그래서요?”
호태식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자식,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직업이 있는 게 분명해. 이를테면…… 킬러 같은.”
“뭐라구요? 무슨 말도 안 되는.”
호태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일전에 백도현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고 했지.”
“아, 예. 우연히 도복 갈아입는 거 봤는데 굉장했죠. 람보도 아니고.”
“그게 바로 증거다. 녀석은 세계적으로 움직이는 킬러야.”
서지철은 자신의 말이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을 빛냈다.
“역시 보통 녀석이 아니었어.”
“술 덜 깨네. 무슨 킬러가 도장을 운영해요.”
호태식이 먼저 편의점을 나가자, 서지철이 곧장 뒤따라 나갔다.
“취미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도장을 차마 버릴 수 없었을 테고.”
“형님, 현실을 직시하세요. 그거 망상이에요, 망상. 그러다 정신병원 간다고요.”
“그럼 중국 애가 왜 백도현을 뒷조사해 달라고 했겠어?”
“형님은 지금 어떡하든 백 관장을 나쁜 놈으로 만들고 싶은 거뿐이라고요.”
호태식의 지적에 서지철이 인상을 썼다.
“아니라니까.”
“형님, 분명히 저 말씀드렸습니다. 저 이제 호검술 도장 관원이라고요. 나중에 제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호태식이 택시를 잡아 휭하니 가 버렸다.
“야! 호태식!”
떠나는 택시 뒤에서 서지철이 고함을 쳤다.
“저 새끼가 위아래도 없이 먼저 택시 타고 가네.”
투덜거리던 서지철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뒤이어 오는 택시에 올라탔다.
용사 계곡
영국으로 갈 수 있다고 숀에게 이메일을 보냈지만, 그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답장이 없었다.
도현은 예정대로 옥룡산에 가기 위해 홍영과 상해로 향했다.
상해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소 쌀쌀한 날씨 속에 우산을 쓴 도현과 홍영은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
“엄마는 아직 내가 한국의 회사에 다니는 줄 알아요.”
“미안해요.”
“도현 씨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죠.”
홍영은 바닥을 보며 대답했다. 갑자기 비가 더 심해져 우산 밖에서 쏟아지는 비가 단화를 신은 그녀의 발등으로 튀어 올랐다.
“홍영 씨,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뭘요?”
홍영이 모른 척 물었다.
“내가 정식으로 어머님께 인사드리는 거요.”
“인사는 지금까지 자주 드렸잖아요. 구체적으로 말해 봐요.”
도현이 걸음을 멈추자 홍영 또한 그의 옆에 섰다.
한동안 우산 아래 서 있는 홍영을 바라보던 도현은 자신이 쓰고 있는 우산을 접고, 좁은 홍영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이렇게 평생 한지붕 아래 살고 싶어요.”
“지금도 함께 살고 있잖아요.”
“한방에서…… 윽.”
홍영이 주먹으로 명치를 때리자 도현이 우산 밖으로 밀려났다.
“그런 표현 말고 있잖아요.”
홍영이 야단치듯 말하자 비를 맞고 서 있던 도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말했다.
“나와 결혼해 줄래요?”
“생각해 보고요.”
홍영이 우산을 내밀어 도현의 머리 위에 쏟아지는 비를 막아 주었다.
둘은 우산 하나를 같이 썼고, 서로의 몸이 비에 점점 젖어갔지만 팔짱을 끼며 걷는 그들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정말 집에 같이 안 들어갈 거예요?”
“옥룡산에 다녀온 후 찾아갈게요. 그때는 내가 어머님께 어떤 식으로 말씀드려야 할지, 알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우리 사이 일로 무리하게 태선군을 상대하려고 생각하지 말아요.”
“걱정 마요.”
도현은 홍영의 집이 있는 아파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하늘을 어둡게 했던 비구름은 거의 다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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