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디 임팩트 8권 22화
“들어가요.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조심해야 돼요. 알았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한 그녀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도현은 그녀를 보내며 지었던 미소를 서서히 거두었다.
상해에서 옥룡산 근처까지는 차로 7시간 거리.
과연 태선군은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지 도현은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그는 상해 골동품 판매점에 가서 날이 아직 산 검을 한 자루 산 뒤, 택시를 잡아탔다.
이 검을 사용하게 될지 안 될지는 오로지 등선궁에 있을 태선군의 무공 수위에 달려 있었다.
‘태선군.’
홍콩에서 자가용 비행기로 상해까지 날아온 섭상은 대기 하던 롤스로이스를 타고 태선군의 거처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사부의 호출로 그는 중요한 비즈니스 상대들과의 만남을 전면 취소하거나 연기해야 했다.
차가운 눈빛으로 상해의 거리를 보는 섭상의 얼굴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짜증이 가득해 보였다.
섭상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주성하는 그의 심기를 자극 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조용히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성하야.”
“네, 사형.”
“한국에 다녀왔다지.”
“예? 아 예, 며칠 전에 다녀왔습니다.”
“무슨 일로 다녀온 거냐.”
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주성하는 긴장이 돼서 그런지 갑자기 넓은 차 실내가 좁게 느껴졌다.
“사귀는 여자가 있어서요. 그녀를 만나고 왔습니다.”
“한국 여자인가?”
“예, 홍콩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섭상의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깊은 침묵 속에 주성하는 어서 사부인 태선군의 집이 나왔으면 했다.
태선군은 상해 외곽에 성 같은 규모의 집을 지어 놓고 대 정원과 호수처럼 넓은 연못을 만들어서 살고 있었다.
집 안에는 젊은 미녀들만 열 명이 넘게 살았고, 일류 호텔 출신의 요리사들이 신선하고 값비싼 재료로 태선군의 입맛에 맞는 음식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태선군이 사는 집은 섭상이 돈을 들여 4년 전부터 짓기 시작한 것으로, 그 집을 짓느라 섭상은 베스트엠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을 상당히 쏟아부어야만 했다.
집이 완성돼 태선군이 그 집에서 산 지 이제 불과 두 달여.
태선군은 섭상이 마련한 집에서 황제처럼 호사스러움을 만끽하며 살고 있었다.
경비원들이 지키는 정문을 통과한 롤스로이스는 숲처럼 꾸며진 나무들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간 뒤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비가 그친 하늘에서 햇빛이 내려왔고, 섭상은 자신이 지어 바친 집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사형.”
안에는 섭상과 연령대가 비슷해 보이는 40대 사내 두 명이 그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은 태선군의 셋째 제자 오비와 넷째 고진영이었다.
가볍게 삼사제와 사사제의 인사를 받은 섭상은 의자에 앉았다.
회의실처럼 꾸며진 방 안에는 긴 탁자와 고풍스러운 의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뒤에 들어온 주성하는 팔이 긴 오비와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고진영에게 가까이 가서 인사를 했다.
“삼사형, 사사형,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성하가 예의를 다해 인사했지만, 그들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시선도 주지 않았다.
‘쳇.’
주성하는 긴 탁자의 말석에 가서 앉았다.
시간이 흘러 빈자리가 하나씩 채워졌다. 다섯째 노일문이 등장했고, 여섯째 화지약이 그 뒤를 이었다.
화지약은 아홉째인 료쿄를 제외한 유일한 여자 제자였다. 얼굴은 평범했고 눈은 날카롭게 생겼다.
늦게 와서 죄송하다며 키가 작은 일곱째 육기천과 뚱뚱한 여덟째 방상까지 말석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회의실처럼 꾸며진 방 안에는 대사형 청선과 아홉째 료쿄를 제외한 여덟 명의 제자들이 전부 모였고, 대화 없이 그들은 조용히 사부를 기다렸다.
얼마 뒤 대제자 청선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섭상이 느리게 일어나 청선에게 예를 표했고, 뒤이어 오비와 고진영, 노일문, 화지약, 육기천, 방상, 주성하가 차례로 예를 표했다.
삭막한 인사 속에 청선이 제일 상석에 앉았다.
“거긴 사부님 자리가 아닙니까?”
“오늘부터 내가 사부님을 대신해 검선문을 이끌게 됐다.”
청선의 발언에 제자들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한동안 모두 충격을 받은 듯 어떤 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사부님은 어디 계십니까?”
섭상이 조용히 물었다.
“곧 오실 것이다.”
청선이 대답을 하는데 술 냄새가 섭상의 코로 확 밀려들어 왔다.
“사형, 술기운에 이런 장난을 치시는 거라면, 아무리 대사형이라 하시더라도 사부님의 진노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하시는 행동이 어떤 건지 알고 계시겠지요?”
섭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 그렇지. 사부님께서 우리들에게 아무런 말씀도 없이 대사형에게 문주직을 넘기셨을까.”
우람한 덩치의 고진영이 걸걸한 목소리로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술기운에 농을 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청선이 추상같은 기세로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때 문을 열고 화려한 용포를 거친 태선군이 들어왔다.
제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예를 표했다.
청선은 태선군의 차가운 눈빛에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문주석에서 내려왔다.
“사부님, 제자들의 분위기가 하도 딱딱해서 재미 삼아…….”
말없이 청선을 응시하던 태선군이 천천히 문주석에 앉았다. 문주가 청선의 일을 탓하지 않자 감히 어느 누구도 먼저 나서서 그의 행동을 비난하지 못했다.
좌중을 쓸어 보던 태선군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갑자기 모이라 한 이유는 우리 문의 반도인 무허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작년 여름에는 사부의 손에 극심한 부상을 입어 쫓겨 다니던 처지였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다.
만약 부상을 회복했다면 태선군이 아닌 여기 모인 제자들의 실력으로는 무허를 상대하기가 요원했다.
“이런 기개 없는 녀석들 같으니. 그러고도 너희들이 내 제자라 할 수 있겠느냐!”
태선군이 노하며 손으로 탁자를 치자, 긴 탁자가 두 조각이 나며 주저앉았다.
쿠우웅.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지금 당장 옥룡산으로 갈 채비를 해라!”
“예!”
섭상 이하 전 제자들은 토를 달지 못하고 일제히 대답했다.
복면을 착용하고 등에 검이 든 기다란 사각 목함을 멘 도현은 옥룡산을 이루는 작은 산들의 능선을 타고 거침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옥룡산은 워낙 산이 깊고 넓어서 한낮에도 길을 잃을 수 있는 험지였지만, 도현은 작년에 와 본 기억과 어둠 속에서도 앞을 잘 볼 수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해 빠르게 등선궁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기도 도관이 있었군.’
작년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은 도관들이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영산으로 알려진 옥룡산에 힘을 빌려 도를 닦는 도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등을 들고 도관을 나오던 한 도인은 그의 머리를 뛰어넘어 도관 지붕을 타고 넘어가는 도현을 발견조차 할 수 없었다. 워낙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도현이었기 때문이다.
도관 지붕에서 회전을 하며 땅에 착지한 도현은 산골짜기를 넘어 옥룡산 중 제일 험한 중심지로 계속 들어갔다.
수풀에 가려진 연못처럼 생긴 샘 하나가 나왔다.
청선과 처음 만났던 장소다.
몸을 숙여 샘에서 물을 마시던 도현은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나무를 타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등선궁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검선문의 제자들이나 태선군이 우연찮게라도 나타날 수가 있어서 방심할 수가 없었다.
되도록 들키지 않는 게 좋았다.
높은 나무의 나뭇가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도현은 토끼 두 마리가 짝을 이뤄 샘을 지나치자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고개를 틀어 서북쪽을 응시했다.
‘거의 다 왔어.’
도현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몸을 날렸다.
얼마 뒤 절벽에 붙어 있는 등선궁이 도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도현은 등선궁으로 이어지는 작은 소로를 따라가지 않고 그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 주변의 돌들을 밟으며 등선궁 근처까지 접근했다.
‘그대로구나.’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달빛 아래 고고히 서 있는 등선궁을 보며 도현은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담을 넘어 청석이 깔린 등선궁으로 잠입했다.
‘너무 조용한데?’
불도 다 꺼져 있었다.
관리를 안 한 듯 마당 곳곳은 오래되어 보이는 낙엽들이 굴러다녔다.
도현은 도관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도교 최고의 삼신 원시천존, 태상도군, 태상노군의 목상들이 모조리 반 토막이 나서 바닥에 흉물스럽게 쓰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도현은 황당한 등선궁 내부의 모습에 놀라며 좌측 통로를 따라 방 몇 개를 조사해 보았다.
텅 빈 방은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거미줄과 먼지만 가득했다.
오른쪽 건물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굳은 얼굴로 반 토막이 난 도교 삼신 목상들을 지나쳐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태선군의 거처로 짐작이 되었던 동굴 속 공간은 다른 곳처럼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품속에서 손가락만 한 작은 플래시를 꺼내 동굴 깊숙한 곳까지 다 조사한 도현은 허탈한 눈빛으로 동굴을 나왔다.
“아무도 없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태선군도 청선도, 그리고 그가 보지 못한 또 다른 검선문의 제자들도 누구 하나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래전에 비워진 폐가의 느낌이었다.
도현은 도관 내부에 있는 의자에 앉아 복면을 벗었다.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도현은 이제 어떡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검선문의 위치를 옮긴 건가?”
가능성이 있었다. 외부인인 도현과 용주가 이곳을 알고 내려갔으니 신경이 쓰였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로 검선문이 이사를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도현으로서는 태선군이 사라졌다는 게 난감했다.
“어디로 가서 태선군을 찾아야 하지?”
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어둠에 휩싸인 등선궁을 둘러보다가 복면을 쓰고 다시 일어났다.
어쩌면 검선문과 관련된 도관이 이곳 말고도 또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옥룡산 일대를 샅샅이 조사해서라도 검선문과 관련된 흔적이 있다면 찾아내야만 했다.
도현은 등선궁을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려갔다.
그곳은 옥룡산의 나머지 반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도현이 아직 가 보지 못한 산과 골짜기 들이 즐비한 곳이다.
도관들이 주로 인적이 드문 산 정상이나 골짜기 사이에 위치해 있는 것을 파악한 도현은 골짜기 하나가 나올 때마다 그곳을 중심으로 산 정상까지 파고들어 조사를 했다.
‘여긴 사람이 살지 않은 지 백 년은 넘어 보이는 것 같다.’
다 허물어져서 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도관을 조사하고 나온 도현은 뒤편에 있는 암벽을 타고 올라가 정상 부근까지 확인한 다음 옆 계곡으로 내려갔다.
‘검선문이 옥룡산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면 어떡하지?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건가?’
도현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경사진 가파른 산길을 따라 걷던 그는 아래쪽에서 굉음이 나자 상념에서 깨어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소리지?”
잠시 후 굉음이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도현은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날렸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던 도현은 바람에 실려 온 매캐한 냄새에 신경이 약간 곤두섰다.
사격 후 주변에 남아 있는 화약 냄새와 비슷했다.
‘대체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폭음 소리와 비슷한 굉음의 진원지를 찾아 내려간 도현은 갈수록 짙어지는 화약 냄새에 달리는 속도를 줄이며 어둠 속을 면밀히 살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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