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199화 (199/575)

[199] 디 임팩트 8권 24화

“헛!”

태선군 뒤에 서 있던 오비와 고진영이 놀란 눈빛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열 명의 사형제들 중 처음으로 죽은 자가 나온 것이다.

“누가 죽어?”

“오사제 노일문입니다.”

섭상과 주성하가 한쪽으로 비켜나자 그 뒤로 노일문의 시신이 보였다.

“불을 밝혀라.”

태선군의 지시에 몇몇 제자들이 손전등을 켜서 노일문의 주위를 환하게 만들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제자의 시신 앞에 앉은 태선군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옥룡산에 올라온 소년 노일문의 모습이 떠올라 비통한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수십 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제자를 선택해 데리고 올 때의 그 아련한 기억만큼은 쉬 사라지지 않아서 지금도 눈에 선했다. 그것이 차가운 태선군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어쩌자고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냐, 일문아.”

태선군은 죽은 제자의 얼굴을 만지며 제자의 죽음을 슬퍼했다.

제자들이 다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 같았던 냉정한 사부가 비통해하는 모습에 주위에 서 있던 제자들은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슬픔도 잠시, 노일문의 눈을 감겨 준 태선군은 싸늘한 눈빛으로 목에 난 제자의 검상을 확인하고 뒤이어 가슴의 옷을 찢어 무허가 그에게 남겨 놓은 글을 읽었다.

태선군, 술주정뱅이 청선은 내가 데리고 가네. 청선을 살리고 싶다면 내가 자네의 검에 찔려 떨어졌던 절벽 주변에서 내가 흘린 보양단을 찾아오게. 내 부상이 심해, 그것 없이는 회복이 더디군. 해가 중천에 뜨면 청선을 죽이겠네. 빈손으로 와도 죽일 것이고. 선택은 자네가 하게.

무허는 보양단을 찾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옥룡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폭발할 듯한 눈빛으로 천천히 일어선 태선군은 뒷짐을 지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뭔가 깊이 고민하는 눈치였다.

“섭상.”

“예, 사부님.”

섭상이 공손히 대답했다.

“제자들을 데리고 가, 보양단을 찾아오너라.”

“하지만 사부님, 그리되면 무허가 힘을 되찾아…….”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던 섭상은 태선군의 눈가에 살기가 돌자 급히 말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섭상이 남은 전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자, 태선군은 용사 계곡을 바라보며 외쳤다.

“들어라, 무허!”

웅혼한 내공이 실린 태선군의 목소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넌 반드시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 저들의 대화 소리를 드문드문 엿들은 도현은 지금 상황이 용사 계곡에 낀 자욱한 밤안개처럼 명확히 이해가 안 됐다.

‘노일문이라는 사람이 무허에게 죽임을 당한 것 같은데, 왜 쫓지 않는 거지?’

도현은 섭상이 제자들을 인솔해 사라진 숲 방향을 보며 보양단이 뭔지도 궁금해했다.

노일문의 가슴에 무허가 글을 남겨 놨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도현은 나무 뒤에서 태선군을 계속 지켜봤다.

‘혼자다. 그의 제자들의 방해 없이 싸울 수 있어.’

도현은 달려 나가 태선군과 한판 벌이고 싶은 유혹에 휩싸였다. 예전에는 철벽처럼 느껴졌는데, 오늘 보니 때리면 부술 수 있는 문처럼 느껴졌다.

등에 멘 검이 든 목함에 손을 가져가던 도현은 홍영이 떠올랐다. 서두르지 말라는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싸우고 싶은 유혹을 떨쳐 내며 천천히 검이 든 목함에서 손을 뗐다.

‘기분에 취해 싸울 게 아니야. 좀 더 태선군을 살펴보자.’

오늘 옥룡산에 온 목적에 맞게 충실히 움직이자고 생각한 도현은 시체 옆에 서 있는 태선군을 팔짱을 끼고 계속 지켜보았다.

시간이 점점 흘러 새벽이 지나 하늘이 푸르스름해지며 동이 텄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안개는 오히려 아침이 되자 더욱 짙어졌고, 용사 계곡의 맑은 물소리는 태선군을 지켜보는 도현의 마음속까지 청량하게 만들어 주었다.

환해진 아침에 보는 용사 계곡 일대는 안개와 새, 물소리가 어우러져 신비로움이 더해 갔다.

뒷짐을 지고 제자의 시신 옆에서 밤을 새운 태선군은 계곡에 흐르는 물에 손을 넣어 마른 목을 축였고,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며 갈증이 더해 갔다.

눈앞에 보이는 아버지의 원수를 지켜만 봐야 하는 심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고통스러웠고, 인내심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시간은 어느덧 계속 흘러 해가 머리 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거지?’

하염없는 기다림이 지겨워질 때쯤 섭상과 제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얼굴은 어둡고 무거웠다.

뒷짐을 지고 용사 계곡을 바라보는 사부의 뒤에 선 제자들이 엎드렸다.

“죽여 주십시오, 사부님!”

한목소리로 제자들이 말했다. 보양단을 찾지 못한 것이다.

한동안 말이 없던 태선군은 몸을 돌려 엎드려 있는 제자들을 내려다봤다.

“없는 것이냐, 숨긴 것이냐.”

“감히 어찌 찾고도 숨기겠습니까!”

섭상이 대표로 대답을 했다.

태선군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제자들의 등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지금 이대로 산을 내려가서 무허의 제자 한섬을 찾아내 죽여라. 그러지 못하면 너희들이 대신 벌을 받을 것이다. 내 말 이해했느냐!”

“예!”

“데리고 가거라.”

태선군이 손짓을 하자 노일문 시신이 둥둥 떠서 섭상의 앞으로 왔다.

“사부님, 대사형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섭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선의 운명은 이제 하늘에 맡겨야겠지. 그만 내려가거라. 난 무허를 만나야겠다.”

“제자들이 남아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럼 제자들은 내려가 즉시 한섬을 찾아 죽이겠습니다.”

섭상과 여섯 명의 제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죽은 노일문을 들쳐 메고 계곡을 내려갔다.

제자들이 사라지자 태선군은 번개 같은 빠르기로 계곡을 따라 산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물보라가 쳤고, 작은 고기들이 배를 뒤집어 까며 바위 위에 쏟아져 내렸다.

엄청난 살기를 발산하며 올라가는 그의 기세에 걸리는 모든 것들이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중간에 작은 폭포가 나왔지만 태선군은 허공을 날아 폭포를 넘어갔고, 잠시 뒤 도현도 태선군 못지않은 몸놀림으로 폭포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청선이 무허에게 사로잡힌 것인가?’

조금 전 저들의 대화에 청선이 언급되자 도현은 간밤의 일들이 서서히 이해가 되었다.

아무래도 무허란 사람이 청선을 포로로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청선은 괜찮은 걸까?’

그는 도현을 결정적인 순간 태선군으로부터 보호해 준 사람이었다.

도현은 장신에 술을 좋아하는 청선을 떠올리며 태선군을 뒤쫓아 산 정상부에 다다랐다.

산 정상부는 수십여 미터 정도 되는 길쭉한 암석이 홀로 우뚝 서 있었고, 그 꼭대기에 소나무 한 그루가 거짓말처럼 자라고 있었다.

도현이 보기에 마치 절벽 위에 핀 꽃과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꽃에는 청선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무허가 길쭉한 암석 위에 올라가 청선을 소나무 가지에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이다.

“태선군, 왔는가!”

“무허, 네 이노옴! 내 제자를 죽이고도 감히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냐!”

수십 미터 높이의 암석 밑에 도착한 태선군이 위를 올려다보며 목청을 높였다.

“보양단은 찾았는가?”

무허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밑으로 흘러내려 왔다.

“그만 날 속이고 청선을 풀어 주어라.”

“그건 무슨 소린가?”

“보양단은 이미 네놈 배 속에 있지 않더냐.”

무허가 껄껄 웃었다.

“내 배 속에?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보양단을 먹어도 약효가 나타나려면 여러 시간이 필요 하지. 그래서 넌 시간을 벌려고 이런 짓을 꾸민 것이다. 네놈이 부상에서 회복되기 전에 나와 제자들을 만나면 곤란하니까.”

무허가 빙그레 웃었다.

“뛰어나군, 바보는 아니야. 하지만 뒤늦게 눈치챘으니 애석하기 그지없구나. 넌 지난밤에 나를 바로 찾아와야 했어. 그랬다면 네놈의 제자는 살 수 있었겠지.”

무허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청선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청선은 입에 재갈이 물리고 손발이 천으로 꽁꽁 묶여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 천들은 모두 청선이 입고 있던 옷을 찢어 만든 것들이다.

그래서 청선은 지금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었다. 심지어 속옷조차도 없어서 숨어서 지켜보는 도현은 그의 양물을 속속들이 다 볼 수 있었다.

‘민망하게 잡혀 있군.’

저 상황에서도 정신을 잃은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청선을 보며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모양새를 보니 무허가 태선군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기 위해 청선을 죽이려는 것 같았다.

“청선을 죽이는 순간, 나는 네 집안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살을 찢고 뼈를 추려서 개 먹이로 주겠다!”

“그렇게 해라. 나와 더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니.”

“너도 여기서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가장 고통스럽게!”

“한번 해보자꾸나. 오늘 누가 이기는지.”

“무허!”

태선군이 급하게 소리쳤다. 무허가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은 청선의 머리칼을 자르고 지나갔을 뿐이다.

“태선군, 목이 바짝 타지 않느냐?”

“이놈!”

“전대 문주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바로 이 녀석에게 오원신공을 전수해 주었지.”

무허는 검을 내려트린 상태로 아래에 있는 태선군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냐! 청선은 전수받지 않았다!”

“부정하지 마라. 전대 문주가 임종할 때 여기 이 녀석밖에 없었으니까. 검선문의 제일 무공을 전대 문주가 그냥 가지고 떠났겠느냐?”

“우연히 청선이 전대 문주의 곁에 있었을 뿐이다.”

“우연히든 아니든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청선은 오원신공을 전수받았어.”

무허가 차가운 눈빛으로 옆에 매달려 있는 청선의 몸을 훑었다.

“한데, 오원신공을 이 녀석은 한 번도 익히지 않은 것 같아. 몸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 걸 보면 말이야.”

“전수받지 않았으니까 없는 것이다.”

“태선군, 너는 지금 제자의 죽음이 두려운 거지? 왜 그런 것이냐? 청선은 술을 좋아하고 쓸데없는 도인 흉내나 내는, 네게는 골치 아픈 자가 아니더냐?”

“마음먹기에 따라 불세출의 고수가 될 자질이 있는 제자니까.”

태선군의 대답에 무허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과연 그럴까? 네놈은 청선이 가지고 있는 오원신공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빼앗을지 아직도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넌 지금 겉과 달리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는 것이야. 아닌가? 청선이 죽으면 오원신공은 영원히 배울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니까.”

무허가 소나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소나무가 옆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소나무는 얼마 못 버티고 옆으로 완전히 쓰러질 걸세. 그리되면 자네 제자는 절벽 아래로 소나무와 함께 추락을 하겠지. 살지 못할 거야. 살리고 싶으면 그 전에 나를 이기게. 어렵겠지만.”

무허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소나무가 급격히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수백 미터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태선군이 땅을 밟고 있는 곳에서는 암석의 높이가 수십 미터 정도 되지만 옆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수백 미터 깊이의 절벽이 존재했다.

소나무는 떨어지면 태선군이 있는 방향이 아니라 수백 미터 절벽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태선군이 손을 쓰기 어려운 위치였다.

마음이 급해진 태선군이 눈에서 불을 토하며 수십 미터 높이의 암석을 마치 평지를 밟듯 타고 올라갔다.

‘역시 대단한 자야.’

인근 수풀에서 숨어 지켜보던 도현은 태선군의 신법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수지만 가진 무예는 놀라운 자였다.

순식간에 수십 미터 암벽을 타고 올라간 태선군이 허공에서 검을 뽑았다.

‘드디어 그의 검을 보게 되는구나!’

태선군의 검술이 어떤지 알고 싶었던 도현이 눈을 빛내며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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