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디 임팩트 9권 2화
“파시라고 조르진 않겠습니다.”
“당신 말고도 내 논과 밭을 팔라고 하는 외지 사람이 적지 않게 찾아왔지만 욕만 바가지로 먹고 갔으니, 장난질하려고 왔다면 애당초 조용히 입 다물고 가는 게 서로 간에 좋을 거요.”
“기본이 안 된 사람들이 많이 왔었나 보군요.”
“죽일 놈들이지. 어디서 내 땅을.”
박 노인은 거드름을 피우며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다가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그래, 당신은 평당 얼마를 생각하고 온 거요?”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안 판다니까, 그냥 물어본 거야.”
“괴산군의 부동산에서 거래되는 이곳 지역의 시세보다 두 배 더 비싸게 매입하겠습니다.”
“역시 괜히 물어봤군. 그냥 지금처럼 소작이나 주고 말아야겠어.”
“생각해 보십시오.”
서지철은 어차피 땅을 살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온 건 뭔가?”
박 노인이 서지철이 가지고 온 쇼핑백을 힐끔 보며 물었다.
“술입니다.”
“술?”
서지철은 서울에서 내려오며 사 가지고 온 양주를 내밀었다.
“아니, 뭘 또 이런 걸 사 가지고 왔어?”
박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거 받았다고 해서 땅 팔지 않아.”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부드럽게 대꾸한 서지철은 방 안을 둘러봤다.
“혼자 사시는 겁니까?”
“그렇지 뭐.”
자리에서 일어난 박 노인이 부엌에서 컵 두 개와 안주로 삼을 반찬 몇 가지를 가지고 왔다.
“땅 안 판다고 실망하지 말고 술이나 먹고 가.”
“감사하지만 전 차를 몰고 또 가 볼 데가 있습니다. 어르신 약주 드시는 거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서지철은 양주의 뚜껑을 열고 박 노인의 컵에 술을 따랐다.
“아주 예의가 바른 사람이야, 허허.”
노인은 공으로 들어온 술을 아끼지 않고 서지철이 따라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어르신은 이곳에서 자라셨습니까?”
서지철의 물음에 술이 적당히 들어간 박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여긴 아니고 저 밑에 동네에 살았지.”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왜 이곳으로?”
“이 집은 원래 기골이 장대한 백만석이란 사람이 살았던 집이야. 눈빛이 하도 강해서 나하고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내가 슬슬 기어 다녔지.”
옛 생각이 났는지 박 노인이 술잔을 들고 나지막하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 양반이 죽고 남식이가 이 집과 전답을 판다기에 내가 집을 샀지. 땅도 조금 사고.”
“네에. 그럼 남식이란 분이 백만석 어른의 아들입니까?”
서지철이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며 물었다.
“암, 백남식은 백만석의 아들인데, 제 아비를 닮아 그 사람 역시 기골이 장대했지. 머리도 아주 영리해서 동네에서는 판검사 나오겠다고 수군거렸어. 그런데 아 글쎄, 고등학교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 바짓가랑이를 잡고 서울대에 가라고 통사정을 했는데도 백남식은 꿋꿋하게 칼이 좋다며 대학 시험도 안 봤다더라고.”
박 노인은 가물거리는 수십 년 전 일을 간신히 떠올리며 기억나는 대로 말해 주었다.
“그래요. 대단한 분이시군요.”
노인이 하는 말을 몰래 녹취하던 서지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칼이 좋다는 말씀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아 그건, 남식이 그 사람이 칼에 빠졌다는 말이네. 어렸을 때부터 대단했어. 추수를 할 때도 낫을 칼처럼 휙휙 휘둘렀고, 달밤에 칼을 들고 휘두르는 모습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감탄했지. 읍내에서 큰 싸움이 났을 때도 몽둥이 하나로 여러 사람을 개 잡듯 두드려 팼었고. 하여간 공부며 운동이며 뭐 하나 빠질 것 없었는데, 그놈의 칼에 빠져서는…….”
혀를 찬 박 노인이 술을 들이켰다.
서지철은 박 노인의 빈 술잔에 양주를 따르며 가슴이 무거워졌다.
‘역시 백도현, 그 자식은 태생부터가 범상치 않군. 아버지가 이 정도였으니, 그놈이 눈을 가리고 사과를 벨 정도로 검술 솜씨가 뛰어났겠지.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부러운 새끼.’
도현이 자라 온 배경을 조사하기 위해서 시골까지 내려온 서지철은 쓴 입맛을 다셨다. 도현의 뒷조사를 의뢰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 의뢰에 맞춰 이런저런 조사를 계속해 오고 있었다.
“백남식 씨를 그 뒤로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못 봤지. 독한 사람이야. 남들은 고향 떠나면 한두 번은 찾아오기라도 할 텐데, 부친이 병으로 죽고 물려받은 집과 땅을 싹 정리한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았어. 하아, 그러고 보니 30년도 더 된 옛날 일이로군.”
서지철은 녹취를 중단했다. 노인의 말을 종합해 보면 백도현의 부친 백남식은 고향을 떠나 검을 수련하다가 부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서울에 검술 도장을 차린 것이다. 그 도장을 지금의 백도현이 물려받아, 현재에 이른 것이고.
“재미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응?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서지철을 박 노인이 올려다봤다.
“다른 업무가 있어서요.”
“아이고 이렇게 그냥 보내면 내가 미안한데. 좋은 술만 먹고, 땅은 안 팔고.”
“괜찮습니다.”
땅은 관심도 없는 서지철이 마루에 앉아 구두를 신을 때 뒤따라 나온 박 노인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세 배를 쳐주면 내가 한번 생각해 봄세. 알겠지?”
“연락드리죠. 그럼.”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서지철은 품에서 꺼낸 갈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차로 향했다.
‘아비나 자식이나 칼에 미쳐 있는 건 비슷해 보이는군. 일류대를 포기하고 검술 도장을 연 백남식이나, 명문대를 갈 성적을 갖추고도 대학을 포기하고 검술 도장을 이은 백도현이나 다 똑같은 자들이야.’
그는 도현의 학생 시절 성적까지 다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서지철은 수첩을 꺼내 뭔가를 메모하고는 차를 돌려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는 국도를 따라 청주에서 멀지 않은 충북 소재의 은혜병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백도현의 아버지 백남식이 죽음을 맞이한 장소였다.
죽은 자에게까지 관심을 둘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거액을 보장받은 이상 그는 주성하의 의뢰를 허투루 처리할 생각이 없었다. 직접 방문해 백남식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파악하는 것도 백도현의 뒷조사에 포함되는 사항이었다.
‘기껏 정신병원에서 죽으려고 그렇게 운동을 열심히 했나?’
백남식의 과거 한 단면을 박 노인을 통해 알게 된 서지철은 은혜병원으로 가는 길이 이상하게 편치 않았다.
상해의 한 주택가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당장 내 돈 토해 내지 않으면 배에 바람구멍을 내 주겠다!”
장전된 총을 들고 위협하는 류장의 모습에 일을 의뢰했던 30대 남성이 겁에 질려 소리쳤다.
“도, 돈이 없다고요!”
“이 개잡종 놈아, 돈 없으면 날 찾지 말았어야지! 기껏 납치된 와이프를 구해 줬더니 의뢰비를 떼먹으려고 해!”
고래고래 소리를 친, 대머리에 커다란 주먹코의 류장은 권총을 겁에 질린 사내의 복부에 밀착시켰다.
“돈 내놔!”
“내, 내일 드리겠습니다.”
류장이 권총으로 사내의 뺨을 후려갈겼다.
입술이 터진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벌써 기회는 여러 번 줬다. 당장 내놔!”
50대 중반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박력을 보이며 류장은 사내의 집 안에 있는 집기와 가구 들을 닥치는 대로 부쉈다.
와장창창. 챙그랑.
“제, 제발 그만하십시오. 아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입니다.”
거실에서 주춤거리며 일어선 사내가 류장에게 애원을 했지만 류장은 오히려 더 물건을 집어 던지고 발로 걷어찼다.
“너 같은 놈을 위해 내가 흑사회 녀석들과 힘겨루기를 했다니. 난 목숨을 걸었었어, 이 개자식아!”
주방으로 달려간 류장이 어깨로 냉장고를 힘껏 밀었다.
기우뚱 한 냉장고가 옆으로 쓰러지려 하자 사내가 급히 달려와 냉장고를 바로 세웠다.
“소장님,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내일은 정말 돈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류장은 차가운 얼굴로 사내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댔다.
“악당도 약속은 지킨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법이다. 내게 줄 돈을 아끼려 한 번만 더 공안에 연락을 해서 내가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제보를 한다면 그땐, 내가 구해 온 네놈 와이프와 널 모두 흑사회 녀석들에게 팔아 버리겠다.”
사내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공안에 슬며시 찌른 일을 류장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까지야, 명심해.”
류장은 열린 문틈으로 자신을 훔쳐보는 사내의 와이프를 힐끔 쳐다봤다.
“개만도 못한 것들. 푼돈 받고 살려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류장은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병을 훔쳐보고 있는 사내의 와이프에게 힘껏 집어 던졌다.
놀란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방문을 닫았다.
택시에서 내린 도현은 낡은 오피스 빌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다 6층에서 내린 그는 복도 통로 양편에 있는 여러 사무실을 지나쳐 ‘정보연구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문 앞에 섰다. 홍영이 이야기한 사람이 운영하는 흥신소였다.
‘그분 이름이 류장이라고 했지?’
원래는 홍영이 오피스 빌딩 근처까지 데려다 주려고 했지만, 그녀의 친척이 갑자기 방문을 하는 바람에 도현은 홀로 이곳까지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홍영은 지금쯤 수다스러운 이모들에게 둘러싸인 채 한국에서 온 그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도현은 홍영의 친척들이 있는 그녀의 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오늘은 호텔에서 자야겠어.’
도현은 홍영의 이모 세 명이 자신의 위아래를 훑는 시선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무실 문 위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올려다본 도현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깐깐하게 생긴 중년 여성이 책상에서 잡지를 읽다가 일어났다.
“어떻게 오셨죠?”
“어려운 일이 있어서 상담을 받고자 왔습니다.”
“잠시 저쪽 방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외근 나가신 소장님이 곧 오시거든요. 상담은 그때 받으시면 됩니다.”
“네, 고맙습니다.”
도현은 말 안 듣는 초등학생들을 따라다니며 지도하는 교감 선생님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중년 여성을 뒤로하고 그녀가 가리킨 방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 안엔 낡은 철제 의자 몇 개가 전부여서 편안함보다는 삭막한 느낌을 갖게 했다. 낡은 철제 의자에 앉아서 류장을 기다리던 도현은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또 떠오른다, 그들의 검이.’
용사 계곡의 정상에서 다투던 무허와 태선군의 검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되살아나 변화무쌍한 변화를 일으키며 바람을 몰고 오고 땅을 뒤집었다.
각각의 검들이 환영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맞서 보면 치명적인 위력을 갖춘 무서운 검들이었다.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되는 검의 세계다. 그 모든 것에 무허와 태선군은 그들이 평생 연마한 검의 깊이를 담아 살아서 움직이게 만들었어. 검이 마음과 동화되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절대 그들처럼 수많은 검의 꽃을 만들 수가 없을 거야.’
며칠 전 그들의 대결을 처음 봤을 때는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무허와 태선군은 좁은 방 안에서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일 수에 수백의 변화를 일으키는 검술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며칠 전 도현이 목격한 그날의 광경이었다.
하늘 높이 솟구친 도현은 구름의 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두 사람이 만드는 검술의 환영이 위에서 보니 아름답기 그지없는 매화의 꽃송이를 닮았다.
태선군이 눈에 힘을 주고 검을 휘두르자 그가 만든 매화가 사방으로 수백의 꽃잎을 날렸고, 무허는 검을 자신의 몸 안쪽으로 모아 회전시켜 그 꽃잎들을 다시 하나의 완성된 매화로 만들어 돌려보내고 있었다.
‘검의 꽃을 만들고 파괴하고 다시 회수해 상대방에게 날리고, 검선문은 검으로 꽃을 만드는 문파로구나!’
원수를 떠나 그들이 도달한 검의 경지에 다시 한 번 경탄을 한 도현은 서서히 두 눈을 떴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있었다. 중년의 여직원이었다.
“이쪽으로.”
도현은 그녀를 따라 제법 넓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반갑습니다. 정보연구소 소장 류장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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