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디 임팩트 9권 3화
보통 키지만 체구가 단단해 보이는 류장이었다.
류장이 도현의 위아래를 재빨리 살필 때, 그보다 열 배는 빠른 도현의 시선이 류장을 스캔하듯 스치고 지나갔다.
“이쪽에 앉으시죠.”
도현은 류장이 권하는 소파에 앉았다. 창가의 블라인드를 친 류장은 도현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도현은 잠시 류장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량 번호가 하나 있습니다. 차주가 누구고 거주지는 어디인지 알고 싶어서요.”
“그뿐입니까?”
“네.”
“좋습니다. 의뢰비는 1만 5천 위안이고 선불로 5천, 나머지 잔금은 자료를 받을 때 주시면 됩니다.”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급하시면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만, 금액이 상당히 올라갑니다. 어떡해, 그렇게 해 드릴까요?”
류장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내일 낮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해 주시는 걸로 해서, 1만 5천 위안을 드리죠.”
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하시죠. 한데, 우리나라 사람 같지는 않고, 외국에서 오신 분 같은데.”
“알려 드리면 의뢰비를 절약할 수가 있을까요?”
“하하하, 됐습니다. 상해가 국제도시인 만큼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그러는 거죠.”
도현은 준비해 온 2만 위안 중 5천 위안을 꺼냈고, 류장은 돈을 확인한 뒤 물었다.
“차량 번호가 어떻게 됩니까?”
잠입
이튿날 도현은 다시 류장을 만나서 서류 봉투를 하나 받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깔끔하게 잔금을 치른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류장이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 차량을 왜 조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왜 그런 말씀을 하는지 궁금하군요?”
도현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난 정보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이라서…….”
류장이 말끝을 흐리자 도현은 품속에서 5천 위안을 꺼냈다.
“이거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이 부족하지만, 서비스 차원에서 말해 주겠소.”
추가로 돈을 받은 류장은 도현이 아직 개봉하지 않은 서류 봉투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 안의 서류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당신이 가지고 온 차 번호판의 차주는 섭상이란 사람이오. 베스트엠이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의 회장이지. 그는 상해에 황궁 같은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는데, 차는 그곳 주소지로 등록이 되어 있었소.”
도현은 말없이 서류 봉투를 개봉했다. 류장의 설명대로 차주는 섭상이었고, 상해 인근에 위치한 그의 대저택 주소지가 검은 글씨체로 짧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겨우 몇 줄이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중요했다.
‘태선군은 섭상의 집에서 머물고 있는 건가?’
도현은 어제 인터넷을 통해 본 섭상의 언론 기사를 떠올렸다.
북경 출신인 섭상은 홍콩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묘사가 되어 있었다. 베스트엠도 본사가 홍콩이고.
그런 그가 상해에 집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별장도 아니고, 류장이 황궁과 같다는 비유를 할 만큼 커다란 규모라는 게 흥미로웠다.
‘태선군이 섭상의 차를 이용했다면, 그 집 또한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도현은 오늘 밤이라도 그 집을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류에서 시선을 뗐다.
“그렇군요. 그래서요?”
도현의 담담한 물음에 류장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년에 항저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소. 항저우 밤거리를 지배하는 세 명 중 한 명인 왕석이 자기 집에서 부하들과 떼죽음을 당한 사건인데, 그 일과 관련해 은밀히 조사를 벌였던 공안은 용의 선상에 베스트엠이라는 회사도 올려놨었소.”
“어떻게 됐습니까?”
“중간에 수사는 중단되었소. 죽은 왕석이 저장성 당 간부들과 꽤 가까웠던 모양이지. 아무튼 내가 이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는, 비단 작년의 항저우 사건뿐만 아니라 과거의 몇 몇 살인 사건에서도 베스트엠이라는 회사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오. 모두 무혐의 처리되었지만, 그런 회사의 회장을 당신은 지금 마주한 거란 말이오. 내가 조심하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는 이해하겠소?”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베스트엠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나 때문에 일부러 조사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험, 내가 한때 상해시 공안 수사국에 있었소. 몸이 아파서 그만두긴 했지만, 그때 내가 조사하던 게 그쪽과 관련이 좀 있어서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지. 당신은 푼돈으로 고급 정보를 얻은 거요. 고맙게 생각하고, 섭 회장에게 접근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류장이 비리 혐의로 파면된 사실을 홍영에게 들어서 알고 있던 도현은 그가 몸이 아파서 공안을 그만뒀다는 말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도현은 사무실을 나와 인근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홍영에게 향했다.
라디오를 들으며 소형차 운전석에 타고 있던 홍영은 도현이 차에 오르자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일은 잘됐어요?”
“네.”
도현은 서류 봉투에서 차주와 주소지가 적힌 종이를 빼서 홍영에게 건넸다.
“섭 회장의 차였군요.”
“오늘 밤에 가서 주소지의 그 집을 살펴봐야겠어요.”
“조사만 하고 올 거죠?”
홍영이 노파심에 물었다.
“걱정 마요. 조용히 살펴만 보고 올게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던 도현은 상해 도심지를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섭상의 집으로 은밀히 접근해 갔다.
고급 주택단지가 인근에 있었지만, 섭상의 집은 그중에서도 규모로는 단연 으뜸이었다.
‘왕이라도 사나?’
마치 고대의 성을 연상시키는, 10여 미터 높이의 성벽 같은 담벼락이 좌우로 길게 뻗어 있었고, 성문처럼 생긴 정문엔 여러 명의 경비원들이 사나운 개를 데리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후각이 예민한 개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도현은 정문이 보이는 곳에서 재빨리 벗어나 성벽 같은 담벼락을 따라 집의 배후로 돌아갔다. 집 내부가 얼마나 넓은지 담을 따라 뒤로 가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주변에 논이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섭상은 고급 주택단지와 멀지 않은 이곳의 논들을 한꺼번에 사들여 넓은 집을 지어 놓은 것 같았다.
감시 카메라를 의식하며 높은 담을 노려보던 도현은 내공을 발휘해 담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2차례 도약으로 10여 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은 담에 올라선 그는 몸을 약간 숙인 채 담 너머 집 내부를 길게 둘러보았다.
‘담벼락부터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내부 또한 그렇구나. 마치 수백 년 전 과거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아.’
영화 속 세트장도 아니고 웅장한 여러 목조건물들이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며 달빛과 조명등 아래 아름답게 빛이 났다.
‘저쪽엔 숲과 구름다리로 연결된 연못도 있어.’
명, 청 시대의 고관대작들이 살았을 법한 옛 풍취가 담 위에 앉아 있는 도현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섭 회장이 상당히 공을 들인 집인가 보군.’
나비처럼 사뿐히 담 위에서 뛰어내린 도현은 작은 소리만을 내며 정원 한쪽에 착지했다.
밤이 깊었지만 정원 곳곳에 설치된 석등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와 고아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홍영 씨가 봤다면 좋아했을 텐데.’
조예가 깊은 사람이 관리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보던 도현은 석등의 은은한 불빛에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어두운 곳만을 이용해 정원수 사이를 빠르게 이동했다.
‘어디를 먼저 조사해야 할까?’
그의 목적은 태선군이 이곳에 머물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집 안의 사람을 위협해 알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외부인의 침입을 고스란히 알려 주는 꼴이 된다.
결국 일일이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며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저곳을 먼저 조사해 보자.’
그의 시선이 저택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한 3층 목조 건축물로 향했다.
담 위에서 보았을 때 가장 높은 건물이자 사방을 압도하는 장중한 건물이었다. 고층 건물처럼 높지는 않았지만 면적이 매우 넓어 보이는 거대한 3층 목조 건축물은 집주인이 살 만한 가장 그럴듯한 공간처럼 보였다.
얼굴에 복면을 착용한 도현은 눈을 빛내며 그곳으로 가려다 슬그머니 내딛던 오른발을 다시 거두어 정원수 뒤로 몸을 숨겼다. 단층 건물이지만 큰 절의 대웅전처럼 높이와 규모가 있는 또 다른 목조건물 안에서 눈빛이 차가운 여자가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누굴까?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는데.’
그녀가 정원의 석등 근처에 서자 보다 자세히 얼굴이 보였다. 새끼손가락 길이의 긴 흉터가 볼에 새겨져 있었다. 갸름한 얼굴형에 늘씬한 몸매를 갖췄지만, 얼굴의 흉터로 인해 미모가 돋보이지 않는 여성이었다.
‘칼에 베인 자국 같은데, 태선군의 또 다른 제자인가?’
눈빛이 차가운 그녀는 건물 안에서 울다 나왔는지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석등에 한 손을 기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 뒤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구사저, 너무 그렇게 슬퍼하지 마십시오.”
“너는 모른다. 오사형은 내게 남다른 사람이었어.”
료코의 대답에 주성하가 질투 섞인 눈빛으로 물었다.
“구사저가 오사형에게 마음이라도 품었다는 겁니까?”
“그는 내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다.”
“예에? 목숨요?”
놀란 주성하가 조금 전 그들이 나온 건물을 돌아봤다.
“오사형이 어떻게 구사저의 목숨을 구했다는 겁니까? 무공은 구사저가 훨씬 뛰어난데?”
잠시 대답이 없던 료코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려 주성하를 봤다.
“수련을 하다 검에 너무 깊이 빠진 적이 있어. 누구의 피라도 보고 싶은 욕망에 이성을 상실해서 날뛰다가 휘두르는 검에 내 목을 가져다 대고 말았지.”
“그런 일이!”
주성하로서는 료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료쿄처럼 검이 절실하지도 않았고, 깊이 매료되어 수련하지도 않았다. 천성이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냉정한 여검객 료쿄의 행동을 바보 같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 당시 료쿄가 얼마나 상승의 검도를 추구하며 깊이 몰입했는지 온전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근처에 숨어 있던 도현은 료쿄의 대답을 들으며 그녀가 검을 들고 몸부림쳤을 그 당시의 처절한 장면이 연상되어 마음이 숙연해졌다.
‘대단한 여자군. 그 정도로 검에 빠져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도현은 료쿄가 하는 말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저들이 오사형이라고 칭하는 자가 용사 계곡에서 죽은 노일문이라는 것을 그는 쉽게 짐작했다.
“그때 오사형이 검을 날려 날 구해 줬다. 조그만 늦었다면 난 내 검에 죽었을 거야.”
“몰랐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오사형은 내 목숨을 구했지만 전혀 내색치 않고 그냥 지나갔다. 너라면 그때 일을 핑계로 내게 온갖 요구를 했겠지. 목숨의 빚을 갚으라면서 말이야.”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난 구사저와 지도를 공유한 사이 아닙니까? 그만하면 내 품도 매우 넓은 것 아니겠습니까?”
주성하의 대답에 료쿄가 쓸쓸하게 대답했다.
“네가 어찌 오사형의 마음과 같다 하겠느냐? 애석하구나. 오사형과 긴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는데.”
탄식 섞인 그녀의 깊고 낮은 말에 주성하는 가벼운 표정을 지웠다.
“사실 나도 오사형의 죽음이 원통합니다. 사형제들 중 그래도 내가 가장 마음 편하게 대했던 사람이 그였으니 말입니다.”
“오사형의 죽음에 그는 책임을 져야 한다.”
료쿄가 슬픔을 지우고 차갑게 말했다.
“사부님이 무허는 적어도 10년은 꼼짝할 수 없는 깊은 내상을 입었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